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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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므너므 덥하고(덥하고?!) 습하고 덥하고 습하고 덥하고 습합니다.

저의 여름은 언제나, 물 밖에서 숨을 쉬어도 물방울이 뽀골뽀골 올라올 것 같은 습기와 함께합니다. 윽윽. 전 사실 더운 것보다 습한 게 더 싫어요. 습하지만 않으면 더운 것도 참을만 한테 ㅠ_ㅠ 암튼 날씨가 이 모냥이라서인지, 기분이 꾸릭꾸릭해서인지 모르겠으나 하루가 참 길고 시간도 참 더디 갑니다. 

그렇다면! 이열치열이라 했던가! 최규석의 <100℃>를 읽쟈, 라고 생각;;;;

사실 전에도 만화 전두환을 읽다가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은 분노에 치를 떨고 눈물을 찔끔찔끔 흘렸던 터라, 이 녀석을 선택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솔직히 '운동권'에 대한 생각이 스스로 잘 정리되지 않은 상태이기도 했구요. 한때 운동 좀 하셨다는 분들의 거드름과 허세와 근거없는 자부심 따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꼴을 몇 번 보고 나니까, 실제로 학생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해보기도 전에 역겨움부터 느껴버렸달까요. 흐음. 얘기가 딴데로 샙니다만, 암튼.

이 책이 지금 이 시점에서 매우 유효하며 절실하며 절절한 이유는 그저 옛시절의 영광과 아픔, 희생, 열정을 재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민주주의'에 대해 곱씹고, 또 곱씹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실 21세기에도 민주주의를 걱정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끔찍하기 그지 없습니다만.

실제로 <100℃>는 그동안 여러 매체에서 6월 민중항쟁, 5.18 등을 다루는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는 지점은 없습니다. 적당한 드라마를 갖고 있고, 적당한 메시지를 갖고 있고, 적당한 정보가 있습니다. 두드러지게 모난 구석도, 편파적인 시각도 없어서 무난하게 읽을만 하달까. 뒷부분에서는 촛불소녀와 (습지생태보고서에 등장하는)사슴 녀석과 (브이 포 벤데타의)브이가 등장해 '민주주의 학습만화'라는 컨셉으로 부록이 실려 있는데, 그게 잘 나가던 작품에 달린 지나친 사족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솔직히 이건 뭥미? 했었는데, 젤 뒤의 작가의 말을 보고서는 끄덕끄덕하였지요.  

   
  그럼에도 작업을 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이 작품이 전국의 중고등학교에 배포되기 때문이었다. 똑같은 얘기라 하더라도 그 대상이 청소년이라면 하나마나한 소리도 꼭 해야 하는 소리가 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 아무것도 아닌 걸 위해 수많은 사람들-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처럼 터무니없이 약하고 겁 많고 평범한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렸고 제 삶의 기회를 포기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지키는 것이 생각보다 무척 어려운 일이고 우리의 민주주의가 안심할 정도로 튼튼하지도 않으며 끊임없이 강화하고 보완하려는 노력 없이는 어느날 사람 좋아 보이는 도둑놈에 의해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얘기까지 하고 싶었다(이런 얘기는 이 작품이 인터넷에 발표됨과 동시에 집권한 현 정부에 의해 충분히, 현장체험을 곁들여 잘 교육되고 있는 중이다).  
   

