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출신으로 르뽀작가 생활을 거쳐 소설가가 되는 방식은 우리 국내의 현실에서는 거의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르뽀는 저급한 글쓰기로 폄하되기 일쑤이고, 실제로 그간 르뽀 분야를 살펴보면 과거의 암울한 역사의 이면을 흥미 위주로 따라가는 글들이 꽤 많았다. 그런 것들을 부추긴 것은 우리나라의 소위 잘 나가는 중앙지들이 달달이 발간하는 시사교양지들 덕이다. 정확한 표기로는 르포르타주(reportage)인 이런 양식은 우리 말로 번역하자면 보고문학 내지는 기록문학 정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르뽀 문학의 대표적인 저작들은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10일",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 아그네스 스메들리의 "위대한 길:한알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다" 와 같이 기자 출신의 작가들에 의한 것, 조지 오웰이나 잭 런던 같이 작가 출신의, 혹은 작가쪽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할 이들의 작품들이 있다. 르뽀 문학은 다큐멘터리 문학이라고 해야 할 기록문학에 속하면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이는 픽션을 어느정도까지 허용할 수 있는가 하는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으나 픽션과 사실의 경계가 명확한 것이 아니므로 큰 차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소위 "잡문"이란 표현이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시인은 시 이외의 모든 글을 잡문으로 치부하고, 소설가는 소설 이외의 글들을 잡문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또 학자들은 각주가 달리는 논문 이외의 글을 또한 잡문으로 취급한다. 이때 잡문이란 배제와 하대의 의미를 담는다. 즉, 스스로를 시인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자신이 쓰는 시 이외 일체의 산문들, 예를 들어 에세이, 기행문, 리뷰 따위 등을 본업에서 어긋난 것으로 평가절하하고, 소설가들, 학자들 역시 그렇다. 얼핏 보면 겸손한 것으로 보이나 그렇다고 이들이 다른 글들을 쓰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다른 글을 쓰는 이유는 그저 돈벌이 수단이나 청탁이 들어왔으니 쓴다는 식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과연 그런 자세와 폄하는 정당한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소위, 문학업에 종사하는 글쟁이들의 이런 잔챙이 같은 생각이나 학자입네 하고, 상상력이 결여된 글쓰기에 치중하는 이들의 치기에 애꿎은 독자들만 손해를 보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우리 문학의 서구이식론이나 단절론이니 이런 이야기들은 논외로 하고, 서구의 문학사에서 우리가 오늘날 흔히 시라고 이야기하는 서정시, 소설에 대한 경험은 근대의 것들이다. 서구문학사를 보자면 오랫동안 운문으로 쓰여진 비극과 서사시가 문학의 상위장르로 평가받아 왔고, 우리가 소위 서정시라고 평가하는 현대의 짤막한 형태의 시는 낭만주의 시대의 일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딧세이"는 소설이 아니라 서사시이다. 내가 훌륭한 시인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시만 잘 쓰는 시인이 아니라 산문에 있어서도 역시 탁월해야 한다는 것을 삼은 것 역시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김기림이나 김수영의 사례만 보더라도 훌륭한 시인은 또한 훌륭한 문장가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요근래 발표되는 소설들을 살피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문학이 상상력과 현실의 긴장에 의해 발생한다고 했을 때, 지금의 소설 문학은 현실에 압도당하고 있으며, 현실의 발빠른 행보를 작가들은 가을 추수가 끝난 들판을 어슬렁거리듯 이삭줍기에 나서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글쟁이는 칼잡이이다. 언제라도 날카롭게 날을 세워두지 않는다면 시대와 현실에 의해 도태당하고 말 것이다. 뛰어난 칼잡이가 칼을 탓하지 않는 것처럼, 뛰어난 글쟁이는 글의 장르를 구분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칼을 휘두를 뿐이다. 결국 글이란 장르를 불문하고 그 문장이 성취한 결과물에 의해 평가받는 것이지, 소속 장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잡문이라 우습게 여기지 마시라. 그것이 상상력에 더 많은 것을 의존해야 하는 것이든, 현실에 보다 밀착해야 하는 것이든 글의 장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품질이 더 중요하다. 낙서 같은 글을 써놓고는 '이건 잡문이니까'라며 자위하는 글쟁이는 자격없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