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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재판 - 가리옷 유다의 시복재판에 관한 보고서
발터 옌스 지음, 박상화 옮김 / 아침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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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중한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를 착용한 로마군에 둘러싸인 채 키스를 하고 있는 예수와 유다. 둘의 입술을 떼어 놓으려는 로마군의 억센 팔과 그럴수록 예수의 몸을 감싸 안으려 애쓰는 유다의 손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는 쓰러진 로마군을 위협하듯 단도를 높이 쳐들어 붙잡혀가는 예수를 지키기 위해 거칠게 저항한다.

그러나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자리 잡은 예수와 유다의 모습은 동적인 주변과는 다르게 평화적이며 정적이다.

배신자의 키스,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자의 쓰디 쓴 입술을 바라보는 예수의 눈은 연민과 예견된 슬픔들로 가득 하다.

“유다여, 네가 하고자(해야 할) 일을 어서 행하라” 예수의 말에 유다는 “주여 저는 당신이 원하시던 일을 행했습니다. 만족 하시나이까?”라는 눈빛으로 응수한다. 

위의 장면은 1511년 알브레히트 뒤러의 <예수의 수난> 판화 연작 중 ‘예수가 붙잡히는 장면’을 묘사해 본 것이다.

스승인 예수를 은전 30냥에 팔아 넘겼던 유다. 예수가 유죄 판결을 받자 “내가 죄 없는 사람을 배반하여 그를 피 흘리게 했으니 나는 죄인”이라며 그 은전을 성소에 내동댕이치고는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달았던 유다. 과연 유다는 누구이며 그는 무엇을 얻기 위해 스승을 배신해야 했을까? 2000년이 넘도록 그에게 찍혀있는 ‘배신자’란 낙인은 과연 올바르게 행해진 결과물이었을까?


은전 30냥이라는 비열한 욕심에 의해 예수를 넘겼다는 심리학적 논제나 그리스도에게 실망하여 게쎄마니에서 민중 봉기를 주동하려 했던 혁명당원으로써의 정치적 논제는 유다의 배신을 입증하는데 분명 한계가 있다. 푼돈을 얻기 위해 스승을 팔았다는 논제와 성서 텍스트의 지원을 없이 가상만으로 꾸며진 논제들은 신빙성을 이끌어 내지 못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다는 왜 예수를 배반하게 된 것일까?

정말로 유다는 진정한 예수의 추종자로써, 그를 구세주로써 입증하고자 위장된 배신을 결심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는 예수의 말을 형이상학적이거나 추상적인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며 그의 믿음은 무조건적이었고 순종적이 이었을 것이다.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을 것이다. 별은 하늘에서 떨어지며 모든 천체가 흔들릴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아들의 징표가 나타날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게 될 것이다.”

그는 예수의 말을 실현될 현실로 받아들였으며 그 예언을 실현시키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거룩한 배반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의 희생으로 예수는 사흘 만에 부활하여 영생을 얻었으며 예언은 성취 되었다.

하지만 예수를 구세주로써 입증하고 했던 메시아즘의 신봉자로써의 종말론적 논제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발터 옌츠의 <유다의 재판>은 우리가 지금껏 당연히 여기고 있던 ‘배반자 유다’의 관점을 180도로 돌려놓았다. 배반자 유다를 순교자 유다로 인정하자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신부인 베르톨트 B의 주장과 유다의 파렴치한 행위를 언급하고 있는 신앙검찰관 M신부의 반론을 적절히 배치해 지금껏 당연하다고 느껴왔던 죄의 본질문제를 파헤쳤다.


내부의 적은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직장이나 도시에서 혹은 이해관계로 구성된 단체라 할지라도 내부의 적은 항상 숨어있기 마련이다.

