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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언 매큐언이 신작을 냈다. 그의 작품 『속죄』, 『넛셸』, 『체실 비치에서』등 몇 가지 작품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의 몇몇 소설은 영화화되기도 하였는데, 『속죄』는 키아라 나이틀리 주연의「어톤먼트」로, 2019년에는 『칠드런 액트』가 동명의 영화로 개봉되었다. 그만큼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있고 흡입력 있는 소설로 즐거운 독서경험을 주었기에 신작이 나왔다는 홍보글을 보았을 때 관심이 갔다.
이 책의 띠지에는 '바퀴벌레들이 영국 의회를 장악했다?! 카프카의 변신 모티프로 그린 이언 매큐언의 신랄한 풍자극'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카프카 작가를 좋아해서 체코로 여행 갔을 때 카프카 관련 장소를 일부러 찾아 방문했던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조합이었다.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서평단을 신청하여 읽게 되었다. 다 읽고 났을 때는 카프카의 느낌이 전혀 없다는 깨달음과 정작 내용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가 가지 않아 연거푸 세 번을 다시 더 읽어야 했다. 군데군데 밑줄을 긋고 나서야 중심 사건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불쌍한 그레고리 잠자는 눈을 떴을 때 자신이 벌레라는 참혹한 깨달음을 얻고 나서도 가족과 일을 걱정하며 적응하기 위해 애를 쓰지만, 이 책의 짐 샘스는 초반에 인간 육체가 낯설게 느껴졌을 뿐 금세 적응하고 본연의 임무를 떠올려낸다. 짐 샘스 몸 안에 있는 것은 사명을 띤 바퀴벌레로, 의원들이 회의하는 것을 몇 번 들으면서 인간 사회를 간파해내 어려움 없이 인간인 척 위장에 성공한다. 그는 '역방향주의'라는, 인간 사회를 무한 생산과 소비를 가속화시킬 이상한 개념을 영국의 법안으로 통과시킨다.
'역방향주의'는 소비와 생산을 뒤바꾼 혼종으로 물건을 구매하는 사람은 상점으로부터 물건에 해당하는 돈을 받는다. 즉, 쇼핑으로 돈을 번다. 그러나 돈이 쌓이는 것은 전혀 이로운 일이 아닌데 돈을 쌓아둘 경우 마이너스 이자를 내야하며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다. 또한 고용된 사람의 경우 본인의 월급에 해당하는 돈을 직장에 내야만 한다. 완전 쇼핑이 완전 고용으로 이어진다는 이 요상한 발상은 의원들의 몸을 차지한 바퀴벌레들에 의해 밀어붙여진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와의 사건을 이슈화시켜 외교적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정치적 경쟁자는 거짓 미투로 사회적 활동을 하지 못하게 만들거나 SNS를 활용한 단발적이고 우악스러운 여론 형성이 이어진다. 실제 영국에서 일어났던 사건과 얼추 비슷한 사건들이 있어 허구적인 소설 속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현실 비판적 어조를 읽어낼 수 있었다.
공감되는 상황이 없진 않았으나 영국의 정치적 상황을 주로 다루기 때문에 감정 이입이 되지 않아 흡입력 있게 넘어가진 않았다. 이 주제는 차라리 작가의 에세이로 작성되거나 작가가 비판하고 싶은 부분에 대해 사실적으로 진술하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의회를 점령한 바퀴벌레라는 설정은 개연성이 있지도, 바퀴벌레의 주장에 동조하기도 어렵다.
만약 내가 이 책의 띠지를 만든다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카프카를 전면에 내세우기 보다 이 책에서 비판하고 있는 야만적인 부분에 대한 은유를 넣거나 책 속의 구절-p.57 '최고위층의 성명이 필요합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야기된 흥분을 가라앉혀야 합니다.'-을 인용하여 감정적으로 부추기는 정치인들의 음흉한 행보를 비판하는 암시를 넣었을 것이다. 그 편이 이 책을 읽는 독자의 기대를 꺾지 않는 방법일 테니까.
비록 내 기대는 충족되지 않았지만 그랬다고 해서 이 소설이 꼭 나쁘게 읽힌 것만은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대선을 둘러싼 정치적 긴장과 정치인의 행동들이 작가가 비판하는 부분들과 유사한 부분이 있어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어떤 사건에 대해 사람들이 동물처럼 반응하도록 유도하는 사회 보다 한 발짝 물러나서 찬찬히 검토해볼 수 있는 여유를 주는 사회에 소속되고 싶다. 요즈음은 잔뜩 곤두선 사람들의 질타와 비난이 피로감과 환멸을 불러일으켜 많은 사람들이 냉소적으로 반응하게 만드므로. 사실 이 모든 것은 어둠 속에서 이를 갈고 있는 바퀴벌레의 음모일 수도 있으니 평화롭게 삽시다, 모두.
최고위층의 성명이 필요합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야기된 흥분을 가라앉혀야 합니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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