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워진다는 것 창비시선 205
나희덕 지음 / 창비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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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만(小滿)

나희덕

이만하면 세상을 채울 만하다 싶은

그런 때가 초록에게는 있다

조금은 빈 것도 같게

조금은 넘을 것도 같게

초록이 찰랑찰랑 차오르고 나면

내 마음의 그늘도

꼭 이만하게는 드리워지는 때

초록의 물비늘이 마지막으로 빛나는 때

소만(小滿))지나

넘치는 것은 어둠뿐이라는 듯

이제 무성해지는 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

나무는 그늘로만 이야기하고

그 어둔 말 아래 맥문동이 보랏빛 꽃을 피우고

소만(小滿) 지나면 들리는 소리

초록이 물비린내 풍기며 중얼거리는 소리

누가 내 발등을 덮어다오

이 부끄러운 발등을 좀 덮어다오

ㅡ시집『어두워진다는 것』, 창작과 비평사(2001)




버스를 타고 차창을 내다보면 온통 초록이 시야를 뒤덮는다.

음력 날짜와 절기가 기록되어 있는 농협 하나로마트 달력을 쓰시는 어머니 덕분에 나는 절기마다 네이버를 검색해본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세시풍속사전에는 이런 설명이 들어있다.





소만

滿 ]


정의

24절기 중 여덟 번째 절기. 양력으로는 5월 21일 무렵이고 음력으로는 4월에 들었으며, 태양이 황경 60도를 통과할 때를 말한다. 소만(滿)은 입하()와 망종() 사이에 들어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점차 생장하여 가득 찬다[滿]는 의미가 있다.

내용

이때는 씀바귀 잎을 뜯어 나물을 해먹고, 냉이나물은 없어지고 보리이삭은 익어서 누런색을 띠니 여름의 문턱이 시작되는 계절이다. ‘농가월령가()’에 “4월이라 맹하(, 초여름)되니 입하, 소만 절기로다.”라고 했다. 이때부터 여름 기분이 나기 시작하며 식물이 성장한다. 그래서 맹하는 초여름이라는 뜻인 이칭도 있다.
소만 무렵에는 모내기 준비에 바빠진다. 이른 모내기, 가을보리 먼저 베기, 여러 가지 밭작물 김매기가 줄을 잇는다. 보리 싹이 성장하고, 산야의 식물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모내기 준비를 서두르고, 빨간 꽃이 피어나는 계절이다. 모판을 만들면 모내기까지 모의 성장기간이 예전에는 40~50일 걸렸으나, 지금의 비닐 모판에서는 40일 이내에 충분히 자라기 때문에 소만에 모내기가 시작되어 일년 중 제일 바쁜 계절로 접어든다. 또한 소만이 되면 보리가 익어가며 산에서는 부엉이가 울어댄다. 이 무렵은 ‘보릿고개’란 말이 있을 정도로 양식이 떨어져 힘겹게 연명하던 시기이다. 산과 들판은 신록이 우거져 푸르게 변하고 추맥()과 죽맥()이 나타난다.
중국에서는 소만 입기일()에서 망종까지의 시기를 다시 5일씩 삼후()로 나누어, 초후()에는 씀바귀가 뻗어오르고, 중후()에는 냉이가 누렇게 죽어가며, 말후()에는 보리가 익는다고 했다. 씀바귀는 꽃상추과에 속하는 다년초로서 뿌리와 줄기, 잎은 식용으로 널리 쓰인다.
초후를 전후하여 죽순을 따다 고추장이나 양념에 살짝 묻혀먹는 것도 별미이다. 또한 냉잇국도 늦봄이나 초여름에 많이 먹는다. 보리는 말후가 되면 익기 시작하므로 밀과 함께 여름철 주식을 대표한다.
모든 산야가 푸른데 대나무는 푸른빛을 잃고 누렇게 변한다. 이는 새롭게 탄생하는 죽순에 영양분을 공급해 주었기 때문이다. 마치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어린 자식을 정성들여 키우는 어미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그래서 봄철의 누런 대나무를 가리켜 죽추()라고 한다.

관련속담

이 무렵에 부는 바람이 몹시 차고 쌀쌀하다는 뜻으로 “소만 바람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만 [小滿] (한국세시풍속사전)

 



5월말에 강원도 산간 설악산 일대에 눈이 왔다는 뉴스를 봤는데

과연 소만(小滿)에 대한 속담이 이토록이나 맞구나 싶다.