내부의 적이란 보이는 실체일 수도 있지만, 나(단체,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허상으로 만들어 놓은 이념이나 사상 혹은 허위의 인물일 수도 있다. 보이는 외부의 적과 싸울 때 보다, 보이지 않는 내부의 적을 외부의 적으로 돌림으로써 나머지 구성원들이 갖게 되는 결속력을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

만약 유다가 조직의 숙원을 위해 스스로 내부의 적이 된 것이라면. 조직의 거사를 위해 스스로 자객이 되어 우두머리의 숨통을 끊고 자신도 자결함으로써 완벽한 목적을 수행한 것이라면. 더구나 그러한 행위가 조직원들에게는 비밀로 부처진 채 우두머리와 자객 둘만의 은밀한 약속이었다면. 내부의 동료마저 속여야만 이루어지는 완벽한 시나리오이었기에 더욱더 은밀히 행해야하는 일이었다면. 그래서 이 비밀을 아는 예수와 유다가 서로 땅을 딛지 못하고 - 한사람은 십자가에 한사람은 나무에 목을 매고 - 나무에 매달려 죽는 것으로 죽음 안에서 하나를 이루었다면, 유다를 진정한 순교자로 추앙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하지만 이러한 가상 역시 막연한 추리에 불과하다.


이 책안에서 서술자의 역할을 맡고 있는 교회법 박사 에레토 P는 예부성성의 전권대리인으로써 유다의 시복재판에 관한 예심재판의 문서를 추려서 발췌록을 만드는 공식적 임무를 부여 받았다.

그 역시 유다를 옹호란 B의 청원문과 이에 반박하는 M의 문서 그리고 대주교의 재판문을 읽기 전까지는 유다의 배신행위를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꼼꼼히 짜여진 문헌과 설명을 보며 그는 유다의 행위가 곧 순교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유다를 순교자로 추대하려 했던 베르톨트 B는 존경받던 목자에서 ‘평화를 깨뜨리는 유다’로 낙인 찍혔으며, 나중에는 공공연하게 테러의 위협마저 감소해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베르톨트 B는 마지막 희망으로 P에게 모든 자료와 권한을 위임을 하고 몇 달 후 생을 마감한다.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다른 길을 가야했으나 죽음 안에서 일치를 이룬 두 사람. 한 사람은 영원한 카인의 후에로 또 한사람은 영원한 안식자로 남아 역사의 평가를 달리하고 있다.

에레토 P는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입에 ‘시카리’ -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반달 모양의 단검을 가지고 다니며 로마에 협력하던 인물들을 암살하던 민족주의 계열의 테러리스트 -로 회자되는 가리옷 유다의 배신에 대해 다른 각도의 해석을 덧붙인다.

바로 ‘유다의 희생물로써의 예수’ 예수의 희생물로써의 유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획 아래 공동 희생물로써의 유다와 예수’가 그것이다.

첫 번째 와 두 번째 해석은 각각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이용했다는 억측이 난무한다.

민중혁명을 이끌기 위해 예수를 이용했다는 유다의 입장과 절대 악으로 부여된 유다의 임무를 예수가 이용했다는 두 가지 해석은 많은 억측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문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둘은 선과 악으로 나뉘어 서로의 역할에 충실했으며 게쎄마니의 키스를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계획을 이루었다는 세 번째 해석이다.

이 부분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논란의 대상이며 그러기에 재판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끝나지 않은 것이 있다.

‘재판 기록은 공개되어 있습니다.’로 끝마치는 이 작품은 비장의 카드를 하나 숨기고 있다.

그 비밀은 푸는 열쇠는 책의 앞부분에 소개된 ‘이단 종파인 카인종파가 성서로 사용했다는 유다의 복음서를 찾을 수 없었다 ’라는 문장과 ‘발터 옌츠’라는 이름에 있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숨겨진 카드를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묘미이며 ‘공개된 재판 기록’을 읽고 유다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것 역시 독자에게 맡겨진 또 하나의 과제이다.

카드의 뒷면이 정 궁금해서 못 견디는 분들을 위해 이 책은 친절하게도 ‘부록’이라는 장에 그 해답을 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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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권정현 외 지음 / 샘터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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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세상은 보이는 힘과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한다.

