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하고 녹슬지 않는 위픽
이혁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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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를 수 없는 인공지능 세상에서 결국 지켜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게으른 독자인 주제에 감사하게도 이혁진 작가의 신작을 일찍 일어볼 수 있었다. <단단하고 녹슬지 않는>은 자율주행 차량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자율주행 차량에 관심이 많다면 누구나 한 번은 들어봤을 윤리적 이슈가 있다. 바로 '트롤리의 딜레마'라고도 하는 문제다. 만약 제동장치가 망가진 자율주행 자동차에게 두 갈래의 길이 있다고 치자. 한 쪽 길은 어린 아이가 있고 다른 쪽 길은 노인이 있을 때 과연 이 차는 어느 길을 택해야 하느냐는 딜레마다.

이 소설은 이 문제를 풀어냈다. '슈마허'라는 자율주행 차량이 어린 아이와 할머니 중 할머니를 치었다. 사고 피해자인 '한영인' 학교재단 이사장은 슈마허의 제조사에 어떤 근거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따져 묻기도 하고 그 알고리즘을 요청한다.

슈마허의 기술을 개발한 재호, 회사의 대표 세희, 이윤만을 생각하는 테드, 모든 실무처리를 해야하는 매튜 등 다양한 인물들의 관점과 생각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더불어 아이들에게 특히 인기 절정을 구가 중인 '무버'에 관한 또 하나의 이야기 축도 흥미롭다. 무버는 휠체어와 같이 아이들이 앉을 수 있는 교육용 머신인데 이를 사용하는 아이들은 걸으려 하지 않고 학습된 고급 어휘로 말하는 기이함을 보인다.

기술의 발달로 인해 일어나는 인간의 새로운 난제들을 잘 묘사 해냈다. 작가 특유의 건조한 문체 속에 말하고자하는 가치나 인류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위픽 시리즈 책은 처음 읽었는데 일단 판형이 마음에 든다.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크기다. 가독성이 있었고 소재도 근미래지만 현실성 있는 내용이라 재미있었다.



기밀 클라우드에 올라가 있는 건 일종의 가격표였다. 사고 대상들에 대한 가격표. 세희는 재호를 봤다. 이걸로 슈마허에게 가르쳐 줘. 전봇대를 받아 탑승자를 다치게 할 바에야 길고양이를 치는 게 훨씬 싸게 먹힌다는 걸. - P19

나는 봐야겠어요. 그래야 하는 게 있다는 걸. 원래, 누가 뭐라든 세상이 어떻고 세월이 어떻든 아무 사관 없이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게 있다는 걸료. 우리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걸 허무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게 하나라도, 단 하나라도 있다는 걸요. 그게 내가 생각하는 정의(正義)라는 말의 뜻입니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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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코니에 선 남자 마르틴 베크 시리즈 3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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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베크 시리즈 3권.

1,2 권보다 재미있게 읽었다. 아마도 소설 속에서 다뤄지는 사건이 연쇄살인이라 그랬던 것 같다. 열 살 무렵의 소녀들만 골라서 성폭행한 뒤 살해하는 범죄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데서 오는 긴장감이 있다.

첫 챕터부터 등장하는 '발코니에 선 남자'가 꽤 강렬하다. 스톡홀름의 주택가에 있는 발코니에 서서 지나가는 어린 소녀들을 눈으로 좇는 남자의 모습이 묘사된다. 뭔지 모를 불편한 느낌이 소설 내내 이어진다.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다소 우연이 잦은 것은 아쉽다. 하지만 마르틴 베크를 비롯한 형사들의 어려움과 고단함이 느껴지는 부분들은 현실감 있었다. 또 세 살짜리 꼬마가 목격자로 파악되고 나서 베크가 그 아이를 통해 단서를 얻으려는 부분이 재미있었다.

수사에 난관이 계속되자 마르틴 베크는 불현듯 기억을 떠올린다. 그 기억에 힘 입어 결국 발코니의 남자를 찾아낸다. 우연에 기대지 않고 주인공답게 좀 더 극적인 발견을 했더라면 더 재미있었을 것 같다. 결국 범인이 밝혀지는 부분은 의외였다. 좀 허무하다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역시나 헐리우드 같은 영웅주의 서사가 아님을 보여주는 결말이었다.

