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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속이는 말들 - 낡은 말 속에는 잘못된 생각이 도사리고 있다
박홍순 지음 / 웨일북 / 2020년 6월
평점 :
우리를 속이는 말이 한 둘은 아니지만, 저자는 모두 12개를 골라 집중하고 있다. 이들 각각에 대해 그림과 책으로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 개인적으로 그림과 책 모두에 상당한 인문학적 능력을 가진 분을 만나게 되어 기쁘다. 책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것은 저자의 성별이었다. 시작할 때는 남자이겠거니 생각했다가 점점 여자가 아닐까 생각을 하면서 읽어나갔다. 그러다 마지막 장 ‘여성은 모성애가 있다’를 읽을 때는 여자라고 확신을 했다. 글을 섬세하게 잘 썼고, 여자에 대한 그의 관점이 나를 오해하게 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남자였다. 이것도 생각해보면 ‘함부로’ 판단을 했던 증거가 되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생각하고 판단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 판단이 오류가 없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 모든 것을 한 번쯤 비틀어 보고, 한 번쯤은 뒤집어 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 글에서의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1장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속단은 위험하다. 하지만 사람의 경향성으로 인해 상당 부분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느 경우에는 ‘열을 봐도 하나를 알기 어렵다’ 인간의 내면을 누가 쉽게 말할 수 있겠나. 나도 나를 모르는데, 남이 어찌 나를 알겠는가!
‘우리는 주변의 모든 자연적 사물의 본질을 인식하고 결정하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28,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에서 재인용)
‘행동 하나로 인간 전체를 단정 짓는 것이 섣부르고 부적절하다고 본다.’(23) 하필 이 글을 쓰는 요즘은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때이다. 우리는 그분의 위대한 업적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문제는 이제 죽음으로 인해 그의 행위는 추가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지막 과오와 그의 삶 전체와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2장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경우와 비슷하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변하지 않는다고 확증하는 것은 위험하다.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조금씩 변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고 느낄 뿐이다. 사람은 늘 변한다. 나는 사람이 선하게 태어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악해질 수 있다. 또한 동시에 다시 선해질 수도 있다. 어느 사람은 너무나 쉽게 변하기도 한다.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말하지만) 너무나 쉽게 일을 내기도 한다. 사람은 알 수 없는 존재가 맞다.
3장 ‘공부는 때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부는 학창 시절의 한때 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세상이 바뀌지 않았나! 평생학습의 시대에 공부의 때를 운운할 수는 없다. 우정도 사랑도 때가 없지 않은가! 저자는 ‘공부만큼이나 우정도 때가 있는 것이다.’(56)라고 했지만 공부를 위해 우정을 미루지 말라는 뜻으로 쓰이면 모를까, 우정에 어찌 때가 있겠는가. 언제나 우정도 공부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공부만큼 꼭 필요한 감정과 욕구가 있다. 친구와 충분히 어울리고, 첫사랑의 설레는 경험을 하고, 여행을 비롯해 다양한 체험을 하는 것도 공부만큼 중요하다.’(67)
4장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는 말에는 나도 동의할 수 없다. 맹자는 ‘나이’ 하나만 가지고 위아래를 말할 수 없다고 했다.(장유유서가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 없으며, 년, 달, 일을 따져가며 서열을 매기는 것이 유교의 문화라고 단정할 일도 아니다. 경전에도 다섯 살까지는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해서 서로 벗할 수 있다고 쓰여 있다.) ‘지위’도 있고, ‘덕(德)’도 있다. 조직에서는 지위가 갑(甲)이다. 하지만 마을에서는 나이가 갑이다. 문제는 덕에 있다. 덕도 없는 주제에 나이만 가지고서 설칠 수는 없다.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덕 있는 자에게는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다. ‘나이’밖에 내세울 게 없는 사람은 사실 측은하다. 지위도 없고, 덕도 없으니 나이만 앞세운다. 그런데 ‘덕’은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니 나이가 어떠하든 함부로 대할 수는 없다. 나는 맹자의 덕이라는 개념보다. 사실 인간의 보편적 ‘존엄’을 대입해보고 싶다. 우리는 그 누구로부터 하대 받거나 멸시받아서는 안 되는 위대한 ‘존엄’을 갖고 있다. 이 존엄의 경중은 그가 누구라 할지라도 다를 수 없다. 그러므로 ‘노인과 소년’은 충분히 친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6장 ‘인간은 다 이기적이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타성이 칭송받고 있지만 우리는 종종 제 몸 하나 간수도 못하는 주제에 남을 챙기는 자들을 보면서 실소를 짓곤 한다. 충분히 이기적이어야 넘쳐서 이타성이 발현된다고 본다. ‘유전자는 이기적인 동기를 실현하기 위해 현실에서 개체의 이타주의를 퍼뜨린다는 것이다. 이기성과 이타성의 경계가 대립적이지 않고 상호 보완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연다.’(113)고 했다. 이런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 다른 사람을 충분히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인데 도와주지 못하면 마음이 불편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 나는 다른 사람을 도와준다. 이는 이타성일까 이기성일까?