국가나 법, 혹은 경제력 같은 권력이 보이는 힘으로 정의된다면 보이지 않는 힘은 권위주위와 계급  등 수직적인 관계를 말할 것이다.

수직의 꼭대기에 오르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행되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휩쓸려  인생을 살아간다.

상사로부터 하달 받는 불합리한 지시에서부터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억압을 통해 우리는 잊었던 ‘분노’를 서서히 끄집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에 너무도 잘 길들여져 있는 우리의 이성이란 놈은 분노를 통제하고 스스로에게 ‘이래선 않되’라는 주문을 걸어 즉각 감성모드를 해체 시켜버리기 일수다.  


‘우리는 분노가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라는 자문으로 시작된 소설 동인 [작업]의 두 번째 소설집은 ‘분노’라는 모티브를 주제로 한 공동작업이다.

현재사회의 보이지 않는 힘에 길들여지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문제를 담은 주제의식에는 세상의 허위를 거부하자는 작가들의 의지가 깔려 있다.


허와 위선으로 구성된 가족사, 일탈적 저항조차 꿈꾸지 못하는 서민들, 현실이라는 허구가 더 그럴듯해 보이는 현실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잠재된 욕망에 짓눌려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열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대부분 역시 현실을 인내하는 사람들이다.

‘독립의 자유를 꿈꾸면서도 끊임없이 기성의 안정과 소통을 갈망하는’ 주인공(봉덕동에 가다)이나 고갈된 인간성에 회의를 느끼는 동성애자인 외계인(환상의 바이킹) 그리고 ‘도저히 수궁할 수 없는 비루한 삶의 내압과 폭력을 견뎌내야 하는 주인공(광화문 그 사내)들은 한번쯤 보이지 않는 힘에 저항해 봤지만 결국 괴리감과 비애감이라는 설움을 맛본 사람들이다.

 

물론 소설 속 등장인물 중에는 감추어진 분노를 토해내는 인물도 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거리에서 곧 돌아오겠다는 엄마의 말을 믿고 풍선을 파는 아저씨의 자전거 꽁무리를 따라 갔던 청년은 ‘엄마가 나를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설움 때문에 수년간 잠재된 분노를 안고 살았다. 술자리에서 우연히 청년을 만난 주인공은 직장 상사이기도한 후배의 개인주의에 휘말려 퇴직을 했지만 그것이 현실이라며 그 분노를 삭이는 캐릭터다.

이야기 도중 청년은 반지가 사라졌다며 호들갑을 떤다. 그리고는 주인공을 향해 묻어두었던 분노를 토해낸다. 어리둥절한 주인공은 그로 인해 경찰서까지 가는 모욕을 겪었다. 하지만 그는 그 흔한 ‘욕’마저 내뱉지 못하는 캐릭터다. 그의 억울함이 분노로 변환되지 못한 까닭은 자신에게 모멸감을 준 청년의 분노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 청년의 어린 시절을 동정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억울한 반지 도둑의 누명이 씌워져도, 그 청년의 손아귀에 반기가 들려있음을 알아챘어도 그는 침묵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서러워 부인에게 “나 좀 데려가 달라”며 엉엉 울뿐이다.(광화문 그 사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절망들과 엉켜 살아가는가?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분노들을 이해하고 있을까?  어제의 동지가 바로 내일의 적이 되어버리는 현실에서. 그때그때 마다 분노를 표출한다면 우리는 유치장을 집 삼아 지내거나 정신병동에 장기 체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타당한 이유에도 분노를 삭이며 살아가야하는 현대인들의 비극을 못마땅하게 여길 수는 있어도 비난하지는 못할 것이다.


동성애자인 외계인은 어떠한가?

자신들에게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았는데도 지구인들은 그에게 모멸감을 안겨줬다. 살아갈 용기를 주는 이라고는 아직 동심이 가시지 않은 아이들뿐이다. 유원지에서 우연히 만난 소녀를 통해 외계인은 자신을 감싸고 있던 분노를 잊어간다. 아이의 천진함은 그의 정신세계를 정화한다.