3권의 서문은 '해리 홀레'시리즈로 유명한 노르웨이 작가 요 네스뵈가 썼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가 현재의 미스터리, 스릴러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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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녀들
시노다 세츠코 지음, 안지나 옮김 / 이음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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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읽은 <돌봄 살인>의 여운이 강하게 남아서 번역한 안지나 님의 다른 책도 찾아보게 되었다. 안지나 님은 일본 노인 문학을 연구, 번역하며 국내에 알리고 있는 분이다.

책의 저자 시노다 세츠코는 1955년 생으로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써온 일본의 중견 작가다. <여자들의 지하드>로 나오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실제 본인이 20년 넘게 치매 어머니를 돌본 경험이 있어 고령사회의 돌봄, 가부장제 속의 여성을 주제로 작품을 쓰고 있다고.

그래서인지 <장녀들>은 사회의 단면을 여리하게 포착하고 있으면서도 문학적인 재미와 깊이도 있었다.

총 3편의 중단편이 수록된 이 책은 모두 비혼여성들이 주인공이다. 또 노부모를 돌보거나 장녀로서의 의무를 강요 받는 현실로 힘들어한다.


1. <집 지키는 딸>

돌싱인 장녀 나오미는 치매를 앓고 있는 노모와 가족이 살던 낡은 집을 온전히 혼자 케어해야 한다. 갈수록 증세가 심해지는 노모에 대한 짜증과 돌봄의 고됨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혼해서 출가한 여동생은 노모의 입장만 생각한다. 그러던 중 노모가 다니는 병원에서 나오미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싱글남을 만나게 된다.

- 흘끗 여동생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어머니를 향한 애정과 배려에는 아무런 타산도 없지만 어머니의 병에도. 간병에도, 어머니가 일으킨 중대한 사건에도 무엇 하나 책임은 지지 않은, 시집 가버린 이 집의 또 다른 딸. (136 페이지)

2. <퍼스트레이디>

당뇨를 심하게 앓고 있는 어머니 대신에 의사인 아버지의 사교, 대외 업무를 책임지는 딸 게이코. 건강에 심각한 위기가 와도 단 음식을 몰래 먹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 엄마에게 게이코는 분노한다. 하지만 아버지와 남동생은 각자의 생활만 챙기고 엄마의 건강을 걱정하는 사람은 게이코 뿐이다.

3. <미션>

어머니의 투병 당시 담당의사의 헌신적인 모습에 큰 감동을 받은 요리코. 결국 어머니가 죽자 뒤늦게 의대에 입학해 집을 떠나려하지만 홀로 남은 아버지와 결혼해 따로 사는 오빠는 그런 요리코를 비난한다. 요리코가 죽은 엄마의 역할을 대신해 주길 원해서다.

세 편 모두 재미있었고 현실적이었다. 굳이 '장녀'라고 한정짓지 않아도 딸이라면 누구나 소설 속의 상황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부장적 가정과 초고령 사회에서 비혼 여성이 맞닥뜨릴 수 있는 극단적 상황을 잘 끄집어 냈다. 소설로서의 재미도 있었다. 특히 '집 지키는 딸'은 미스터리적 재미가 있고 '미션'은 묘한 스릴이 있다.


전편을 아울러 노인과 돌봄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던지기도 한다. 갈수록 노인이 많아지고 오래 사는 사회에서 불편하지만 꼭 필요한 질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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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
로널드 B.토비아스 지음, 김석만 옮김 / 풀빛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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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국내 번역본이 1997년도에 초판 발행되었는데 아직까지 절판되지 않은 까닭이 있다. 오래전에 읽었을 때는 큰 감흥이 없었지만 최근 드라마 대본을 습작하면서 읽으니 한 줄 한 줄이 주옥과도 같다.