 사족같은 '학습만화'에 손발이 오글오글하였지만, 그 내용은 알차기 그지 없고 유머까지 곁들여져 있는 데다 청소년을 위한 것이라면 충분히 납득이 갈 만 했다는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만화를 아주 즐겨보는 편은 아닌데 매번 최규석의 만화가 나올 때마다 자꾸 찾게 되는 건 바로 이런 납득할 만한 '신념'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물론 무엇을 이야기하든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이나 서사의 구조가 촘촘하여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어내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매일 신문이나 뉴스를 보며 한숨이 늘어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한숨만 나오는 신문, 뉴스 따위 보고 싶지 않아!를 외치며, 세계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리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어쩌다 열 뻗쳐서 블로그에, 댓글에, 커뮤니티에, 게시판에 분노 폭주하는 글을 썼다가 괜히 이성적이지 못한 사람 취급을 당하기도 하겠지요. 그런 글들을 읽고 다시 회의에 빠져 이 썩을 놈의 세상, 이 지리멸렬한 인터넷의 찌질이들, 하며 혀나 끌끌차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솔직히 2008년 2월 이후로 신문이며 뉴스며 꼴도 보기 싫다, 하며 무관심으로 일관할 때도 있었습니다. 근데, 그게 정말 무섭더라구요. 그거, 그 무관심.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선덕여왕>에도 자꾸 나오잖아요. 뭐라도 하라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제일 나쁜 거라고. 내가 변하면 모든 게 변한다고. "사람도 100도씨가 되면 분명히 끓어.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네." 그런데 애초에 뜨거워지지 않으면 99도씨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책을 덮으면서 다시 한번 생각했습니다. 뜨거워져야 겠다고. 다시 등을 돌리지 말아야 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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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그리고 또 다른 <재즈 시대 이야기들>, 펭귄 클래식 펭귄클래식 11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박찬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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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진정 심심할 때 애플닷컴(http://www.apple.com)에서 트레일러를 본다. 미국사이트라서 현재 미국의 개봉상황에 맞는 영화 예고편이 잔뜩 있는데 퀵타임을 깔고 보면 화질도 죽이고 꽤 흥미진진하달까. 물론 자막은 없다. 하지만 예고편 정도는 대사 한 마디도 안 나와도 대충 딱 보면 각 나온다. 홋홋. 문제는 그렇게 미국 개봉 기준의 예고편을 보다보면 오오 이 영화 죽이는데! 싶은 영화들이 안타깝게도 국내에서는 개봉을 안 하는 경우가 몹시 많다. 반대로 오오 이 영화 죽이는데! 싶은 영화가 국내에서 개봉을 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는거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딱 그런 경우다. 일단 우리우리 브래드와 우리우리 케이트 엉냐가 나온다는 것 자체에 헉! 했는데 영화도 꽤 흥미로워 보이는 거다. 영어 못 알아들어도 벤자민 버튼이란 애가 나이를 거꾸로 먹는구나, 싶고. 원제가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이었으니, 정말로 흥미로운 케이스고나... 했다. 다행히 이 영화가 뒤늦게(!) 개봉을 하게 되었고, 거기에 맞춰 이렇게 책까지 나와 주셨다. 그것도 내가 완전 사랑하는 펭귄에서. 역시, 간지가 난다. 간지좔좔펭귄클래식. 

워낙 단편집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책이 소품처럼 느껴지기보단 나를 위한 종합선물셋트로 보였달까.
그 시끄러운 광화문 커피빈에 앉아 귀에 이어폰을 낑겨 넣고 앉은 자리에서 스르륵 읽어버렸다. 과연 흥미로운지고..... 일단 소재 자체가 흥미로우니 이렇게 짧은 단편임에도, 쌀로 바삭하고 커다랗고 풍성한 쌀과자 만들듯이 플롯이 꽉 짜인 러닝타임 2시간짜리 영화도 충분히 만들 수 있겠다 싶더라. 영화는 일단 아직 개봉 전이고 못 봤으니 기대 이하가 될 수도, 이상이 될 수도 있으니 접어두고. 다른 단편도 일단은 접어두고. 벤자민 버튼의 이야기만 보자면.  

이건 레이몬드 카버나 존 치버 스타일의 단편도 아니고, 문장이 유려하고 문학성이 뛰어나거나 화려한 문체와 복잡한 구성을 가진 소설도 아니다. 그냥 말 그대로 노인으로 태어난 벤자민이 나이를 거꾸로 먹으면서 점점 젊어지다가 어려지다가 엥엥거리다가 조용히 눈을 감는 '일대기' 혹은 '전기'다. 그 순간순간의 에피소드들에 대한 묘사도 비교적 아주 간단하다. 그런데도 곳곳에 풍자와 유머 코드가 챡챡 감겨 있는데, 특히 노인으로 태어난 벤자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노인네에게 딸랑이나 장난감 따위를 쥐어주며 억지를 부리는 벤자민의 아빠를 묘사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뭐랄까... 풉풉 웃음이 나다가도 쉣쉣 씁쓸해진달까. 