소설 속에서 그는 외계인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실상은 ‘외국인 노동자’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려져도 상관없을 것이다. 억압과 소외를 받는 모든 이는 이 땅에서 이방인이며 다른 행성의 생명체인 것이다.

외계인이 만난 소녀는 예닐곱 살이 되어 보이는 작고 귀여운 아이였다.

그러나 소녀는 동심과 천진난만하고는 거리가 멀다. 아이는 어른의 사고와 행동을 일삼고 있다.

그는 실망감으로 인해 좌절한다. ‘너는 나를 정말 시켰어’라는 그의 마지막 말에서 외계인의 제어할 수 없는 분노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분노는 외계인보다도 소녀가 느껴야할 감정이었다.

이미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고 기를 나이가 지나버린 그녀는 단지 몸이 자라지 않는 병에 걸렸을 뿐이다. 이 아이 역시 장애인 이라하는 이름으로 불려도 상관없다.

타인의 시선에 맞춰 자신을 만들어가야 했던 그녀의 인생은 얼마나 많은 분노들로 들어차있었을까?

오해로 인해 비롯된 그녀의 죽음은 그녀의 어머니에게 또 얼마나 깊은 분노를 전이 시킬까?

땅에 닿아 죽기도 전, 그녀는 역류하는 분노로 인해 먼저 숨이 끊어졌지 않았을까?.

광화문 사내처럼 타인의 울분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이해했다면 외계인는 관대해질 수 있었을까?


타인과 차별된 삶을 살고 있는 어그러진 나를 보거나(봉덕동에 가다), 분노가 전이된 부조리한 가족사 속에서(지붕 위의 날들) 타인이 나를 제멋대로 조명해서 힐책할 때(환상의 바이킹), 상대방의 분노에 대응하여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어젯밤에 우리아빠가) 분노의 표출은 ‘너’와 ‘나’라는 ‘우리’가 사라진 공백의 여파일 것이다.

부조리한 구조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도 나와 결합된 개인적인 일에는 쉽게 분노하는 까닭은 우리가 너무 병약하거나 겁 많은 집단 속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열명의 젊은 작가들은 그 연약한 사회에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사오 신’ 38구경 시큐리티 식스 리볼버의 총구를 디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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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면서 같은 - 교포 만화가 데릭 커크 킴의 섬세한 성장기록
데릭 커크 킴 지음, 김낙호 옮김 / 길찾기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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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시안 아메리칸의 성장 보고서 

『다르면서 같은』은 2003년 말부터 만화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교포 만화가 데릭 커크 킴의 작품집이다. 이 작품집은 데릭 커크 킴의 홈페이지(www.lowbright.com)에 2000년부터 3년간 연재된 만화를 모아 출간한 것이다.

2003년 'Ignatz Award' 수상과 'Publishers Weekly' 2003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는 등 화제가 끊이지 않았던 이 작품은 이민 1.5세대인 데릭 커크 킴의 가녀린 섬세함과 은은한 감수성이 빚어 놓은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표제작이기도한 「다르면서도 같은」이 보여주는 매력은 미국인과 소수민족,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는 무거운 구도를 다루면서도 결코 재미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데 있다. 속사포같이 쏟아지는 말풍선들은 미국의 전형적인 코미디를 보는 느낌이지만 그 안에 담긴 위트와 군더더기 없는 대사들은 경쾌한 리듬감을 안겨준다.

한국계 미국인인 사이먼과 낸시를 통해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한 짧은 성찰'을 보여준 그의 또 다른 작품적 특징은 '오리엔탈적'인 냄새가 작품 전반을 감싸고 있다는 것이다.

"오리엔탈 맛이란 게 도대체 뭐지? 동양 전체를 어우르는 맛이 있다는 거야?"
"간단해. 여기 닭고기 맛과 소고기 맛 수프가 있지? 연역법에 의하면 이 속에는 아마 동양인들을 갈아 넣었을 거야."


