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애란 작가의 소설은 단편으로 두어 편 읽은 게 다인지라 <비행운>이 제대로 읽는 작가의 첫 소설집이라 말해도 될 듯하다.
하늘이 푸르고 맑은 날에 선명한 비행운을 보면 어떤 사연을 가지고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비행기에 타고 있는 이들이 부러워진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여러 지면을 통해 발표된 8편의 단편을 모은 소설집 속 등장인물들은 푸른 하늘의 비행운(飛行雲)이 아닌 행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비행운(非幸運)의 연속인 인물들이다.
실직자인 여자는 대학 시절 마음에 둔 선배에게 무례한 부탁을 받고 남편이 귀가하지 않은 한밤중 반지를 찾아 나선 임신부는 산통을 겪는다.

오랜 장마로 물바다가 된 세상에 홀로 남겨진 소년은 골리앗크레인에 의지하고 늦은 나이에 어렵게 결혼한 남자는 아내를 병으로 잃는다.
추석에도 쉬지 못하고 인천공항 화장실을 청소하는 비정규직 기옥 씨의 삶도 녹녹지 않다.
여자가 오랜 친구와 떠난 첫 해외여행은 생각처럼 즐겁지 않고 다단계로 지인들을 끌어모아 다른 이들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주인공도 등장한다.

작가가 모아놓은 주인공들은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부모를 모두 잃고 골리앗처럼 서 있던 크레인을 간신히 붙잡고 있던 소년도 큐티클을 정성스럽게 다듬던 여자도 죽어서도 여전히 폐지를 줍는 할머니의 환영을 봤던 여자도 하나뿐인 아들에게 ‘엄마, 사식 좀‘이라는 짧은 편지를 받았던 여자도 나이만 들고 여전히 비슷한 자리를 맴돌고 있지는 않을까 마음이 쓰인다.

지금은 소설 속에서는 큰맘 먹고 할 수 있었던 네일과 해외여행이 일반화되었지만, 여전히 비정규직 청소원이 존재하고 재개발이라는 핑계로 삶의 터전이 사라지는 이들이 있다.
’선진국형 신개념 네트워크 마케팅’이라는 이름으로 합숙하던 젊은이들은 나이가 들었고 그 시절 아이였던 젊은이들은 성공을 위해 떠난 캄보디아에서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되었다.

여전히 세상은 비행운(非幸運)인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으니 언제나 비행운을 비행기가 지나간 자리로만 인식하는 날이 올 지 까마득해진다.
어둡기만 했던 세상을 보던 작가의 눈이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지 근래에 나온 소설집도 읽어보고 싶다.

*비행운(非幸運)은 우찬제 문학 평론가의 해설 편에서 가져온 단어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을빛 그림책은 내 친구 81
아이보리얀 신경아 지음 / 논장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도서는 논장출판사 서평 이벤트에 당첨돼 제공받았습니다.>

가을은 어디에서 올까요?
바람까지 뜨거운 여름 날씨에 지칠 때쯤 아침저녁으로 살랑살랑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가을이 오는구나 싶어집니다.
그러다 가로수 나뭇잎들이 푸르름을 잃어갈 때는 정말 가을이 왔구나 싶지요.

점점 깊어 가는 <가을빛>이 온 세상을 물들일 때 맛있는 김밥을 만들어 가을 소풍을 갑니다.
하늘은 높고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오면 ’한들한들 나풀나풀’ 코스모스는 춤을 추지요.
노랗게 익은 벼들 사이로 바람이 불면 참새는 놀라 후드득 날아가고 벼들은 ‘넘실넘실 출렁출렁’거립니다.

가을을 느낄 수 있는 짧은 글과 가을빛을 풍부하게 담은 그림이 깊어 가는 가을 들판으로 데려가 줍니다.
“한들한들, 나풀나풀, 넘실넘실, 출렁출렁, 쨍쨍…“ 다양한 흉내 내는 말을 소리 내 읽다 보면 가을의 정취가 그대로 느껴져 가을 소풍을 함께 간 느낌이네요.

그림책에는 가을을 상징하는 다양한 소재들이 등장합니다.
코스모스를 시작으로 누렇게 벼가 익은 논, 빨갛게 익어가는 열매, 붉은 맨드라미, 노란 은행잎, 빨간 단풍잎…
”캔버스에 전통 한지를 여러 겹 붙인 장지를 바르고 유화 물감에 오일을 섞어 칠하는 방식“의 그림은 오래도록 눈길을 머물게 합니다.

