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표를 곁에 두는 독서

"디오라마(diorama)"란 말이 있다. 국내에선 주로 밀리터리 플라모델을 취미로 하는 이들에게 익숙한 용어인데, 본래 디오라마란 근대 귀족들이 테이블 위에 미니어처 모델을 배치하여 과거의 역사적인 전투 장면 등을 재현해 즐기는 취미를 의미했다. 등신대 인형을 이용해 과거의 풍물 등을 보여주는 박물관이나 과학관 같은 전시 공간의 장치들도 디오라마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군인들을 주요 등장 인물로 하는 영화에서 과거의 전략, 전술을 논하는 장면에 등장하곤 한다. 예를 들어 조만간 개봉될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 기병들은 어떻게 대군인 페르시아 경보병과 궁수대를 무찌르고 승리할 수 있었는가를 연구하기 위해 실제 전장이 되었던 당시의 지형대로 바탕을 만들고, 그 위에 마케도니아 중장갑 보병과 기병대, 페르시아 병사들의 진형을 꾸며서 관찰해본다는 점에선 요사이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펼쳐지는 워게임과 비슷하다.

지금 내 책상 위엔 세 권의 연표 책, "곁에 두는 세계사(석필)",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세계사(일빛)", "한국사연표(동방미디어)"가 있다. 늘 곁에 두고 다른 책을 읽을 때마다 틈틈이 꺼내서 연대를 대조해보거나 그 무렵 다른 문화권에선, 혹은 다른 분야에선 어떤 일들이 있었나를 함께 살피며 읽는다.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도전, 골든벨"이란 프로그램이 있는데, 어제 나온 문제 중 하나는 동서양의 여러 위인들 가운데 주로 활동했던 시기가 가장 늦는 인물이 누구인가를 묻는 문제가 있었다. 이런 문제가 나오는 까닭은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그저 인물의 활동연대를 아는 것이지만, 중요한 본질은 동서양을 교차하는 시기별 사건들을 함께 이해하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구려 유민 출신의 고선지 장군은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의 장군이 되어 토번(티벳)과 사라센 제국과의 연합을 저지하는 정벌에 나선다. 1차 정벌(당의 입장에선 정벌이고, 티벳 입장에선 침공인)엔 성공했지만 지나치게 가혹한 전후 처리로 반발을 불러 일으키고, 다시 정벌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탈라스 전투에서 대패하였고, 곧 죽임을 당하고 만다. 탈라스 전투에서 패해 사라센 제국으로 끌려간 당나라 군대의 포로들에 의해 제지기술이 사라센에 알려지게 되고, 이것이 다시 유럽으로 퍼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비록 대단히 느린 속도로 전개되긴 했으나 소위 신대륙(아메리카) 일부를 제외하고  당시 세계도 서로간의 문명 교류를 지속해 왔다. 학교 교육 과정에서 연표란 재미있어 마땅할 역사 교육을 단순 암기 과목으로 전락시키는 지탄의 대상이다. 하지만 AD 751년을 기점으로 해서 유럽에 제지 기술이 전파되기까지의 과정들, 고구려의 멸망과 고선지, 티벳, 사라센 제국, 제지술 등등 그것을 역사로 보든, 지식으로 보든  폭넓은 안목을 길러내기 위한 독서에서 연표가 빠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태정태세문단세"하는 식으로 왕조의 순서를 외우는 방식 말고 정말 전체적인 식견을 넓힐 수 있는 연표 공부가 필요한데, 이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종종 서구 선진국 학생들이 이라크는 어디에 있는지, 대한민국은 어디에 있는지 세계전도를 놓고 찾지 못하는 광경을 보면서 그네들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네들의 교과서를 보면 그게 과연 교육만의 문제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우리와 그들의 가장 큰 차이는 그들은 특별히 이라크가 어디에 있는지 알든 모르든 살아가는데 별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삶의 조건 속에 있는 반면, 예를 들어 미국 미네소타의 한적한 시골 구석에 살고 있는 한 어린이는 평생동안 미네소타 주경계지를 벗어나지 않고 살아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인 반면,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난 한 아이는 살아있는 동안 한 번도 미국에 가 볼 일은 없지만 미국의 오대호 연안 공업지대와 워싱턴 D.C와 뉴욕 선물 거래 시장의 동향에 민감해 하지 않고선 살아가기 어려울 수 있다는 말이다.