사이먼과 낸시의 대화처럼 그의 작품 속에는 아메리칸 이면서도 아시안으로 살아가는 작가의 정체성 -아시안 아메리칸, 미국의 한국인 1.5세대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아웃사이더의 기질,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소속될 수 없는 어중간한 정체성- 이 묻어나 있다.

그의 만화가 동양적인 정서를 많이 내포하고 있다는 느낌은 만화를 형성하고 있는 크고 작은 선들이 부드러운 곡선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얼굴의 윤곽, 바다와 구름 등 배경에서 보이는 선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다.

「다르면서도 같은」이 보여주는 비밀과 고백 그리고 이해와 성장이라는 새로운 구도의 맛깔스러움은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이다. 사이머과 낸시가 털어놓은 각자의 고백으로 시작된 여행에서, 그들은 잊고 있었거나 새로이 발견한 '나'를 찾아낸다. 내적 성숙이란 마음속에 비밀을 바꿔가며 커나가는 것이다. 마음에 담아두었던 하나의 비밀이 소멸되어 그 수명을 다할 때 우리는 조금씩 성장 해나가는 법인가 보다.

이 작품집에는 이민자들의 자화상적 이야기가 담긴 「휘발유」, 2000년부터 약 2년간 한국에서 생활하며 그린 「똥침」, 9·11 다음날 그렸다는 폭력의 단순성을 파해친 「인간과의 인터뷰」등 총 열세 편의 명료하고 힘있는 주제의식을 지닌 단편들이 묶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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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아르 보부아르
클로딘 몽테유 지음, 서정미 옮김 / 실천문학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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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간의 출현 이래 즉, 아담과 이브가 자손을 퍼뜨리기 시작할 때부터 남성과 여성은 공존해 왔다. 하지만 20세기가 넘어서도록 여성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21세기인 지금도 여성은 창조 중이다.

『보부아르 보부아르』에는 두 명의 보부아르가 나온다. 첫 번째 보부아르인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성의 문제, 여성의 시각에서 작품을 만들었던 작가였다. 사르트르의 영혼적 연인으로도 유명했던 그녀는 1949년에 발표한 『제2의 성』으로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책이 가져다준 '공쿠르상'의 영예는 대단했지만, 여성의 억압을 적나라하게 고발했다는 이유로 그녀의 작품은 신랄한 비난을 받았다. “이제 나는 당신네 여주인의 질의 모든 것까지 잘 알게 되었소.”라는 작가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비난은 당시 언론과 사회의 분위기가 얼마나 여성을 잘 묶어두고 있었는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제2의 성』은 많은 여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으며, 후에 '제2의 성의 딸들'로 불려지는 페미니스트들의 유대감을 밀착시키는데 커다란 도움을 줬다.

두 번째 보부아르인 '엘렌 드 보부아르' 역시, 비록 언니 '시몬 드 보부아르'와는 다른 형태인 안정된 제도 속에서 살아왔지만, 여성의 위대함이 단지 남성이라는 그늘에 묻혀버리는 현실을 안타깝게 느끼고 있었다. 노년의 작품인 '여자는 고통받고 남자는 심판한다', '마녀 사냥은 언제나 열려있다'등 제목에서만 보더라도 페미니스트 냄새가 물씬 풍기는 현실참여적인 작품은 그녀가 남성 위주의 예술적 시각에 대해 얼마나 넌덜머리를 치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심지어 언니인 시몬의 작품 속에서 조차 여성 예술가들은 정중한 대접을 받지 못했었다는 사실을 엘렌은 안타까워했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금기를 중요시하던 엄마보다는 언니 시몬을 의지했던 탓에 엘렌은 시몬의 모든 점을 이해하려고 했다.

1940년 후반에 프랑스에서 발표된 실존주의 사상이 짙은 작품들은 사회와 생존의 현실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새로운 바탕 위에서 삶의 의미를 새롭게 추구하려는 공통된 경향을 띠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은 실존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살아있는, 혹은 살아가는 여성을 표현하기 위해 보부아르 자매는 각각의 재능으로 작품에 몰두했다.