그리고 강원도 산골에서 농사짓는 친구가 비 오는 날 찍은 모내기 사진을 보내왔다.

아, 아직까지 우리는 농사와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니구나.

그러니까 이 농번기를 감안해서 지은 절기들도 낯설기만 하지는 않은 느낌이었다.



봄과 겨울과 초여름이 한꺼번에 혼재된 5월이다.

빛과 어둠이 적절하게 뒤섞여있는 나희덕의 초기 시집을 읽는다.

가장 대표적인 시는 표제작인 '어두워진다는 것'이다만.

마침 오늘과 들어맞는 절기에 관한 시가 보여서 올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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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블로그 위주로 활동하다보니 알라딘 서재는 거의 방치상태에 있다가, 

최근 북플 이용을 활발히 하면서부터 여기에도 읽은 책 기록을 좀 남기자 싶었다.


독서에 대한 감상과 기록은 매우, 몹시 귀찮지만,

그럼에도 매년 한 번씩은 실행하자고 띄엄띄엄 다짐하는 이유는

기록이 없으면 이제 읽은 책에 대한 기억이 예전처럼 또렷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일종의, 쪼그라든 해마 되살리기 운동의 일환이랄까.


마침 리디 셀렉트에서 30일 이용권을 저렴하게 구매한 김에

제목만 보고 흥미롭다 싶은 것을 이것저것 다운받아보았다.


오늘 읽은 책은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허블(2019)

『당신이 옳다』를 읽다가

헌 장난감에 싫증난 어린아이처럼 새 책을 펼쳐보고싶은 마음에 펴들었다가 단숨에 속독했다.


책의 여운에 취한 김에 리뷰도 쓰고.

페이퍼도 별 의미 없지만 올려본다.


떠도는 말들을 활자로 다 담을 수가 없어서 다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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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지음 / 허블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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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동결은 대가 없는 불멸이나 영생이 아니야.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눈을 뜨는 순간이 있어야 하고, 그때마다 나는 내가 살아보지도 못한 수명을 지불하는 기분이 들지." "그럼 대체 왜 그런 일을 하시는 겁니까? 이제 편히 노후를 보내실 수도 있잖습니까." . . . "이제 상황 판단이 안 되는 거라네. 내가 여전히 동결 중인지, 사실 이 모든 것이 몹시 추운 곳에서 꾸는 꿈은 아닌지, 내가 사랑했던 이들이 정말로 나를 영원히 떠난 게 맞는지, 그들이 떠난 이후로 100년이 넘게 흘렀다면 어째서 나는 아직도 동결과 각성을 반복할 수 있는지. 왜 매번 죽지 않고 다시 깨어나는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고, 얼마나 많이 세상이 변했는지. 그렇다면 내가 그들을 다시 만나는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닌지. 그럼에도 잠들어 있는 동안은 왜 누구도 나를 찾지 않고, 왜 나는 여전히 떠날 수 없는지....." 안나가 빙긋 웃었다. "한번 생각해보게. 완벽해 보이는 딥프리징조차 실제로는 완벽한 게 아니었어. 나조차도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몰랐지. 우리는 심지어, 아직 빛의 속도에도 도달하지 못했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우리가 마치 이 우주를 정복하기라도 한 것마냥 군단 말일세. 우주가 우리에게 허락해준 공간은 고작해야 웜홀 통로로 갈 수 있는 아주 작은 일부분인데도 말이야. 한순간 웜홀 통로들이 나타나고 워프 항법이 폐기된 것처럼 또다시 웜홀이 사라진다면? 그러면 우리는 더 많은 인류를 우주 저 밖에 남기게 될까? "안나 씨."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ㅏ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끄셔도 소용은."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게 아닌가." ​ ​ ㅡ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허블(2019)


오랫동안 나는 한국소설을 기피해왔다. 한국소설 특유의 적나라한 현실묘사들이 불편해서라고 주장하면서. 현실의 구질구질함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데 거기에 더해서 소설에서까지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회피적인 심리가 기저에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로맨스소설을 좋아하고 동화를 좋아하고 판타지 소설을 격하게 사랑한다. 여기가 아닌, 저기를 그려볼 수 있으므로. 아무 것도 못 하는 무능력한 내가 아닌, 먼치킨적인 능력을 가진 타인으로서 세계를 대면할 수 있으니까.