그림책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하나의 작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만큼 아름다운 가을 그림은 보는 것만으로 행복합니다.
특히 그림책 속 아이가 가을을 즐기고 간직하는 모습은 우리 아이들과 함께해 볼 수 있는 활동이라 아이들과 가을을 즐길 수 있는 지침서가 될 것 같습니다.
너무 짧아 아쉽고 그래서 더 좋은 가을에 어울리는 <가을빛>을 여러 번 보다 보니 하루가 다르게 가을이 깊어 갑니다.

*인터넷 서점에서는 작가님의 그림책 <여름비>, <가을빛> 구매 시 은행잎, 단풍잎, 코스모스, 도토리가 그려진 예쁜 가을빛 책갈피를 보내줍니다.(마일리지 차감, 한정 수량)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암전들
저스틴 토레스 지음, 송섬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도서는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제공받았습니다.>

<암전들>이라는 제목과 잘 어울리는 검은 표지의 소설은 실존하는 연구서인 [성적 변종들: 동성애 패턴 연구]에서 시작한다.
20세기 초 퀴어 사회학자인 잰 게이는 실제 퀴어들을 인터뷰한 연구서를 출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남성 의사의 권위를 내세워야만 했다.
퀴어들의 증언들은 검게 칠해지고 그들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그들의 욕망은 장애로 해석된 채 잰 게이의 이름이 아닌 남성 의사의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오게 된다.

‘직업도, 학위도, 혈통이랄 것도 없으니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몰랐고 도움받을 남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p14)던 네네라고 불리는 남자는 죽음을 앞둔 후안을 만나기 위해 사막 깊숙한 곳에 있는 마을로 향한다.
팰리스에 도착한 네네는 후안의 간병인을 자청하고 후안은 네네에게 자신의 사후에, 팰리스에 방을 넘겨받는 대신 자신이 완성하지 못한 프로젝트와 잰 게이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완성하라고 부탁한다.

소설은 내용을 요약하기 어려울 만큼 네네와 후안의 이야기가 순서 없이 진행되고 군데군데 검게 칠해진 [성적 변종들: 동성애 패턴 연구]와 여러 장의 사진과 삽화가 등장한다.
20대의 젊은 동성애자 네네와 임종을 앞둔 늙은 동성애자 후안의 대화는 여러 형식을 넘나들며 그들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특히 영화처럼 이야기하기는 본인들의 삶을 제삼자의 시각으로 보는 듯해 더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실존 인물인 잰 게이의 삶과 그의 연구서인 [성적 변종들:동성애 패턴 연구]가 출간되는 과정과 잰 게이의 성(姓)을 물려받은 후안과 그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는 네네의 이야기가 소설의 큰 줄거리이다.
후안과 네네는 실존 인물이 아닌 허구이지만 그들이 살았던 동생애자의 삶은 허구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젠 게이가 살았던 20세기 초 성소수자의 삶과 현재의 그들의 삶을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겠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그들을 터부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퀴어들을 다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취향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퀴어들은 연구 대상도 아니고 그들의 성적 취향은 정신병이나 장애가 아닌 개인의 욕망이고 취향일 뿐인데 누가 손가락질할 수 있겠는가.
네네가 무아지경이 돼 열심히 답했던 남성성- 여성성 테스트 중 긍정으로 대답한 질문들을 읽어본다. 그 질문들은 이성애자도 LGBTQ도 여성도 남성도 사람 누구든 긍정의 대답을 할 수 있는 질문들이다.
질문을 반복해 읽으며 우리는 내내 사람들을 여성과 남성으로만 구분하려 들었고, 같은 문항에 같은 답을 체크하는 이들조차 성적 취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와 다른 이상한 사람으로 봐 왔던 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괴이 너는 괴물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에서 진행한 이벤트에 당첨돼 내친구의서재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명탐정의창자 와 #엘리펀트헤드 를 읽으며 시리이 도모유키라는 작가의 머릿속이 어떻길래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궁금했다.
특수 설정이지만 탄탄한 스토리 구성은 물론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기괴하고 불쾌하고 속까지 불편하게 하는 표현이 쉴 새 없이 등장하지만 한번 잡은 책을 덮을 수 없었던 작가의 매력에 빠져 그의 신간을 기다렸는데 이번에는 단편집으로 돌아왔다.

