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항 축구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즐겨보는 스포츠 경기가 야구이다. 본래 좋아했던 팀은 청룡(LG 트윈스의 전신)이었고, 고향을 지역연고로 하자면 트윈스, 베어즈, 히어로즈 중에서 골라야겠지만 인천으로 온 뒤(96년)부터는 줄곧 인천 연고 팀을 응원해왔다. 그러고보니 어느덧 10년 이상되었다. 인천에서 월급 받는 사람이자 인천에서 문화운동하는 사람으로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나는 속속들이 인천 사람이 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 물론 그 인천 사람의 실체에 대한 나의 생각은 지역주의나 연고주의와는 무관한 것이긴 하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이 사람의 머리에서 가슴까지라고 하던가. 내 생각과 달리 '현대 유니콘즈' 시절에 인천 연고 팀에 대해서 나는 속속들이 좋아한 것 같지는 않다. 개인적으로 팀 컬러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결국 인천을 떠났다. 내가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으로도 SK 와이번스를 좋아하게 된 것은 조범현(현 KIA 감독) 시절부터였다. 그래서 조범현 감독이 떠나고 김성근 감독이 영입될 때(2007)는 거기에 반대하기도 했다. 제자 조범현이 일군 것을 스승이 빼앗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다(사실 그것이 프로의 세계이긴 하다).

조범현 감독이 떠나고 나서 한동안 SK 와이번스 경기를 별로 열심히 보지도 않았고, 응원에도 조금 마음이 식었더랬다. 그러나 올해 나는 SK 와이번스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김성근 감독이 맡은 이후 2007년과 2008년 인천 야구는 2년 연속 페넌트레이스 1위를 질주했고, 한국시리즈마저 2년 연속 제패하는 대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어쩐지 SK야구가 나와는 잘 맞지 않는단 생각을 했다. SK 선수 중에 아는 선수가 박경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올해는 시즌 초중반부터 주전 선수들의 부상으로 인해 중심 축이 빠져버린 상태였다. 시즌 초반엔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SK가 중반 이후부터는 포스트 시즌 진출 여부마저 불투명한 상황에서 SK는 놀라운 저력을 보여 주었다. 시즌 막판 19연승이란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질주를 거듭한 끝에 정규 시즌을 2위로 마무리 짓는 대단한 저력을 보여주었다.(1986년 삼성의 국내 최다 연승 신기록<16연승>을 넘어섰고 일본프로야구 연승기록<18연승>도 깼다.)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SK야구에 감동한 것은...

결국 정규 시즌 우승은 못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숙적 두산'(두산 베어스도 좋아하지만 이상하게 항상 두산의 라이벌 관계에 있는 팀들을 더 좋아하게 된다)과 맞붙은 포스트시즌에서 먼저 2연패하고 만다. 아마 두산으로서는 코리안시리즈든, 플레이오프든 절대로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팀이 SK가 아닐까 싶다. 본래 두산의 팀 컬러는 끈끈한 야구다. 질 때 지더라도 절대로 쉽게 지지 않는 팀이며 경기 막판까지 절대로 경기를 포기하지 않아서 언제나 역전할 수 있는 팀 컬러를 지녔다.

그런 두산을 상대로 지난 2007년 코리안시리즈에서 SK는 먼저 2패를 당했다. 그러나 뒤이어 4연승을 했다. 그리고 지난 2008년 플레이오프에서 두산은 지난 해의 설욕을 하는 듯 했다. 또다시 2연승을 한 것이다. 그러나 2008년에도 SK는 다시 3연승을 거두고 코리안시리즈에 진출권을 따낸 뒤 연거푸 코리안시리즈 2연패를 달성했다.