7장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이 말이 맞지 않다고 ‘앎’을 멀리할 수도 없지 않은가? 앎을 무조건 선행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후행할 수도 없다. 앎과 삶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본다. 우린 알아가면서 살아가고 살면서 알아간다.
유한준의 글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곧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곧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122) 참 좋은 글이다.
8장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것은 젊은이들에게 너무 굴레를 씌우는 말이다. 우리는 어느 시대이건 삶의 고통과 마주하고 있다. 이 고통이란 건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인간이 벗어날 수가 없다. 시대에 따라 고통의 종류가 변할 뿐이지 늘 우리에게 고통은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을 딛고 살아갈 수 있다. 고통을 즐길 수는 없지만 이용할 수는 있다. 난 젊은이들에게 고통을 강요하고 싶지 않다. 그들도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래서 모든 세대에서 행복을 누리기를 바란다.
‘N 포 세대’란 말이 싫다. 그런 말은 그런 행위를 규정하여 고착화 시킨다. 왜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가. 왜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를 포기하는가. 난 젊은이들에게 포기하라는 말도 아니고 포기하지 말라는 말도 아니다. 연애, 결혼, 출산이란 게 결코 사치가 아니다. 돈 때문이라고 결코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돈이 없어도 연애할 수 있고, 결혼할 수 있고, 아이도 낳을 수 있다. 속 좋은 이야기라고 누가 욕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안타까워서 그런다.
9장 ‘소확행을 즐겨라’ 소확행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다만 삶의 많은 순간에서 행복함을 느끼기를 바란다. 아니 행복을 느끼라는 것도 억지가 있을지 모르겠다. 이렇게 말을 바꿔보자. 삶의 많은 순간에서 고통을 느끼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충분히 행복한 거니깐.
10장 ‘손님은 왕이다’라고? ‘손님을 왕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를 자신이 마음대로 부려도 되는 하인 정도로 취급하는 태도가 만들어진다.’(176)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에게 하대는커녕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소비자는 기껏해야 ‘돈’ 만 줄뿐이지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은 시간과 육체적 고통, 정신적 스트레스 등등 우리가 생각하지 못할 것까지 제공하고 있다. 오히려 그들이 갑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한없이 감사해야 한다.
11장 ‘그놈이 그놈이다’라고 말하면서 정치 혐오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저자의 주장에 강력하게 동의한다. 정말로 ‘정치가 희망이다.’ 함석헌 선생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정치란 덜 나쁜 놈을 골라 뽑는 과정이다. 그놈이 그놈이라고 투표를 포기한다면 제일 나쁜 놈들이 다 해 먹는다.”(199) 내가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인 중에는 제법 깨끗한 사람도 많다. 또 존중받아 마땅한 사람도 많다. 그럼에도 정치적 결과물이 너무 안 좋기에 사람마저 그렇게 매도된 측면이 크다. 경제가 발전하고 있듯, 정치도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긍정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당연히 관심의 끈을 놓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