소설을 읽고 나니 영화가 더 땡긴다. 근데 이게 그래픽 노블로도 출간이 되었더라. 갠적으로 요즘 <와치맨>이나 <브이 포 벤데타>같은 그래픽 노블을 좀 뒤적거렸는데, 이 책은 얼핏봐도 전형적인 미국 스타일의 화풍은 아니다. 그래서 자꾸 더 눈길이 간다. 그런데 찾아보니 사실 이 <벤자민 버튼...>은 생각보다 여러 곳에서 출간이 되어 있었다. 번역자도 다르고 출판사도 다르고 표지도 다르다. 개인적으로 전부다 모아 놓고 비교 분석해가면서 <벤자민 버튼 연구> 뭐 이런 거 해보면 어떨까 하는 되도 않는 생각을 해봤다. 훗. (전에 <델러웨이 부인>을 열린책들 버전으로 살까, 솔출판사 버전을 살까, <생의 한가운데>를 문예출판사 버전을 살까, 민음사 버전을 살까 고민했던 기억이 쇽쇽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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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지음 / 길찾기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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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뒷북이지만 표제작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포함한 최규석 단편집을 봤다.

순식간에 좌르륵 읽어버렸지만 결코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첫번째 단편 '사랑은 단백질'은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진 것 같은데 돼지와 닭과 3인방의 이야기를 보다가 푸훕, 하고 사무실 책상에 엎드려 뿜었다;;; 근데 또 다시 책장을 넘기면 도저히 웃을 수 없는 이야기다. 둘리 역시 마찬가지. 예전에 한창 스캔한 이미지가 돌 때 잠깐 보기는 했지만 다시 보니 이건 정말 "슬픈" 오마주가 맞다. 그리고 단순히 오마주라 하기엔 완성도가 너무 지대로다.

졸업작품부터 데뷔작까지 비교적 초창기 작품들이라 그런지 최규석의 걸쭉걸쭉하고 농밀한 시선이 덜 느껴지긴 하지만 <습지생태보고서>와 <대한민국 원주민>을 도저히 안 살수가 없게 되버렸다. <대한민국 원주민>은 한겨레21에 연재될 때 틈틈이 봤는데 차암... 뭐랄까... 그 만화, 볼 때마다 아프다. 불편하다가, 또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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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우욱 읽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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꾿빠이, 이상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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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불명 야샤르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 푸른숲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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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직접 서점에 가서 책을 샀다면, 결코 이 책을 집어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일단 이 책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동화책스러운 일러스트는 전혀 내 타입(?)이 아니었단 말씀. 어쨌거나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오게 된건 아주 우연한 상황 덕분이었지만 나름대로 의외의 즐거움이 있었다.

 

  동사무소 직원의 실수로 공문서상에 '사망'한 자가 되어버린 야샤르는 교도소에 들어와 자신의 꼬이고, 뒤틀리고, 지지리 복도 없고, 지지리 운도 없고, 황당하고, 어이없고, 기가막힌 삶을 매일 밤마다 풀어놓기 시작한다. 태어나기도 훨씬 전 해에 이미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기재되는 바람에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못한 야샤르의 인생은 초등학교 입학때부터 꼬이기 시작한다. 생사가 확인되지 않으면(반드시 공문서상에서의 확인이라야 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생사불명' 상태는 매 순간 아주 편리하게 적용된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는 넌 죽었다, 고 하고 군대 갈 때가 되면 넌 살았다, 고 하고 제대할 때는 넌 죽었다, 세금을 내고 빚을 갚을 때는 넌 살았다, 유산을 상속받으려고 하면 넌 죽었다, 정신병원에 수감(?) 될 때에는 넌 살았다, 병원에서 나가려 할 때는 넌 죽었다, 를 반복하는 국가 앞에 야샤르는 지칠대로 지쳐간다.