1부 '좋은 플롯이란 무엇인가'는 핵심적인 개론을 추려 놓았다. 2부는 스무 가지 플롯을 차례대로 설명하는데 이 역시 버릴 내용이 없다. 소설, 극본, 시나리오 등 플롯이 있는 모든 장르에 다 적용 가능하다.

밑줄 그을 내용이 너무 많다.

플롯의 본질을 탐구하기 전에 먼저 강조하고 싶은 말들이 있다. 우선 플롯이란 이야기를 공식에 따라 짜 맞추는 액세서리 같은 도구가 아니라는 점이다. 플롯은 코드만 꽂으면 작동하는 전자제품이 아니다. 플롯은 유기적인 작업 과정이다.
- P23

플롯은 모든 페이지, 문장, 단어에 고여 있는 힘이다. (중략) 플롯은 이미지, 사건, 등장인물을 서로 연결시킨다. 플롯은 과정이지 사물이 아니다.
- P26

자신감을 갖고 소신대로 밀고 나가라. 플롯은 공공의 자원이다. 마음대로 사용하고 마음에 안 들면 버려도 좋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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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관계를 돌봄이라 부를 때 - 영 케어러와 홈 닥터, 각자도생 사회에서 상호의존의 세계를 상상하다
조기현.홍종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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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피할 수 없는 돌봄 문제에 대한 진심어린 대담집.

스무 살 때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혼자 돌보게 된 조기현 작가. 그의 첫 책 <아빠의 아빠가 됐다>를 읽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누군가를 내가 돌봐야하는 상황과 먼 훗날 내가 돌봄을 받게될 때를 떠올렸다. 어느 쪽도 편치않은 상황이다.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이 생겨서 후속 독서를 간간히 하고 있는데, 이 책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읽게 되었다.


'영 케어러'로서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조기현 작가와 방문진료 병원을 운영하는 홍종원 의사의 대담을 기록한 책이다. 우리 사회에서의 '돌봄'에 대해 총 다섯 챕터로 나누어 대담을 진행했다. '왜, 언제, 누구, 어디서, 어떻게'로 구분지어 나눈 대담은 실제 보호자와 전문 의료인의 입장에서 이루어져 많은 정보와 현실, 대안을 담고 있다.

우리 사회 모두의 문제이지만 애써 외면하는 돌봄에 대한 대담자들의 통찰과 관심이 대단하다. 현재 제도의 문제점과 사람들의 인식을 꼼꼼히 짚고 있어서 공부가 되었다. 대담의 진행을 맡은 편집자까지 돌봄 문제를 긍정적으로 끌어 안는 시선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프롤로그에서는 홍종원 님이 방문진료를 하며 만나 온 많은 요양보호사들의 얘기가 특히 먹먹하게 다가왔다. 에필로그는 조기현 작가님이 썼는데 최근 아버지를 시설이 아닌 집에서 케어하고 있다고. 독자로서 응원하고 싶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이 많아서 보건복지부나 사회복지 관계자들이 꼭 읽어 봤으면 좋겠다. 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도 많이 읽어봤으면. 돌봄 문제는 생각보다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는 응급실의 모습을 분초를 다투는 생존의 현장으로 재현한다. 그 서사의 주인공은 대개 의사다. 하지만 실제로 환자들의 곁을 지키는 사람은 요양보호사나 간병인처럼 돌보는 이들이다.
- P12

방문진료를 하며 삶의 마지막에 있는 분들, 이런 취약하신 분들을 만날 때는 첫 번째로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존중을 표할까예요.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 저는 그게 돌보는 관계 맺기의 첫 번째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해요.
- P97

돌봄에서 폭력이 발생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가 고립인 것 같아요. (중략) 우선 돌봄자에게는 자기 경험을 구체화해서 말하는 훈련이 돌봄의 과정에서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P113

내가 한 번도 돌봄을 할 거라고 가정해본 적도 없고, 내가 좋은 돌봄을 받을 거라고 상상해본 적도 없는 상태에서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독립적인 개인으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허상에 기대서 계속 살게 만드는 담론 경향이 계속 돌봄의 위기를 만들어낸 거죠.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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