비록 명성의 차이는 있었지만 두 여인은 여인들의 미래를 설계했다. 남성우월사회에 끊임없이 '여성'이라는 주제로 작품을 내놓았던 시몬이나 사르트르의 제자이기도한 남편 리오넬과의 안정된 가정을 유지하며 800점의 유화를 남겼던 엘렌이나, 그녀들은 시대가 요구하는 순종과 여성적 나약성을 깨뜨리기 위해 몸부림 쳤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와 엘렌 드 보부아르는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당시의 사회가 요구했던 '정숙한, 체념적인 여인들의 생'과는 다른 열렬한 생을 원했었다. 엘렌의 말처럼 그녀들은 '삶'과 '창조'를 원했었던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클로딘 몽테유는 1970년대에 여성운동을 전개하던 중 시몬을 만났다. 그리고 '제2의 성의 딸'로써 두 자매와 인연을 맺게 된다.

"유엔에 의해 '여성의 해'로 선포된 1975년 이래 지지자들의 수는 해마다 늘어났다. 낙태, 강간, 근치상간, 매 맞는 여성 등 금기로 여겨지던 주제들에 대한 침묵의 법칙을 깨뜨림으로써 우리는 사회의 시선을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의 조건은 후퇴'하고 있다고 그녀들은 믿었다. 칼라스처럼 '행복할 수 있는 많은 자질을 갖추었던 여성이 불행하게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도 여성은 창조 중이며 아직까지도 완벽한 탄생을 하지 못했다. 1986년 시몬이 숨지던 날 몽테유는 눈물 속에서 기사를 썼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성은 하나의 의무를 가지고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산다는 것이었다."

문인과 화가로서 두 자매가 보여준 삶과 창조에 대한 열망과 투쟁은 꿈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큰 경종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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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녀
넬리 아르캉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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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형성과 더불어 시작된 ‘매매’라는 상업적 교류는 음탕하고 더러운 오물이 버려지는 시장 뒷골목에서도 성행되었다. 물건을 사고파는 복잡한 행렬들 속에 섞여 창녀와 그녀를 쫒는 남자들의 발길이 시장 뒷골목으로 사라져도 활기 찬 대낮의 소음들은 그들의 행적을 덮어주었다. 또한 밤을 화려하게 수놓은 불빛들은 그들의 신음 소리를 분산시키기에 아주 알맞은 속도로 깜박거리며 남성의 욕망을 끌어당겼다.

창녀라는 유서 깊은 직업이 돈과 남성의 쾌락만을 위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기원전 삼천 년경 수메르의 점토판에 새겨진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금전의 보수를 받지 않는 ‘성적 구호의 목적’을 가진 접대 매춘부도 있었음을 말해 준다. 주로 여행자를 상대로 자선적으로 행해졌던 이 풍속은 나중에 신성화되어 제사 의식의 형식을 취하는 신전 매춘이 되었다. 이 배후에는 성의 주술적, 신비적인 힘, 즉 생식력으로써의 기능을 신앙과 결부한 사유가 있었다.

헤로도토스의 기술에 의하면 이집트의 파라오는 스스로 딸을 신전의 창녀로 제공하여 모범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모든 정황에도 ‘여성’ 스스로가 성의 주체가 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창녀라는 직업은 개인적인 사유나 아무리 거국적인 사명을 띠더라도 '남성’이라는 주체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직업이 세분화되고 성의 노출이 평등을 향하게 됨으로써 몸을 파는 직업인의 의식이 변한 것은 사실이다. 매춘의 행위가 여성에 국한되지 않고, ‘돈’이라는 권력에 따라 남성들 역시 자신의 성을 상품화하게 됐으며, 여성들 역시 생존과 더불어 자신의 미(주체)를 발산하기 위해 성을 개방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인지 ‘세상 남자들의 구미를 보다 확실히 끌어 모으기 위해, 창녀 노릇 제대로 한번 해보기 위해, 대학 공부까지 한다’는 푸른 눈동자에 눈부신 금발의 넬리 아르캉의 고백이 낯설지만은 않은 것이다.