 

  그들이 야샤르의 이야기에 이렇게나 열광하는 이유는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야샤르와 비슷한 사건을 경험한 그들 대부분에게 야샤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공동의 삶이었던 것이다. 야샤르는 마치 모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체화한 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p206

 

  그가 매일 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교도소 안의 수감자들은 함께 분개하고, 함께 욕하고, 함께 억울해하고, 함께 슬퍼한다. 야샤르가 겪은 일들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외진 곳에서, 가장 어두운 곳에서 하루하루 삶을 이어나가는 소시민들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아주 일상적인 경험들의 고농축 엑기스였다고나 할까. 그리고 거기에는 나도 끼어 있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기가막히면서도 한편으론 우습고, 결국 씁쓸해지는 에피소드는 바로 내가, 우리가 겪는 일들이 아니던가.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기 위해, 혹은 잘못된 기록을 바로 잡기 위해,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문턱이 닳도록 관공서를 드나들던 야샤르는 결국 끝없이 이어지는 공무원들과의 질기고, 지난한 싸움에서 두 손을 들고 마는데, 공공기관의 풍경은 어느 시대에나, 어느 나라에서나 다 같은 모양이다. 서류를 작성해라, 어디에 제출해라, 문서 번호를 받아와라, 누구를 찾아가라, 증명서를 떼어 와라, 어디에 가서 승인을 받아라, 어느 과에 가서 누구에게 문의 해라. 야샤르의 이야기에서 공공기관의 까다로운 절차를 묘사하는 부분은 짜증이 날 정도로 과장되고, 우습게 묘사되고 있는데,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애써 서류를 마련하면 문서번호가 있어야 한다며, 이브라힘 씨에게 제출하라고 하고 문서과의 이브라힘을 찾아가면 그가 아이텐 양을 만나러 갔다고 한다. 이브라힘을 찾기 위해 아이텐 양을 찾으면 아이텐 양은 과장님을 만나러 갔고 과장님에게 갔더니 그는 축구 경기장에 있다고 한다. 거대한 경기장 안에서 미친듯이 과장님을 찾아 헤매면 누군가 경기장 관리과장에게 데려가고 야샤르는 제발 문서 번호를 달라 요청하고, 결국 헛소리를 한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수감되는 식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 공무원의 업무속도는 달라진다. 공공기관 안에서 어렵게 큰돈을 들여 마련한 모자를 잠시 걸어 둔 사이, 분실물로 분류돼 순식간에 서류와 함께 문서과로, 과장에게, 관련 부서로, 창고로 사라진다. 그 모자를 되찾기 위해 또 사방팔방 뛰어다니고 몇일을 허비한 후에야 마침내 과장의 확인서와 함께 모자를 찾으러 창고에 가지만, 결국 주민등록증이 없으므로 신분을 확인할 수 없다며 모자를 돌려주지 않는다.

 

  야샤르의 황당무계한 인생사(史)에는 우리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 무기력한 인간의 위선과 불편한 자화상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래서 읽는 내내 가끔은 짜증이 확- 솟아 오르다가, 피식피식 웃다가, 씁쓸해지고, 잠시 슬퍼진다. 야샤르의 이야기를 듣는 수감자들처럼, 욕이 절로 나오는 것이다. "에이 씨발!" "이런 제기랄!" "염병할 놈의 세상!" "뒈져버려라!"

  '염병할 놈의 세상'에 대한 풍자와 비판의 시각으로 기가 막힌 이야기를 풀어내는 아지즈 네신은 터키의 작가인데, 알라딘에서 어떤 독자가 "아지즈 네신의 입담을 따라가다 보니 터키와 한국은 정말 형제국가가 맞는가 보다"라고 하더라. 사실 터키가 아닌 어느 나라인들 이런 상황에서 자유로울수 있겠는고? 세상의 온갖 부패한 것들은, 위 아 더 월드여, 씨앙! 

 

  "그러니까 정말이지 존재하지 않는 것을 관리하는 나라는 우리 나라밖에 없을 겁니다. 관공서에서 말입니다. 부하가 상사에게 '아닙니다,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 상사가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어떻게 잘 관리해봐'라고 말한다네요. 아마 우리 나라의 관리인보다 더 유능한 관리인은 이 세상에 없을 겁니다.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지만, 민주적인 관리라는 게 버젓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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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29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가 혹은 민주주의. 그것들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들일까요? 최근들어 절실히 느끼는 거지만 최소한 '국민'을 위해서는 존재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망할놈의 현실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