올해 다시 SK와 만난 두산으로서는 그야말로 악몽 같은 상대가 SK였던 셈이다. SK의 저력은 올해 역시 다르지 않았다. 다만 지난 시리즈들과 달리 올해 SK는 결코 좋지 않은 조건이었다. 올해 SK는 사실상 한 번도 베스트선수들로 경기를 치루지 못했다. 한 마디로 차포 다 떼어주고 치른 정규시즌이었고, 19연승 이후의 피로감도 대단했을 것이다. 두산은 이번에야말로 지난 한을 풀고, 더이상 징크스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두산이 또다시 2연승을 거두었다. 그것도 SK의 홈인 인천 문학구장에서 말이다. 그러나 SK의 승부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3년 연속 두산의 무릎을 꿇린 것이다. 보는 내내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시작된 코리안시리즈에서 SK는 정규시즌 1위를 차지한 KIA 타이거즈와의 승부에서 또다시 1,2차전을 내주었다. 아쉽지만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올해 SK의 전력으로 우승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온 것만도 잘했다고 격려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SK는 인천에서 열린 3,4차전을 모조리 잡아냈다. 사람들은 쉽게 '역전'을 말한다. 그러나 지고 있는 경기를 뒤집고, 불리한 상황에 몰린 팀이 다시 일어난다는 것은 보통의 의지만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SK는 해냈다.

이후 열린 잠실 5차전에서 타이거즈에게 다시 패배했다. SK를 보면 전형적인 인파이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얻어터지고, 다운을 당해도 다시 일어난다. 사실 이때 이미 SK의 전력은 완전히 바닥난 상태였다. 야구를 투수 놀음이라고 하는데, 그만큼 야구에서 투수는 가장 중요한 전력이다. 그런데 SK는 이번 포스트 시즌을 앞두고 에이스 김광현과 12승 투수 송은범, 불펜의 핵인 전병두, 주전 포수 박경완이 빠졌다. 만약 KIA의 에이스 로페즈가 그랬던 것처럼 SK의 에이스 김광현이 채병용과 함께 각각 두 경기 혹은 그 이상을 책임질 수 있었더라면 코리안시리즈 우승컵의 향배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끔 SK의 김성근 감독이 지나치게 잦은 투수 교체를 한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지저분한 야구를 한다는 것인데, 그건 아마도 한국의 야구팬들이 선호하는 야구가 미국식 야구, 거함거포주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은 물론, 한국 야구의 기초체력은 일본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하다. 우리가 월드베이스볼클래식, 아시안게임, 올림픽에 나가 선전할 수 있었던 까닭은 우리가 미국식 야구나 일본식 야구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식 야구를 했기 때문이다. 한국식 야구엔 일본엔 없는 거포주의가 있고, 미국식 야구엔 없는 관리 야구가 있다. 다시말해 한국 야구는 미국과 일본 야구에게 배웠지만 한국 특유의 야구란 것이다.

나는 그런 한국식 야구를 가장 잘 보여주는 팀이 SK라고 생각한다. 부족한 야구자원(인력)을 가지고 매 시즌 온갖 전략과 분석을 총동원해 자신들보다 우월한 전력을 갖춘 팀과 혼신을 다해 맞붙는 것, 그것이 한국식 야구이고, SK야구가 아닐까.  

KIA 타이거즈가 12년만에 코리안시리즈에서 우승했다. 정권을 빼앗아간 사람들은 그 십여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는데, 광주 사람들은 타이거즈의 코리안시리즈 제패를 되찾은 10년이라며 기뻐한다. 깨끗하고 멋진 승부를 보여준 KIA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KIA 타이거즈의 멋진 우승에 밑그림이 되어준 SK 와이번스 선수들에게도 아쉽지만 내년을 함께 기약해보자고 말하고 싶다.

비록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SK야구는 인천 시민들과 와이번스의 팬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안겨주었다. 김성근 감독의 인터뷰대로 "2007년 우승해서 그 때는 이기는 팀을 만들자고 했는데, 작년부터는 지지 않는 팀이 목표였다. 선수들한테 누누이 말하면서 우리는 야구를 했다. 그렇게 해서 밖에서는 야구가 지저분하다는 등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많지만 인간으로서, 선수로서, 최고를 목표로 야구해왔다. 그렇게 살아왔고.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치밀하게, 상대가 우리만 보면 싫어할 정도로 그런 팀"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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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9-10-26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치밀하게, 상대가 우리만 보면 싫어할 정도로 그런 팀이 되겠다던 김성근감독의 인터뷰 내용이 저도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전 두산팬인데 내년에 더 좋은 승부들이 펼쳐지길 바랄 뿐이죠..

