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결혼 시키기
앤 패디먼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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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지에 적힌 글
 
 
 
 
  오래 전 조지와 내가 아직 연인 사이는 아니지만 대충 그 방향으로 비틀거리며 나아가고 있다고 느낄 무렵 우리는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받았다. 물론 선물은 책이었다. 조지는 내가 곰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어니스트 톰슨 시튼이 쓴 《회색 큰 곰의 전기》를 주었는데, 세 번째 책장에 가서야 다음과 같은 헌사가 수줍게 자리잡고 있었다. 진정한 새 친구에게. 나는 그 헌사의 강조점을 제대로 파악하여 해석하기만 하면("진정한 새 친구에게", "진정한 새 친구에게", "진정한 새 친구에게") 갑자기 영원한 헌신의 고백이 드러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어떤 탈무드 학자도, 어떤 전시의 암호 판독가도, 어떤 해체주의 비평가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꼼꼼하게 그 세 마디를 연구했다.
 
  나는 조지가 어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에게 조셉 미첼이 풀턴 어시장에 대해 쓴 이야기들을 묶은 얇은 책 《늙은 플러드 씨》를 선물했다. 그 책에는 1948년에 저자가 직접 써 준 서명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가만히 둘 사람인가? 물론 아니다. 나는 이렇게 적었다. 조지에게, 앤이 사랑으로. 그 뒤에는 레드 스미스1의 말을 잘못 옮겨 적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으면 아무 말이나 다 하라는 원칙에 의거하여, 남녀관계의 본질에 대한 나 자신의 사유를 열다섯 줄 덧붙였다. 감정을 분명히 드러내는 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군말을 잔뜩 쌓아놓는 면에서도 내가 조지를 20대 1로 압도했다. 그 책, 그 책을 받은 사람, 진정한 새 친구 관계가 그 헌사의 무게에 짓눌려 버리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다.
 
  어쨌든 조지는 나와 결혼을 했고 어류와 조셉 미첼에 대한 애정도 그대로 간직했기 때문에, 불행히도 내가 적은 말들은 영원히 보존되었다. 예컨대 스웨터를 선물하면서 함께 보낸 카드는 스웨터와 곧 헤어질 가능성이 높지만, 책과 거기에 적은 헌사는 영구히 결합되어 있다. 이것은 축복이 될 수도 있고 오점이 될 수도 있다. 글루체스터셔의 치핑 캠든에서 고서적을 파는 소머스 스튜어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의 귀중한 친구 존 키츠2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으로, P.B. 셸리3가 1820년 플로렌스에서'라는 진짜 자필 헌사가 적힌 톰슨의 《사계》를 손에 넣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지 상상해 보시오. 또 밀턴의 《실락원》의 멋진 초판을 손에 넣었는데, 속표지에 '에이더에게 제스가, 1968년 블랙풀에서 보낸 행복한 휴가를 추억하며 많은 사랑과 솜사탕으로'라는 헌사가 볼펜으로 찍찍 휘갈겨져 있을 때 얼마나 속이 상할지 상상해 보시오."
 
  솜사탕류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나의 헌사는 《늙은 플러드 씨》의 가치를 높여 주지 못했지만, 예컨대 "엘리자베스 배럿 양에게 애드가 앨런 포가 존경하는 마음으로"라는 헌사는 《갈가마귀와 기타 시편》4의 가치를 높여 주었고, "한스 크리스찬 안데르센에게 / 친구인 찰스 디킨스가 존경하는 마음으로 / 1847년 7월 런던에서"라는 헌사는 《피크위크 클럽의 기록》5의 가치를 높여 주었다. 서적광의 가치 등급 체계에서 문인간의 접촉을 보여주는 그런 거룩한 유물은 다른 모든 요인들을 덮어 버린다. 장정, 판수, 희귀성, 상태 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천하고, 칠칠치 못하고, 누렇게 뜨고, 벼룩이 들끓고, 귀가 접힌 창녀 같은 책"(비평가이자 애서가인 홀브룩 잭슨이 했던 말)도 유명한 족보에 속하는 헌사만 있으면 순식간에 귀족으로 변모한다. 먼지에 바이런이 마르체사 지치올리에게 보낸 226단어의 짧은 연애 편지가 적힌 마담 드 스탈의 닳고 닳은 《코린》을 손에 쥐고 떨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 연애 편지는 이렇게 끝난다. "사랑한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을 사랑하며, 이 사랑은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알프스와 바다가 우리를 갈라 놓을 때 가끔 나를 생각하십시오. 그러나 그대가 바라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렇게 갈라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회색 큰 곰의 전기》 안에서 내가 은근히 보고 싶어했던 것이 바로 이런 글이었다.)
 
  바이런은 뜨거운 사랑에 빠져 제정신이 아니었을 텐데도 전통적으로 저자만이 글을 적을 수 있는 속표지를 피해 면지에 헌사를 썼다. 나는 수십 명의 작가들의 속표지를 더럽힌 뒤 최근에야 이 예절을 알게 되었다. 우리 서가의 "친구나 친척이 준 책" 범주에도 속표지에 헌사를 쓴 책들이 많이 꽂혀 있었지만 한결같이 적법성을 지킨 것들뿐이었으니 그런 예절을 진작에 깨우칠 수도 있었을텐데.
 