음, 뭐 이런 말을 하고 싶어서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니고, 나는 좀더 양질의 독서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구비 서적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1. 국어사전, 2.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3. 세계사 연표, 4. 지도책이다. 일단 이런류의 책들이 완비된 서재를 갖고 있다면? 하는 소망을 품어 본다. 물론 내가 다니는 회사엔 이런 것들이 완비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백과 사전 한 질을 집에 두고 싶다는 내 욕심엔 변함이 없다. 세계사 연표의 경우엔 "석필"에서 나온 "곁에 두는 세계사"가 비교적 괜찮다. 다만 한 가지 늘 아쉬운 점은 '아틀라스(atlas)'판 지도책에 연표가 곁들여진 책이 국내에도 있었으면 하는데 그런 류의 책은 여간해서 구하기도 어렵고, 설령 구했다고 하더라도 주로 외국책이라 외국어를 못하는 이들에겐 무용지물에 가깝다는 거다.

만약 나에게 그럴만한 재산이 있다면... 평생을 바쳐서라도... "내셔널 지오그라픽"에서 가끔 부록으로 끼워주는 그런 지도, 손으로 정성스럽게 그린 일러스트와 지도를 곁들인 연표로 구성된 세계사 책을 시리즈로 만들어 보고 싶다. 어찌보면 산업 기밀이랄까,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이야기를 겁없이 누출시키는 건, 이런 아이디어가 있다고 하더라도 국내에선 이런 엄청난 출판기획 시리즈에 감히 도전장을 낼만한 자본도, 기획력도, 그렇게 손으로 일일이 그려서 보여줄만한 식견과 표현력을 지닌 일러스트 작가(지도는 더더군다나 어렵다)들을 발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앞서 말한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을 기술한 세계사 연표와 지도책이라고 해보자. 우선 알렉산더 대왕의 출발지라 할 수 있는 마케도니아의 자연과 문화, 유적을 소개하는 지도와 일러스트로 그린 마케도니아의 여러 풍물들을 보여주고, 거기에 알렉산더 대왕의 어린 시절 무렵의 연표를 삽입한다. 다음 장엔 그가 떠나는 원정 길의 도시들, 페르시아와 기타 지역의 모습들을, 전쟁 삽화와 군진 배치, 무기와 전술에 대한 캡션, 부대 이동 경로 등의 도판과 도해를 삽입하고, 이후 건설되는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들과 도시들, 제국의 붕괴 이후 각 왕국들의 모습, 특징 등을 함께 보여준다. 이후 부록이나 기타 다른 경로로 현재의 도시들과 지명을 이와 비교해주는 것도 재미있을 거다.

그렇게 되면 머리속으로 펼쳐지는 디오라마를 가질 수 있게 되고, 다른 사건들과 비교해가며 입체적인 그림들을 만들어갈 수 있는 독서가 된다. 아쉽지만 현재로선 이런 그림들을 나홀로 머리속에 만들어두는 것으로 족해야 한다. 이런 책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공부할 수 있다면 어린이들의 세계 인식도 달라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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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12-27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은 반칙이 너무 많아요. 리뷰도 아니면서 제 보관함을 또 살찌우면 어쩌라구요!!!

바람구두 2004-12-27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석필 것이 아직 나온다면 그 책을 구입하심이...

속닥님! 뭐 추천 두 번 누르기가 가능하다면 저야 좋지요. 흐흐. 화장실 가서 그냥 나오지만 않으신다면야...

조선인 2004-12-27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석필 거로 마이리스트에 추가해놨습니다. 이건 또 언제 사서 언제 읽나 ㅠ.ㅠ

바람구두 2004-12-27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런 책은 사서 한 번에 주욱 읽는 책이 아니라... 늘 곁에 두고 참고할 때 보는 책이라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