바람구두 2009-10-26 15:21   좋아요 0 | URL
와이번스 홈페이지에서 읽은 어느 분의 사연이 재미있더군요.
그 분의 친구가 와이번스를 너무너무 싫어하는데, 그 이유가
"와이번스는 질 게 뻔한 경기도 마지막까지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는 게 싫다"고 하더라네요.
아마 김성근 감독이 말한 "상대가 우리만 보면 싫어할 정도로 그런 팀이 되겠다"는 말의 속내도 저런 것이 아닌가 싶어요. 승부에 대한 집착이 공정한 게임의 룰 속에서 이루어지고, 누구나 승복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언제라도 박수를 보낼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죠. 하지만 승부에만 집착한 나머지 스포츠 정신의 본질을 잊을 때는 저도 질책을 보내려고 합니다. ^^
SK와 KIA의 경기 때 2루로 질주하다가 서로 수비방해성 주루플레이가 나왔을 때 서로의 등을 쳐주고 격려해주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그 전에 있었던 김성근 감독의 퇴장 해프닝은 본인 자신이 바뀐 룰을 잠시 깜박했었다고 하더군요.

paviana 2009-10-26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해태(!) 타이거즈 팬이에요.
할말도 하고싶은 말도 너무 많아서 쓸수가 없어요.
이종범 선수가 우는 걸 본 순간 혼자 테레비젼앞에서 펑펑 울었답니다.

바람구두 2009-10-26 15:31   좋아요 0 | URL
ㅋㅋ
그걸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어요. 저도 경기 끝나고 광주 사는 녀석에게 문자 찍어 보냈답니다. 축하한다고요. ^^ 참 멋진 선수죠. 이종범! 저도 가슴이 뭉클했어요. 12년만의 우승!!!

이상하게 코리안시리즈 우승은 정권과는 반대로 가는 법인가 봅니다. 해태 타이거즈의 전성기는 전두환, 노태우 집권기와 공교롭게 겹치죠. ^^

또 제 마음을 뭉클하게 만든 건, 무너진 SK선발진의 에이스로 팔꿈치 부상과 체력까지 바닥난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다가 결국 무너진 채병용 선수의 모습이었어요. 저는 이종범의 눈물 못지않게 가슴 뭉클했어요. '남자가 아름다울 때'는 저런 순간이구나 싶더군요. 힘들어도, 결과가 뻔히 보여도 짊어질 수밖에 없는 무게 같은 것...

Kir 2009-10-27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야구를 많이 좋아하진 않아서 어느어느 팀의 팬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두산이랑 한화에 마음이 가요. 그래서 이번 시즌은 정말, 눈물 쏙 빠지게 속상했습니다^^; 특히, 두산은 시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속상하게 만들더군요; (날씨까지 재를 뿌리질 않나ㅠㅠ)
두산이 3년 연속 호되게 당해서 차마 SK를 응원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두산 잡고 올라갔으니 더 잘해서 3연패 하라는 마음도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코시는 어떤 팀이든 더 잘하는 팀 이겨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7차전에서 채병용 선수가 무너진 모습을 보니까 저절로 눈물이 나왔어요. 기아 선수들의 감동의 눈물도 뭉클했지만, 채병용 선수의 눈물은 마음을 후벼파더라구요... (작년에 통곡하던 김현수 선수 모습도 생각나고ㅠㅠ)

바람구두 2009-10-27 19:17   좋아요 0 | URL
만약 이번 시즌부터 바뀐 룰이 적용되지 않았다면...
'무승부'를 '패'로 간주하는 KBO의 새로운 룰이 적용되지 않았다면
SK가 승률 1위로 코리안시리즈에 직행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상황은 또 달랐겠지요.
하지만 한 편으론 그런 생각을 하곤 해요.
스포츠가 즐거운 건, 승자도 패자도 아름다울 수 있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거의 항상 아름답더라는 것이죠.
가슴 뭉클해 하는 kircheis님도 예쁘고요,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