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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알레르기
고은규 지음 / 작가정신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전혀 알지도 못했던 것들이 한꺼번에 다가올 때가 있다.
페이스북에서 누군가가 이 책의 일부를 인용해놓은 것을 보고,
책의 제목도 특이해서 기억에 남았는데
얼마 후에 직접 책을 읽을 기회가 생겼다.
책의 제목이 되기도 한 <오빠알레르기>를 비롯해서
<차고 어두운 상자>, <맥스웰의 은빛 망치>, <엔진룸>, <급류 타기>, <딸기>, <명화>,
이렇게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읽다보니, 작가의 스타일이 좀 느껴진다.
대체로 1인칭 주인공 시점이 많았고 여성 화자가 많았다.
그리고 첫 문장이 굉장히 강력하다.
어떤 내용일지 호기심을 끌어내는 데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ㅎ
주인공들은 특별할 것이 없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사람들이다.
다만 좀더 상처 받은 사람들이라 해야 하나?
아니면 좀더 짠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 해야 하나?
그런데 이 세상에 상처 받지 않고 짠하지 않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나?
그런 사람은 없다는 대답을 가정한다면
이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지금 우리의 이야기이다.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급류타기'를 하는 것처럼
간신히 서서 버티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오빠 알레르기>를 읽으면서는... 절로 웃음이 났다.
내 얘기 같아서.ㅋㅋㅋㅋㅋ
책에서 표현한 것처럼 '알레르기'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나도 오빠가 아닌 사람에게 오빠라고 부르는 게 참 듣기 싫더라.
그게 뭐 남성의 보호를 받고 싶어하는 여성의 보호기제라 생각되어서
등의 거창한 이유는 아니고.
뭔가 오글거린달까.
특히 나이 많은 사람이 오빠라고 부르는 건 정말 너무 간질간질한...
그래서 나는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혈연관계의 진짜 '오빠'를 제외하곤 오빠라는 말을 쓸 일이 거의 없었는데 만약 지금 당시의 '오빠'들을 우연히 만난다고 해도 '오빠'라고 부르지는 못할 것 같다. 선배님이나 선생님 등으로 부르지 않을까 싶다.ㅎ
오빠 아닌 오빠들에게 오빠라고 쓰는 상황에 대해 내가 이렇게 민감한 건 지나친 일인가. 17쪽
나도 남자지만 오빠가 낭만으로 포장될 때가 있다는 걸 부인하지 못하겠어. 선배라고 부르던 어떤 후배가 어느 날 오빠라고 불렀는데, 이상하게 걔한테 잘해주고 싶고 보호해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야. 웃기지? 걔는 내 보호 아래에 있어야 할 것 같고 나는 걔보다 힘이 세져야 할 것 같은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그 관계는 동등한 게 아니잖아. 후배와 나는 관계의 균형을 잃은 게 아닌가 싶다. 29쪽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말을 많이 했거든. 자기가 믿었던 게 다 허방 같다는 거야. 여성성을 포기해야만 남자들과 똑같지는 않더라고 비슷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대. 34쪽
<차고 어두운 상자>의 주인공은 빚 독촉을 받고 있는 대필 작가.
그녀 인생에 빚은 떼려야 뗄 수 없었던 숙명과도 같은 것.
그래서 그녀의 죽음을 확인시켜준 것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사채업자였다. 사회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학자금 대출이다 뭐다 빚으로 시작하는 요즘 세대의 슬픈 현실이 자꾸 떠올랐다.
그래서 사랑도 할 수 없는.... 삼포세대, 오포세대의 단면 아닌가.
습이 가진 가방과 구두와 넥타이와 머플러는 그가 지금껏 지녀왔듯 앞으로도 버리지 않고 오래 사용할 것 같았다. 나는 습의 연인이 되어 그의 곁에서 조금씩 낡고 허름해져도 좋을 것 같다는 감상에 빠져들곤 했다. 나는 첫눈에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감정이 오래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못 견디게 피로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함께 있을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독해졌다. 59쪽
가난이 권태를 불러왔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헤어진 이유는 그래서 가난 때문이다. 62쪽
<맥스웰의 은빛 망치>의 주인공은...
이 소설이 주인공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게 아니라면, 밖에서 그녀를 바라본다면,
사실 정상은 아닌 여자다.
이별을 인정하지 못해 (다른 여자와 결혼한) 전 애인을 찾아가고 그것도 모자라 그의 아내를 때리고,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임을 만들어서 모임 회원의 전 애인을 단체로 스토킹하고
결국 그 사람이 자살까지 하게 만들고...
정신적 결핍이 너무도 확실하게 보이는데, 그녀 스스로는 자신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바람은 집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좀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이것도 역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여자의 목소리는 질량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무겁고 단단한 공깃돌 같은 음절들이 마룻바닥으로 투두둑 흩어지는 듯했다. 79쪽
여자는 혼잣말을 했다. 현실도 그래.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잘 모를 때가 있잖아. 81쪽
여자는 자신만 세상에서 외따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와 따뜻한 밥을 같이 먹고 싶었다. 언제나 그 누군가는 X여야만 했다. 여자는 자신의 바람이 집착일 리 없다고 믿어왔다. 99쪽
이 책의 소설들이 재미있는 건 이런 거다.
