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치마
이형진 글 그림 / 느림보 / 200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가 아는 심청은 어머니를 여의고 눈먼 아버지 품에서 동냥젖을 얻어먹으며 자란 효녀이다.

자라면서도 효성이 지극해 어려서는 남에 집에 밥을 빌어 먹고, 바느질이라도 할 나이가 돼서는 제 힘으로 아버지를 봉양한다.

물에 빠진 아버지를 몽운사 스님이 구해주게 되고, 공양미 삼백 석만 있으면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에 부처님께 덜컥 시주 약속을 하게 된다.

부처님과의 약속 때문에 전전긍긍 하는 아버지를 안타까워 하던 청이는 쌀 삼백 석에 장사꾼들에게 팔려가게 되고 종내는 왕비가 된다.

그 후 맹인 잔치에서 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시주한 효력인지 아버지는 눈을 뜨게 되고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입을 통해 들은 심청이는  천사 같은 맘씨를 가진 효녀였다.

하지만 속이들만큼 들어 읽은 심청전은 나를 답답하게 했다.

무능한 심봉사와 기약도 없는 약속에 제 목숨을 던지는 심청이 미련스럽기만 했다.

아무리 앞 못 보는 아버지라고 해도 15살꽃다운 나이의 딸이 장사꾼들을 따라 죽으러 가는 걸 막지 못하는 아버지라는 사람이 미웠고, 아무리 부처님 전에 한 약속이더라도 그걸 지키겠다고 나서는 심청이도 바보스러웠다.

차라리 아버지와 힘들더라도 열심히 사는 모습이 진정 효녀가 아니가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자식을 낳아 기르는 부모가 된 후 15살 또 다른  모습의 청이를 만나게 되었다.

아버지를 눈 뜨게 해야겠다는 마음보다 빛 고운 치마에 넋을 빼앗기고, 인당수 푸른 물에 단번에 뛰어들지 못하고 엄마를 찾는 모습은 효녀 심청이 아닌 인간 심청을 만날 수 있다.

모든 이가 떠받들고 우러러 보는 걸 즐거워하고, 안락하고 편안한 생활에 행복해 하며 주인집 도련님께 연정을 품는  딱 그 나이의 소녀의 모습은 안타까움보다는 미소를 머금게 한다.

연꽃아씨로 추앙 받으면서도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날까 불안해하고 아직도 눈 못 뜨고 비럭질 하는 아버지를 본 순간 자식이기에 느끼는 연민과 가난한 옛날로 돌아가는 게 두려워 자신이 진짜 연꽃아씨라고 혼자서 외치는 모습은 짠해지게 한다.

“못된 딸년은 이 늙은 아비를 버리고 죽어 버렸어요.” 아버지의 엉뚱한  말에 파르르 떨며 사실을 말하는 청이가 더 이상 사실을 숨기느라 괴로워하지 않을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귀한 연꽃 아씨가 아닌 눈 먼 거지의 딸로 밝혀진 이상 대감댁에서의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은 거라는 생각에 아버지와 고향으로 달려가는 청이 여전사와 닮아 있어 기분이 좋아진다.


기존의 이야기를 전혀 새로운 시선으로 보는 이형진의 옛이야기 시리즈는  새로운 주인공을 만나는 기쁨을 전해준다.

전편의 <끝지>에서도 자신을 길러준 가족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슬픈 여우누이에 사연을 단색의 그림으로 만천하에 공개하더니 이번엔 비단치마가 입고 싶어 장사꾼을 따라간 청이를 만나게 해 주었다.

앞으로 잘 알고 있는 옛이야기 속 어떤 주인공들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등장할지 기대해 보며 지금쯤은 산비탈 밭에서 아버지와 농사지으며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고 있을 청이에게 박수를 보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