모든 소설을 읽고 나면 몸풀기 정도로 느껴지는 ‘최초의 사건’은 명탐정이 되고 싶어 하는 초등학생의 좌충우돌 탐정 놀이지만 등장인물이 어린이여서 더 끔찍하게 느껴진다.
지구에 무시무시한 존재들이 도착하고 32일간 64명의 인간 샘플의 지능을 측정한 후 그들이 세운 기준에 닿지 않으면 한 지역을 몰살시키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사회 규범상 범죄자이자 악인이지만 ‘말로 상대의 방어벽을 허물고 마음을 사로잡아 자기 뜻대로 조종’하는 희귀한 능력의 소유자 기미코가 인간 샘플로 차출되고 과연 그가 세계를 구할 수 있을지 ‘큰 손의 악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불쾌한 냄새까지 전해지는 듯한 가장 참혹했던 이야기 ‘나나코 안에서 죽은 남자’는 일본 유곽 안 여인들의 참혹한 삶과 독살 사건은 오래된 영화 한 편을 본 듯하다.
이야기의 화자가 꼭 인간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모틸리언의 손목‘에서는 인간이든 외계인이든 판도라의 상자 앞에서는 장사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천사와 괴물’은 누구보다 어린 양들을 돌보는 데 힘써야 하는 성직자의 타락과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돼야 했던 프릭쇼 단원들의 이야기다.
밀폐된 욕실에서 벌어진 살인이 2년 전 예언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따라가는 것도 재미있지만 세 가지의 추리는 무릎을 딱 치게 하고 추리 소설의 결말이 이리 슬플 수 있나 싶게 한다.

모두 5편의 단편이 실린 <나는 괴이 너는 괴물>은 바로 이 맛에 작가의 책을 읽는다고 못 박게 하는 이야기들이다.
다섯 편의 단편을 작가의 이름을 가리고 본다면 한 작가의 작품이 아닌 괴이한 이야기 앤솔러지로 느낄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소재의 소설로 말 그대로 잘 고른 랜덤 선물 박스 같은 소설집이다.

외계인이 등장하는 sf 미스터리에서는 인간의 사악한 마음을 드러내고 살인 사건의 진실 뒤에는 약자들이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읽게 하기도 한다.
혹시나 작가의 특수 설정과 잔혹함에 그의 소설 읽기가 두려웠던 독자가 있다면 전작보다는 덜 광적이고 덜 불편한 단편집에 도전하길 권해 본다.
“예언, 밀실, 독살, SF, 다중추리, 논리성, 천재성, 추악함, 미친 상상력…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된다.”라는 뒤표지 문구가 거짓이 아님을 느끼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치치새가 사는 숲 오늘의 젊은 작가 43
장진영 지음 / 민음사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이 차이 나는 언니와 동네 여자들을 상대로 불법 눈썹 문신을 하는 엄마, 그리고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엄마의 조수를 자처하는 아버지를 가족으로 둔 ‘나‘는 중학교 평준화 시대에 불쾌하기 짝이 없는 온조 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꽤 좋은 성적이었지만 초등학교 때는 왕따를 당했고, 중학생이 되면서 그때 왕따를 주도했던 달미와 단짝이 된다.

스스로 치치림이라고 말하는 30대 초반의 여자가 이야기하는 열네 살 봄은 잔인하다.
어떤 내용의 소설인지 자세히 모르고 읽기 시작한 탓에 2000년대 남녀공학 중학교에 다닌 여자의 회고담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종반에 다다를 때쯤에는 어린아이가 겪기에는 너무 슬프고 잔인한 경험은 책을 덮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부모는 그저 자신들의 알량한 사랑에만 가치를 두고 자식을 낳기만 하고 전혀 책임지거나 사랑하지 않는다.
제대로 마음 둘 곳 없는 아이는 친절하게 다가오는 이에게 느닷없이 사랑을 느끼고 그것이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아이에게 제발 멈추라고 수없이 외치게 된다.

내 이름은 치치림. 치치새가 사는 숲이라는 뜻이다. 치치새는 아주 진귀한 새로, 세상에 존재하는지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그 새는 마음씨가 고운 사람에게만 보인다. 행운을 가져다준다. (p7)

소설의 첫 문장을 다시 돌아와 읽으며 여전히 세상에는 아이들에게 치치림이라고 부르는 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아름답던 문장은 악마의 속삭임이 된다.
여러 번 멈출 수밖에 없었던 치치림이 되는 순간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가 문득 제대로 눈을 뜨고 보라고 현실은 이보다 더하다고 눈 돌리고 외면하지 말라고 멱살을 잡고 흔드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아이들에게 첫 번째 울타리는 가정이어야 하는데 대책 없는 부모와 20년의 세월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는 교육 현장과 사회가 수많은 치치림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아 슬프고도 슬프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나‘에게 작은 위로를 건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