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삼아 산행을 시작한지 두 달쯤 되어간다. 몸매관리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허벅지와 장딴지에 근육이 붙는 재미가 느껴져 일주일에 4~5일은 거르지 않고 다닌다. 어제는 비가 와서 산에 오르지 말까 하다가 주말 이틀 정도 동네 뒷산 오르는 일을 하지 않아서 게다가 비도 오고 하니 그 나름 운치있게 싶어 그냥 갔다. 때마침 들고다니던 등산용 스틱이 고장나서 AS맡기고 비브람창이 다소 미끄러운 편이긴 했지만 마침 비도 잠잠해지고 해서 그냥 가볍게 산에 올랐다.
자연이란 참으로 신비해서 바로 며칠전만 해도 아직 피어나지 않았던 잎사귀들이 활짝 피어올라 눈 앞을 가리고 있었다. 비온 밤 숲속이란 운치있게 여기면 형광빛으로 선명하게 빛나는 싱그러운 잎사귀들, 촉촉하게 젖은 흙길, 밤사이 나무들이 뿜어내는 피톤치드 향이 산에 들어서길 잘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비온 밤 숲속 길은 한 번 으스스하게 여기면 끝도 없이 으스스한 곳이기도 하다.
비록 해발고도 200m 남짓 사람 사는 마을들로 둘러싸인 야트막한 언덕이라고 우습게 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다녀본 결과에 따르면 산은 다 산이고 어느 산이든 사점(dead point)을 넘어서기 전엔 누구나 숨을 헐떡이게 되어 있다. 하여간 비도 오고 해서 산속엔 안개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비온 뒤라 가뜩이나 인적 끊긴 산속엔 가끔씩 목줄기로 떨어지는 물방울과 가끔 내 발에 밟혀 부러지는 나무가지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정상에 오르니 바람이 거세게 불어 안개가 걷히며 주변 풍경이 한 눈에 드러났지만 바람 불어오는 쪽을 보니 구름이 낮게 드리워진 것이 조금 있으면 금방 산으로 몰려와 다시 안개속을 만들어놓을 것 같았다. 잠시 숨을 돌린 뒤 다시 산 아래로 향하는데 맞은 편에서 누군가 갑자기 "억"하고 아이들이 몰래 숨어 있다가 사람 놀래키는 소리를 냈다.
속으론 깜짝 놀랐지만, 마음속으론 항상 나름의 자신감이 있는 터라 (누구든 이 밤중 산길에서 날 만나면 모르면 몰라도 그 사람이 더 무서울 거란 걸 나는 안다) 짐짓 태연하게 아무 반응도 없이 산길을 내려갔다. 잠시 후 아래로부터 내 나이 또래 되어 보이는 사내가 올라온다. 성질 같아선 밤중에 산길에서 그런 장난 치는 거 예의가 아니라고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꾹 참고 인사를 건넸다.
서로 스치고 지나가는데 갑자기 이놈의 등산화가 쭈욱 하고 미끄러지고 말았다. 비브람창 자체가 접지력이 다소 떨어지는 데다 내 등산화 밑창이 유난히 밋밋했는데 하필이면 그 시점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바지에 진흙이 쭈욱하고 묻어나고 말았다. '에휴, 쪽 팔려!' 의연한 척 했는데 속으론 무서웠던 걸까? 하여간 산에선 잠시라도 방심하면 안 된다. 산에서 귀신 만나는 것보다 비오는 데 산에 갔다고 잔소리 듣는 게 좀 더 무섭긴 하지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