그런 편견없이 문득 고른 소설 한 편에 정신없이 빠져든 것은 의외의 일이다.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물리치료의 심심함을 때우기 위해 열었다가 완독한 후에야 책장을 간신히 덮었다. 최근에 읽은 어떤 장르의 책에서도 이 정도의 몰입도는 흔치 않은 일이다. 책을 읽은 뒤, 무어라고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간질간질한 말들이 나의 손가락 끝에서 떠돌고 있어서 두서없이 내려놓기로 한다.

이 책은 여러 개의 이야기들이 짤막한 단편처럼 묶여있는 옴니버스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책에 실려있는 낱낱의 이야기들에 대한 간단한 줄거리를 뒷면 해설을 인용해서 언급해본다.

「관내분실」은 죽은 사람들의 생애 정보를 데이터로 이식한 '마인드'를 수집하는 도서관이 나온다. 자신이 임신한 아이에 대한 애정이 없는 '나'는 살아생전에 사이가 소원하다못해 남보다 못했던 엄마의 영혼이 담긴 인덱스가 도서관 내 분실되었다는 것을 알고 엄마가 남긴 삶의 흔적을 되짚어가다가 결과적으로 엄마의 인덱스를 찾고 나와 엄마간의 관계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회복하게 된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인간을 획기적으로 다른 우주공간으로 보낼 수 있게끔 만드는 인간 냉동 수면기술인 딥프리징을 연구하던 여자 과학자가 워프항법 개발로 인해 우주 이동의 패러다임이 변화한 뒤 남편과 아이를 보낸 슬렌포니아로 갈 수 없게 되자 170세가 될 때까지 우주 정거장에서 오지 않는 비행선을 기다리는 모습이 나온다.

「스펙트럼」에서는 우주 탐사를 떠났다가 실종된 40여년 동안 태양계 바깥의 행성에서 외계 지성 생명체를 조우한 여성 생물학자가 그들에 대한 추억을 손녀인 나에게만 살포시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허언증 환자로 몰리면서까지 그들에 대한 일체의 정보를 숨겨온 주인공은, 함께 지낸 외계 지성체가 자신에 대해 내린 정의를 해독해내고 되새긴다. "그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생물이다."라는.

특이하게도 이 우주 판타지 소설에서 나오는 주인공들은 모두 여자이다. 나는 해설을 썼던 문학평론가가 주시했던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을 다뤘다는 데 중점을 두고싶지는 않다. 그냥 한데 묶어서 그냥 인간들의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각각의 이야기들 속에는 소외와 차별, 경제성의 원리 등등 사회의 변두리에 자리한 소수자들이 겪어야 하는 차별과 배제가 생생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은 결과적으로 인간의 존재론적인 의미를 주목하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나가야만 하는 나, 혹은 타자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타자를 조망한다는 것은 곧 타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나의 존재에 대해 들여다본다는 것이다. 무수한 나의 집합이 타자들이고 타자들이 분해된 것이 낱낱의 나이다. 그들이 겪고 있는 부조리함과 이별과 고독과 외로움이 저 멀리 있는 사람들만의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개인이라는 알갱이들로 흩어진 지금 우리가 보편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과 통찰이 아닐까.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감정들에 대한 공감과 이해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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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스스로 언어화하지 못할 때 속이 썩는다는 말은 정확하다. 고통의 원인인 모든 부정의가 오로지 나라는 존재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경험을 꺼내 읽고 해석하는 일은 혼자 속 썩이며 참는 일보다 나에게는 참을 만한 고통이었다. 그런 면에서 글쓰기는 내 이야기가 단지 사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 사소하지 않다는 것, 내가 경험한 고통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폭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걸 각성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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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밥
안도현


무밥 한 그릇이
소반 위에 놓여 있다.
소반이 적막하여서
무밥도 적막하여서
송송 채를 썬
흰 무의 무른 살에 스민
뜨거움도 적막하여서
무밥 옆에 댕그라니 놓인
양념간장 한 종지도
옛적에 젊은 외삼촌이
여자를 만난 것처럼
가난하게 적막하여서
들척지근하고 삼삼한
이 한 저녁을
나는 달그락달그락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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