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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북촌에서 - 골목길에서 만난 삶, 사람
김유경 지음, 하지권 사진 / 민음인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요즘 회사에서 종종 졸릴 때 하는 일이 직거래로 방구하는 인터넷 카페에서 안국동, 가회동, 계동, 북촌, 사직동, 삼청동, 사간동...으로 검색해서 전세집을 찾는 것이다. 거리상으로도 회사와 가깝고 워낙 그 동네 분위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곳의 주민이 되는 일이란 그저 간절한 "로망"이랄까. 문제는 그 동네에서 사람이 혼자 살만한 집 자체가 거의 없는 데다 어쩌다 나오는 매물들의 가격은 입이 떡 벌어지는 정도니, 모니터 앞에서 봄날의 짜르마냥 잠이 쏟아질 때면 아, 더 열심히 일해서 조낸 돈 많이 벌어야겠다! 라고 불끈 주먹을 쥐게 된다.
5년 전 처음 삼청동 길을 걷게 되었을 때, 서울 시내에 이런 동네가 있다는 데에 너무 놀라서 입을 아- 아- 벌리고 두리번거리곤 했다. 프리랜서를 가장한 백수였던 나는 정독도서관에서 종종 책을 읽었고, 구석에 숨어 있는 맛집을 찾아다니기도 했고, 작은 1층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주택가를 걸었다. 누가 이런 곳에 올까 싶은 곳의 작은 장신구 가게 앞에 서서 통유리에 얼굴을 갖다대고 코를 벌름거리며 진열대를 구경하기도 했다. 나중에 꼭 이 동네에 집을 얻어 살아야지, 다짐하면서.
이런 경험을 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급속도로 변해가는 삼청동과 그 인근 주변에 상실감을 느껴봤을 것이다. 어느 순간 그곳은 의류 쇼핑몰 상품 촬영 셋트가 되었고, 카메라 동호회의 출사 장소가 되었고, 강북에서 가장 "핫한 플레이스"가 되었고, 낡은 척 하는 팬시한 카페들이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카페의 길"이 되었고, 퓨전이네 뭐네 하며 온갖 정체를 알 수 없는 와인바들이 들어섰다. 그곳에 오래 터를 잡고 살던 "생활인"들은 주목받는 상업지대로 거듭난 곳에서 당연하게도 내쫒겼고, 낡은 한옥은 말도 안되는 구조의 기형적인 "신식 한옥"으로 개조됐다.
이제 더이상 삼청동을 일부러 찾진 않는다. 그나마 그 인근의 주민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청와대로 향하는 돌담길과 정독도서관의 유혹이 조금은 강렬하기 때문일 뿐. <서울, 북촌에서>를 읽으며 그나마 사람 사는 곳의 흔적과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을 누군가는 지속적으로 해왔다는 데에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도, 아직은 누군가 숨소리를 내며 살고 있고, 어디선가 백구가 짖는 소리도 들릴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전체적으로 책이 세련된 편은 아니다. 북촌 풍경의 그것처럼 조금은 투박하고 거칠고 날 것의 냄새가 나는데, 그것이 어쩌면 아늑하고 안정적이지만 보수적인 북촌 동네의 정취를 더 잘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서울, 북촌에서>는 겉모습은 '서울 여행기'의 옷을 입고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구술사'에 더 가깝다. 작가는 한 사람, 한 사람 공을 들여 이야기를 나누고, 그 풍경을 고스란히 담기 위해 이야기를 정제하지 않고 툭툭 털어놓는다. 그래서인지 문장 자체가 잘 읽히는 편은 아니다. 어떤 작가는 문장과 문장 사이를 접속사로 연결하는 것에 대해 거의 결벽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접속사가 있는 글은 좋은 글이 아니라는 것이다. 좋은 글을 판단하는 눈이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독자 입장에서 접속사가 없는 문장은 참으로 불친절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글을 쓰는 저자의 의식대로, 그 감정대로, 그 뉘앙스대로 독자도 똑같이 읽을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이 책은 사람들의 이야기인가 싶다가도, 역사와 정치사에 대한 정보가 꽉꽉 들어차 있어서 인문서인가 싶기도하다. 바로 그점이 이 책의 장점이자 아쉬운 부분이다. 단행본으로서 한 권의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호흡이 정말 중요하다. 이렇게 연재했던 연재물을 엮고 보완해서 만든 책의 맹점이 바로 그 호흡의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점인데, 이 책 역시 여성동아나 신동아류의 잡지 기사 한꼭지씩을 뚝 떼어 놓은 것 같은 어색함이 종종 느껴져서 약간 아쉽다.
그럼에도 이렇게 충실하게 한 장소의 풍경에서 이렇게나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낸 저자의 정성과 노고가 그려져 감히 쉽게 얘기하지는 못하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주민이 되고 싶다!"를 외쳤고, 이런 풍경들이 왜 더 오랫동안 유지되지 못하는지 분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왜 이렇게 보수적인 동네의 주민이 되고 싶어하는지 스스로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익명성으로 가득한 서울이 좋다고 외치면서도 나도 모르게 사람 냄새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 서울 사람들은 좋겠다,고 생각했다.
추억할 수 있는 고향의 어떤 풍경에 대해 누군가 열심히 기록하고 흔적을 찾아다니고 있다는 게.
그 풍경이 사라지지 않고 아직은 "보호"라는 이름 아래 조금은 남아 있다는 게.
추억할 수 있는 풍경이 아직은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게.
서울은 1년 365일 건물과 도로 공사로 어지러운 곳이지만, 정작 가장 빠르게 변해버린 곳은 내 고향이다.
서울 사람들은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