 
 
 
ㅡ앤 패디먼, 『서재 결혼 시키기』(지호,2001)
 
 
 
 
1 Red Smith(1945~), 미국의 스포츠 칼럼니스트.
2 John Keats(1795~1821), 영국의 시인.
3 P.B.Shelley(1792~1822), 영국의 시인.
4 The Ravens and Other Poems, 애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1809-49)의 작품.
5 The Pickwick Papers, 찰스 디킨스(1812-70)의 작품.
 
 
 
 
 ♣ 앤 패디먼 Anne Fadiman은 「아메리칸 스칼러」의 편집자이다. 첫 책 「유령이 당신을 붙들면 당신은 쓰러진다」(1997)로 미국 도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뉴요커」, 「시빌리제이션」,「하퍼스」,「라이프」,「뉴욕 타임즈」 등에 글을 썼다. 그녀의 가족은 최근 뉴욕시티에서 매사추세츠 주 서부로 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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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릿속이 단순무식 감정배제 사고회로로 전환된 최근, 복잡한 인풋과정을 거쳐야 하는 '문장', 혹은 조각이지만 그나마 '글' 같은 것을 쓰게 만든 건 바로 이 책이었다. 아무래도 아직까지는 에너지가 딸리므로(현재 모든 에너지는 기초대사 분야에 가장 집중해있다) 두뇌를 돌리는 따위의 소모가 심한 일은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호응관계나 주술이 완벽히 들어맞는 문장을 말하면 저녁무렵에 집어먹은 빵의 열량(215kcal)가 몸에서 쑥 빠져나가고 거기다가 지금과 같은 감상을-예전에 비해 현저히 느린 속도로- 쓰고나면 12시 무렵 야참으로 먹은 새끼 튀김우동(275kcal)과 김밥 반 줄(최소 400kcal)가 술술 새어나가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가끔 이불 위에 엎어져 있다보면 어떤 생각의 파편들이 떠오르긴 하지만 대개 그것들은 낡은 몸 안에서 차마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저 두터운 머릿 속을 툭툭 건드리다가 없어지곤 한다. 더구나 운동뉴런을 자극하여 명령을 근육으로까지 전달하는 과정에까진 이르지 못하므로 기록이란 작업은 쉽게 이루어지기 어렵다. 그런데 잠이 깼다가 다시 누운 상태에서도 본문과 관련된 잡다한 생각들이 부유물처럼 떠올라 '귀차니즘'이라는 최대의 신조를 포기하고 결국 마개를 열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자. 이제껏 주고받은 책에 대한 헌사들은 모두 면지가 아닌 속표지에 썼었다. (이런 예의없는!) 얼마 전에 나타샤님이 某여인에게서 받은 책 안에도 속표지에 썼으며(기념으로 나도 같이 써주었다), 후배에게 부쳐주려고 빼놓은 시집《링 위의 돼지》에도 저자 대신 뻔뻔스럽게 속표지에다 썼다. 게다가 가장 최근에 받은 《그림자 자국》은 오히려 헌사를 요청하지 않은 채 그냥 들고오는 무례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것은 함께 모여 책을 사기만 하면 카페에서 책을 나눈 후 서로에게 헌사를 써주던 <경건한 의식>이 세월이 흐르면서 퇴색되어버린 결과이다. 설사 우리의 헌사가 바이런의 그것처럼 애틋하고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 단순히 먹은 음식과 그 날 한 행위, 가본 장소의 기록이었다 할지라도 기록의 일상화는 꾸준히 이루어져야 마땅했던 것이다. 가장 뚜렷하게 기억나는 헌사를 하나 적어보자.

 

  2004년에 발간된 신현림의 『해질녘에 아픈 사람』 속표지 앞부분에는 하늘색 펜으로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2004.8월 1일 민들레영토에서 뽀빠이(돈부리, 허니)를 먹으며… P.M.6:30. 초록여신&슬픔의바다". 그리고 역시 속표지 뒷부분의 내용은 이와 같다. "시를 목숨처럼 사랑하는 당신은 언제나 이 세상의 길목에서 아름다움 빛으로 찬연히 빛날 것입니다. 2004.8.1. 민들레영토에서 슬픔의바다님께 초록여신."(오자가 하나 있다.ㅋ) 이 이름은 오랜 기간 활동한 인터넷 시카페에서 주로 쓰던 조금은 유치할 수 있는 닉네임들이다. 몇십 년이나 몇백 년 후, 만약 중고시장에서 이 책들을 만난 사람은 소머스 스튜어스처럼 기분나빠할까 아니면 '슬픔의바다'라거나 '초록여신'이라는 뜬금없는 이름들에 황당해하거나 궁금해할까.
 
  그나저나 홀브룩 잭슨의 말에 반박해보자면 '귀가 접힌 책'들은 집에 돌아오면 "주인님, 다녀오셨어요?"하고 반갑게 맞아주는 순한 강아지의 귀 같아서 더 친근감이 든다고 여겨진다. 이건 물론 개인적인 취향과 관점이다. 내 책들은 흥미로운 부분에는 거의 귀가 얌전히 접혀있다. 길들여지지 않은 새 책처럼 읽는 이의 손길을 뻣뻣하게 튕기지 않고!

-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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