“그래 난 내가 하는 얘기 속에서 아름답길 원해. 단숨에 내 생각 속의 열정을 모조리 드러내고 싶다고, 심술궂고 덩치 큰 늑대가 빨간 모자를 찾아다니는데 정작 빨간 모자는 자기를 쫓는 늑대 어디 없나 아쉬워하는 꼴이지, 나한테는 권리가 없는 뭔가가 내게 주어진 걸까, 아니면 미치도록 갈망하는 뭔가에 대한 권리가 내게 없었던 걸까.”

그녀의 말처럼 ‘성’의 주체는 여전히 늑대들이 움켜쥐고 있다. 그녀들의 촉촉한 젖가슴과 미끈한 목덜미를 물어뜯는 야수의 눈빛은 여전히 성의 권리를 나뉘어 갖길 거부한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성을 창출하는 창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구든지 값을 지불하는 자에게 나 자신을 줘버리는 시간 동안, 나는 나 자신을 여자로 만드는 것에 전념하지. 바로 내 명성의 핵심인 이 여자다움에 말이야 (…) 하지만 그건 여자다움만으로는 고객의 변덕을 온전히 감당하기 어려울 때 그냥 나를 집어삼켜버리는 무한정의 순응성을 통해 가능해지는 일이지. 그래 분명히 말하지만 여자다움이란 끝이 없으면서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돼야 고갈되고 마는 순응성이라고.”

여성의 최대 무기는 남성을 무력화 시키는데 있다. 남자가 여자에게 바라는 것이 자신에게 ‘순응하는 여성’이라면 여자는 그런 남자의 피상적인 생각에 순응하는 척하며 남자의 오만한 성기를 무력화 시키면 되는 것이다.

남자의 성기가 권력의 의미를 갖는다면 늘어진 성기는 이미 모든 권력을 잃은 노인의 한숨과도 같을 것이다.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거나 영원히 잠들게 하는 것은 오직 여성만이 갖고 있는 ‘재창조’의 특권뿐이다.

“삶에 대해 무언가를 알기 위해선 그것을 재창조해야만 하지.”

잘못 발전된 성이라는 개념을 재창조하기 위해서는 ‘여자라는 무기를 최대한 활용’하거나 ‘거부’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오년 간 매춘에 종사했던 아르캉의 성에 대한 고백은 끊임없이 주절대는 자유연상과 비관적인 말들로 채워져 있다. 종교관으로 무장한 아버지와 건조해진 아버지의 뒤꿈치만을 바라보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가족의 해체가 빈번히 벌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비꼬고 있다. 또한 이 땅의 아버지가 모두 그녀의 고객이 될 수 있으며 모든 여자들 또한 이미 창녀의 삶을 살고 있다고 넌지시 일러준다.

“내 인생에 단 한 남자라는 건 위험한 발상이야. 딱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내 안의 증오가 너무 커, 내게는 행성 전체, 전 인류가 필요해. 게다가 내가 한 남자에게 무얼 줄 수 있어, 아무것도 없지.”

그녀의 증오는 남자라는 종(種)을 넘어서, 애정이 상실된 이 땅의 모든 연인들에게 뿌려지는 독설이다. 애정 없이 오로지 살붙이라는 명목에만 매달리는 ‘가족’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부실하게 지어놓은 건축 구조인지, 또한 사랑 없는 행해지는 부부행위가 매춘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를 아르캉은 그녀만의 독설적인 화법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녀의 관점에서 본다면, 애정 없이도 해치울 수 있는 부부관계보다는 ‘노력을 요하는’ 매춘은 그 대가로 일정한 수당을 받을 수 있는 ‘노동의 산물’이라서 더욱 값진 일일수도 있다. 또한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면 ‘이 땅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도전해보는 것도 그녀다운 발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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