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유다의 재판 - 가리옷 유다의 시복재판에 관한 보고서
발터 옌스 지음, 박상화 옮김 / 아침 / 2005년 6월
평점 :
육중한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를 착용한 로마군에 둘러싸인 채 키스를 하고 있는 예수와 유다. 둘의 입술을 떼어 놓으려는 로마군의 억센 팔과 그럴수록 예수의 몸을 감싸 안으려 애쓰는 유다의 손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는 쓰러진 로마군을 위협하듯 단도를 높이 쳐들어 붙잡혀가는 예수를 지키기 위해 거칠게 저항한다.
그러나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자리 잡은 예수와 유다의 모습은 동적인 주변과는 다르게 평화적이며 정적이다.
배신자의 키스,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자의 쓰디 쓴 입술을 바라보는 예수의 눈은 연민과 예견된 슬픔들로 가득 하다.
“유다여, 네가 하고자(해야 할) 일을 어서 행하라” 예수의 말에 유다는 “주여 저는 당신이 원하시던 일을 행했습니다. 만족 하시나이까?”라는 눈빛으로 응수한다.
위의 장면은 1511년 알브레히트 뒤러의 <예수의 수난> 판화 연작 중 ‘예수가 붙잡히는 장면’을 묘사해 본 것이다.
스승인 예수를 은전 30냥에 팔아 넘겼던 유다. 예수가 유죄 판결을 받자 “내가 죄 없는 사람을 배반하여 그를 피 흘리게 했으니 나는 죄인”이라며 그 은전을 성소에 내동댕이치고는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달았던 유다. 과연 유다는 누구이며 그는 무엇을 얻기 위해 스승을 배신해야 했을까? 2000년이 넘도록 그에게 찍혀있는 ‘배신자’란 낙인은 과연 올바르게 행해진 결과물이었을까?
은전 30냥이라는 비열한 욕심에 의해 예수를 넘겼다는 심리학적 논제나 그리스도에게 실망하여 게쎄마니에서 민중 봉기를 주동하려 했던 혁명당원으로써의 정치적 논제는 유다의 배신을 입증하는데 분명 한계가 있다. 푼돈을 얻기 위해 스승을 팔았다는 논제와 성서 텍스트의 지원을 없이 가상만으로 꾸며진 논제들은 신빙성을 이끌어 내지 못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다는 왜 예수를 배반하게 된 것일까?
정말로 유다는 진정한 예수의 추종자로써, 그를 구세주로써 입증하고자 위장된 배신을 결심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는 예수의 말을 형이상학적이거나 추상적인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며 그의 믿음은 무조건적이었고 순종적이 이었을 것이다.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을 것이다. 별은 하늘에서 떨어지며 모든 천체가 흔들릴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아들의 징표가 나타날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게 될 것이다.”
그는 예수의 말을 실현될 현실로 받아들였으며 그 예언을 실현시키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거룩한 배반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의 희생으로 예수는 사흘 만에 부활하여 영생을 얻었으며 예언은 성취 되었다.
하지만 예수를 구세주로써 입증하고 했던 메시아즘의 신봉자로써의 종말론적 논제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발터 옌츠의 <유다의 재판>은 우리가 지금껏 당연히 여기고 있던 ‘배반자 유다’의 관점을 180도로 돌려놓았다. 배반자 유다를 순교자 유다로 인정하자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신부인 베르톨트 B의 주장과 유다의 파렴치한 행위를 언급하고 있는 신앙검찰관 M신부의 반론을 적절히 배치해 지금껏 당연하다고 느껴왔던 죄의 본질문제를 파헤쳤다.
내부의 적은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직장이나 도시에서 혹은 이해관계로 구성된 단체라 할지라도 내부의 적은 항상 숨어있기 마련이다.
