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씨구 절씨구 풍년이 왔네 - 제1권 홍성찬 할아버지와 함께 떠나는 민속.풍물화 기행 1
원동은 지음 / 재미마주 / 2006년 1월
평점 :
품절


 

  결코 서두르지 않고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을 띤 재미마주출판사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출판사중 하나이다.

그런 재미마주에서 새로운 책이 나왔다.

바로 우리나라 1세대 일러스트레이터인 홍성찬 할아버지와 함께 떠나는 민속.풍물화 기행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인 “얼씨구 절씨구 풍년이 왔네”이다.

옛 시골 마을의 정취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수묵화는 화려한 그림에 익숙해져 있는 나에게 포근한 고향의 정취를 그대로 느끼게 해 준다.


70년대 농촌은 동네에 텔레비전이라고는 한두 대가 전부였고, 김일의 레슬링 경기나  박찬희의 권투중계도 전부 온 동네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 봤던 기억이 있다.

가을이면 새로 이엉을 얻은 노란 초가지붕과 회색의 슬레이트 지붕이 공존하던 시대였었고, 새벽종이 울리면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던 시절이었다.

사실 책은 내가 때어나기 훨씬 전의 농촌모습을 담고 있지만 읽는 내내 내가 살던 시절에 어른들이 옷만 다르게 입고 등장한 느낌을 받았다.


농사를 제일로 치던 시절 조상님들은 일 년을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정한 24절기에 맞추어 하루하루를 생활해 나가셨다.

설 쇠고 처음 맞는 절기인 입춘을 시작으로 겨울동안 잘 먹인 황소로 쟁기질을 하는 걸로 한해 농사일을 시작하셨다.

한 겨울 밟아주던 보리는 겨우 내내 보리 국으로 입맛을 돋우었고 봄철 보릿고개를 무사히 넘길 수 있는 보물이었다.

일 잘하고 들꽃같이 튼실한 것을 제일로 쳤던 농촌의 아낙들도 길쌈 하랴, 장 담그랴, 누에 치랴, 한시도 쉴 짬이 없다.


음력 4월이면 부지깽이도 덤빈다는 바쁜 모내기철이 기다리고 있다.

지금이야 이양기가 있어 사람 손이 많이 필요치 않지만 그때는 온 동네가 들썩거리던 시절이었다.

일꾼들의 가족뿐만이 아니라 지나가던 길손까지 불러 새참을 먹었으니 그 때의 인심은 있고 없고 와는 상관이 없었던 듯하다.

내 어린 시절에도 품삯을 받고 일하는 게 아니라 모든 농사일은 품앗이로 이루어지는 게 많아서 모내기한 집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돼지고기 숭덩숭덩 넣고 끓였던 김치 국이며 무 깔고 지졌던 매콤한 갈치조림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칠십이 넘으셨던 할머니는 호미 한 자루 들고 밭으로 나가 매도, 매도 끝이 없던 김을 매시고는 저녁때면 허리가 꼬부랑해서 들어오셨다.

농사꾼들에게 잡초야 말로 타는 여름에 치러야 할 가장 큰 전쟁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참외서리며 콩서리로 더위를 잊기도 했다.


가을이 오면 수확에 기쁨에 온 마을이 춤을 추었고 찬바람이 불기 전에 벼 타작이며 수수, 조, 콩, 옥수수등과 대추, 밤, 사과, 배 ,감등의 가을걷이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농사일이 얼추 끝나면 아낙들은 김장 때문에 정신이 없었고, 온 집안 식구가 나서 새 창호지를 바르고, 구두질과 매흙질을 하며 겨울채비를 했었다.

지금이야 찾아볼 수 없는 초가집의 새 이엉을 얻고 나면 일  년 내내 일에 혹사한 몸을 쉴 만도 한데 기직자리 매기, 짚신 삼기, 새끼 꼬기로 내년을 기약했다.


책 속에는 쟁기나 똥 장군 같은 옛 농촌의 풍경만이 아니라  따로 개똥삼태기가 있어 첫 새벽에  개똥을  주우러 다녔다는 농부에 근면함을 엿볼 수 있는 재미난 이야기도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 같은 속담을 비롯해 겉모양은 훌륭하고 속에 든 것이 형편없을 때 이르는 말인 “명주 자루에 개똥”이라는 재미있는 속담들도 보너스로 소개한다.

고루하고 재미없는 농업박물관 체험서 같은 책이 아닌 살아있는 조상의 모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지금도 쟁기질 후 새참으로 내간 막걸리를 쭉 들이키시며 한없이 행복한 표정의 담배한대 때우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비가 안 와도 비가 내려도 밤 새 못 주무셨는데 지금은 수로가 생기고 물 걱정 없고 기계 때문에 일손 걱정 없는 농촌이다. 

하지만 그리운 건 누구네 자식이 서리 해 갔는지 짐작하시면서도 큰 소리 내지 않던 어른들이 살아계시던 농촌이다.

가을이면 빗물에 썩고 햇볕에 바란 이엉을 걷어내고, 동네 어른들이 힘을 모아 노랗고 따뜻한 새 이엉을 얻은 그런 일 년에 한 번씩 새로워지는 둥그런 초가집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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