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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 정성일.정우열의 영화편애
정성일.정우열 지음 / 바다출판사 / 2010년 8월
평점 :
나는 정성일의 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는 것도, 영화에 대한 촉과 내공이 엄청나다는 것도 잘 알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의 글을 읽는 게 불편하고 거북하고 조금은 무섭기까지 하다. 지나치게 집요한 그의 쇼트 분석이 유기체로서의 영화를 능지처참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 평론을 참고서처럼 생각할 것'이라는 그의 지침(?)에 따른다면, 참고서는 참고할 부분만 참고하면 되니 참고서 콘텐츠는 최대한 방대하고 자세하고 분석적이고 세분화되어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영화에 대한 글을 읽는다면, 그것이 참고서가 아니라 수업 중에 메모해놓은 선생님의 농담같은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영화평론가도 영화과 전공 수업에 쓰일 교재를 집필하는 게 아니라면, 조금 더 친절하고 통찰력이 돋보이면서도 날카로운 관점을 공유해주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의 글을 읽는 것 자체가 두렵다고 느끼면서도 늘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언젠가 꺼내봐야지, 하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 정성일을 끊을 수 없는 이유였다. 당장 꺼내기엔 조금 두렵고 부담스럽지만,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그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마치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사모으던 <키노>를 이사갈 때마다 꾸역꾸역 안고 다니며 책장의 가장 첫머리를 가득 채우던 시절의, 언젠가는 "키노에게 물어보세요"를 실행하게 될 날을 기다리는 그 마음과 같았다. 그런 마음으로 정성일의 첫 번째 책을 샀다. (물론 올드독과 함께 했다는 것에 대한 기대가 49%이긴 했다.)
본격 평론 모음집인 <필사의 탐독>에 비해 비교적 말랑한 에세이 중심으로 엮인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는 각각의 원고에 대한 올드독의 통찰과 재치가 돋보이는 카툰이 함께 버무려져있다. 아, 어떤 평론가가 개 그림(!)을 그리는 만화가와 함께 자신의 첫 평론집을 엮을 생각을 했겠는가. 나는 정성일의 유연함에 감탄했다. 그리고 박찬욱과의 에피소드 같은 '인간에 대한 글'에서는 의외의 따사로움과 긍정력에 두 번 감탄했다. 고등학교 때 <키노>를 보고 감격(!)해서 "정성일을 만나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키노> 사무실까지 쳐들어가서 그와 몇 시간 동안 얘기를 나눴다던 동아리 선배의 후일담에서는 그저 시니컬하고 까칠하고 꼬장꼬장한 평론가의 모습을 보았는데(물론 그때의 대화는 상당히 유익한 것이었다고 했다) 그는 내가 생각하고 상상한 모습보다 훨씬 인간적인 아저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언젠가 당신이 잘될 것이라고 믿는다" 정도의 말은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와 같은 오글오글한 공지영 책 제목스럽지만 이것이 정성일의 글에서 발현됐다는 점에서 어딘가 뭉클한 감동 같은 게 느껴지는 것이다. 꼬장꼬장한 아저씨가 날카롭고 냉철한 분석을 거침없이 쏟아내다가 "괜찮아, 잘 될 거야" 라고 무심한 듯 내뱉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아무 근거도 없이, 응, 알아요, 하고 대꾸해주고 싶어진달까. 바로 그 미묘한 정서를 올드독은 다시 시니컬 멍멍이 특유의 유쾌한 통찰로 풀어내니, 나는 이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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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축하해요, 고진감래네"라고 말했더니 박찬욱은 취한 목소리로 "아뇨, 그런 말은 제작자한테 하시고요. 전요, 형이 제 영화를 칭찬해주셔서 너무 기뻤어요. 형이 제 영화 칭찬한 거 처음인 거 아세요?" 라고 대답했다. 그 표정을 보았을 때 고맙게도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래서 내친 김에 그냥 한마디 더 물어보았다. "만일 이번 영화도 잘 안 되었으면 어쩔 뻔했어?" 아무리 술김이었지만 그 말을 던져 놓고 나는 아차 싶었다. 그건 정말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물은 엎질러졌고, 그 물은 다시 담을 수 없었다. 그런데 박찬욱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럼 네 번째 영화를 다시 준비해야지요, 뭐. 세 번째 영화를 만들었으니까 다음 영화는 네 번째 영화잖아요. 기다리는 게 지겹긴 하지만 그래도 아마 또 기회가 오겠지요, 뭐."
나는 박찬욱의 그 낙천주의를 사랑한다. 그는 세상의 긍정적인 힘을 믿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래서 하여튼 잘될 것이라고 믿는다. 세상은 결국 대부분의 노력을 실패로 팽개친다. 그래서 사람들은 증오와 분노를 배운다. 혹은 포기를 희망보다 먼저 익힌다. 하지만 박찬욱은 그냥 세상을 낙관한다. 그리고 언젠가 잘될 것이라고 말한다. 당신도 언젠가는 잘될 것이다. 다만 지금 잘 안 될 뿐이다. 그러니 포기하면 안 된다. 나도 언젠가 당신이 잘될 것이라고 믿는다.
- 우리는 영화를 어떻게 방어하고 긍정할 것인가- 박찬욱이라는 필모그래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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