내부의 적이란 보이는 실체일 수도 있지만, 나(단체,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허상으로 만들어 놓은 이념이나 사상 혹은 허위의 인물일 수도 있다. 보이는 외부의 적과 싸울 때 보다, 보이지 않는 내부의 적을 외부의 적으로 돌림으로써 나머지 구성원들이 갖게 되는 결속력을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
만약 유다가 조직의 숙원을 위해 스스로 내부의 적이 된 것이라면. 조직의 거사를 위해 스스로 자객이 되어 우두머리의 숨통을 끊고 자신도 자결함으로써 완벽한 목적을 수행한 것이라면. 더구나 그러한 행위가 조직원들에게는 비밀로 부처진 채 우두머리와 자객 둘만의 은밀한 약속이었다면. 내부의 동료마저 속여야만 이루어지는 완벽한 시나리오이었기에 더욱더 은밀히 행해야하는 일이었다면. 그래서 이 비밀을 아는 예수와 유다가 서로 땅을 딛지 못하고 - 한사람은 십자가에 한사람은 나무에 목을 매고 - 나무에 매달려 죽는 것으로 죽음 안에서 하나를 이루었다면, 유다를 진정한 순교자로 추앙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하지만 이러한 가상 역시 막연한 추리에 불과하다.
이 책안에서 서술자의 역할을 맡고 있는 교회법 박사 에레토 P는 예부성성의 전권대리인으로써 유다의 시복재판에 관한 예심재판의 문서를 추려서 발췌록을 만드는 공식적 임무를 부여 받았다.
그 역시 유다를 옹호란 B의 청원문과 이에 반박하는 M의 문서 그리고 대주교의 재판문을 읽기 전까지는 유다의 배신행위를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꼼꼼히 짜여진 문헌과 설명을 보며 그는 유다의 행위가 곧 순교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유다를 순교자로 추대하려 했던 베르톨트 B는 존경받던 목자에서 ‘평화를 깨뜨리는 유다’로 낙인 찍혔으며, 나중에는 공공연하게 테러의 위협마저 감소해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베르톨트 B는 마지막 희망으로 P에게 모든 자료와 권한을 위임을 하고 몇 달 후 생을 마감한다.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다른 길을 가야했으나 죽음 안에서 일치를 이룬 두 사람. 한 사람은 영원한 카인의 후에로 또 한사람은 영원한 안식자로 남아 역사의 평가를 달리하고 있다.
에레토 P는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입에 ‘시카리’ -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반달 모양의 단검을 가지고 다니며 로마에 협력하던 인물들을 암살하던 민족주의 계열의 테러리스트 -로 회자되는 가리옷 유다의 배신에 대해 다른 각도의 해석을 덧붙인다.
바로 ‘유다의 희생물로써의 예수’와 ‘예수의 희생물로써의 유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획 아래 공동 희생물로써의 유다와 예수’가 그것이다.
첫 번째 와 두 번째 해석은 각각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이용했다는 억측이 난무한다.
민중혁명을 이끌기 위해 예수를 이용했다는 유다의 입장과 절대 악으로 부여된 유다의 임무를 예수가 이용했다는 두 가지 해석은 많은 억측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문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둘은 선과 악으로 나뉘어 서로의 역할에 충실했으며 게쎄마니의 키스를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계획을 이루었다는 세 번째 해석이다.
이 부분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논란의 대상이며 그러기에 재판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끝나지 않은 것이 있다.
‘재판 기록은 공개되어 있습니다.’로 끝마치는 이 작품은 비장의 카드를 하나 숨기고 있다.
그 비밀은 푸는 열쇠는 책의 앞부분에 소개된 ‘이단 종파인 카인종파가 성서로 사용했다는 유다의 복음서를 찾을 수 없었다 ’라는 문장과 ‘발터 옌츠’라는 이름에 있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숨겨진 카드를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묘미이며 ‘공개된 재판 기록’을 읽고 유다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것 역시 독자에게 맡겨진 또 하나의 과제이다.
카드의 뒷면이 정 궁금해서 못 견디는 분들을 위해 이 책은 친절하게도 ‘부록’이라는 장에 그 해답을 실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