소설이 주인공의 관점에서 서술되다보니, 한 인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도 다른 거다.
주인공은 다른 사람을 이상하다 생각하는데,
주인공 주변 사람들은 주인공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엔진룸>도 그러했다.
주인공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그 안의 이웃 사람들이,
주인공이 같이 탄 줄 모르고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주인공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깜짝 놀라는데.
주인공의 행동을 보면 이웃 아주머니들의 수다가 얼토당토하니한 말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실제 자신의 모습이 아닌 상상 속의, 가상의 자신을 만들어 놓고
거짓말을 하며 집을 보러 다니는 걸 보니.. 내가 아는 누군가가 떠올랐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간혹 이상적인 또 하나의 자신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자기 만족을 하는 것 같은.
하지만 그게 탄로나도 자기 잘못은 아니다. 그렇게 됐다고 자기합리화를 한다.
네가 알아? 어쩔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 너같이 예쁜 손톱을 가진 여자는 알 수 없는 일들이 있어. 그건 누구의 잘못 때문도 아니야. 어쩌다 그렇게 됐단 말야. 어쩌다 보니……. 135쪽
<급류타기>의 화자는 남자이다.
이 책의 소설들 가운데 유일하게 화자가 남성이고 결혼했다.
나머지 책의 주인공들은 결혼도 안 했고 애인도 없고 돈도 없는 사람들..
소설의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암울하다.
<맥스웰의 은빛 망치>에서도 자살하는 사람이 있고 이 소설 <급류타기>에서도 자살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다.
주인공의 처남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 그냥 들어갔는데 엘리베이터가 와 있지 않아 떨어져 죽었고 주인공의 누나는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지하철이 들어올 때 취객이 밀어서 죽었고...
주인공이 일하는 회사는 농약 회사인데 툭하면 농약을 마셨으니 해독제를 보내라는 전화가 온다.
이토록 우리는 수많은 죽음에 노출된 채 살고 있고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며 살고 있다.
그게 현실이라고.....
누군가 주검을 대하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고 했다. 그동안 얼마나 잘못 살아오고 있었던가, 살아온 날들을 뉘우치게 된다고 했다. 영훈의 생각은 달랐다.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도처에 깔려 있는 위험들이 그의 눈앞을 어지럽혔다. 마치 세상살이가 위험과 장애가 널려 있는 급류 타기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복되면 죽는다. 광고 속 급류 타기는 경쾌한 레포츠지만, 현실 속 급류에 휘말리는 건 놀이가 아니다. 144쪽
요즈음 영훈은 안전선 안에 서서 지하철을 기다릴 때마다 매우 자주 누나가 생각났고 그리고 누군가 자신의 등을 밀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154쪽
<딸기>는 흔치도 않은 '딸기 알레르기'를 가진 주인공의 이야기인데..
이 소설의 '딸기 알레르기'도 그렇고 <오빠 알레르기>의 '오빠 알레르기'도 그렇고.
'알레르기'가 과거의 아픈 기억으로 인한 정신적인 상처가 만들어낸 질병이라는 점에서
이걸 읽으니 딱 내 친구가 생각났다.
꽃게나 새우 등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었던 내 친구.
집이 지방이었던 그 친구는 공부 때문에 서울에 사는 이모집에 잠깐 얹혀살았단다.
하루는 식탁에 간장게장이 올려져 있기에 먹었는데.
이모가 그건 자기 딸이 먹을 거였다고 왜 네가 먹냐며 눈치를 주었다고.
그 일이 있은 후에 게, 새우 알레르기가 생겼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서러웠으면....
나는 그해 봄부터 딸기 알레르기가 생겼다. 어떨 때는 딸기만 생각해도 살갗이 발갛게 부풀었다. 해마다 봄은 오고 약도 듣지 않는데 딸기는 세상에 나온다. 손등이, 팔뚝이, 목 주변이 만개한 꽃으로 뒤덮여 꼭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즈음 알레르기가 멈춘다. 그때마다 입 안 가득 매캐한 최루가스 냄새가 난다. 239~240쪽
<명화>에서도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집'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로 계속 등장한다.
그런데 그 집들은 하나같이 낡았고 금이 갔고 정전이 되고 방음이 안 되고 냄새가 나고,
수시로 최루탄이 떨어지고... 안락하지 않다.
위태로운 우리의 삶과 같다.
그래서 더 좋은 집을 찾아다니고(<엔진룸>의 주인공) 지금 집을 떠나고 싶어하지만(<명화>의 언니) 여의치 못하다.
"명화야, 언니는 이 집을 떠날 거야. 이 집을 떠난다는 건 나에게 새 삶이 시작된다는 거야. 나, 좋은 마음을 갖고 살 수 있을 거 같아. 정말 아무도 안 미워하면서." 253쪽
하지만 이 소설들을 읽으면서 자꾸 생각하게 된다.
그래, 우리는 모두 이런 삶을 살고 있지.
나만 그런 건 아니야.
작가의 말처럼,
작가가 구축해 놓은 세상 속에서 태어난 인물들을 통해
독자는 조금 위로를 받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