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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소리 없는 날 ㅣ 동화 보물창고 3
A. 노르덴 지음, 정진희 그림, 배정희 옮김 / 보물창고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과 관심 없이도 잔소리를 할 수 있을까? 아침부터 남편을 깨우며 ""그러게, 저녁에 좀 일찍 들어와서 자면 좀 좋아""라는 잔소리부터 시작해서 출근하는 뒤통수에 대고는 ""오늘은 제발 일찍 좀 들어와서 애들하고 놀아주고 운전 조심해"" 라고 했다. 남편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일찍 들어오고 싶을 것이고 출근길에도 조심해서 운전했을 것이다.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아이들을 깨운다. ""방학이라고 이렇게 늦잠이야? 얼른 일어나. 이 깨끗이 닦고, 세수도 이쪽 저쪽 목도 좀 닦고, 밥 흘리지마. 반찬도 골고루……. ""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난 하루 종일 아이들 뒤를 따라 다니며 텔레비전 좀 그만 봐라. 컴퓨터 게임 또 하는 거야? 피아노학원에서 까불지 말아라. 동생하고 싸우지 마라. 장난감 좀 치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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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시작된 잔소리는 아이들이 잠들 때까지 계속된다. 습관처럼 하는 내 잔소리에 아이들도 지쳤는지 잔소리 좀 그만 하라고 한다. 난 기다렸다는 듯 제발 엄마도 잔소리 안하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응수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잔소리가 없어진다면 모두의 바람대로 행복해 질까?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지긋지긋한 잔소리가 하루쯤 없어진다면 상상만 해도 신나는 일일 것이다.
일요일 저녁 푸셀은 용감하게도 부모님께 이젠 잔소리는 더 이상 듣기 싫다고 잔소리 없는 날을 제안한다. 한편으론 놀라지만 엄마 아빠도 푸셀의 의견을 받아들여 8월11일 월요일 하루 동안하고 싶은 건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잔소리 없는 날'로 정한다.
일어나자마자 이도 닦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고 아침으로는 자두잼을 마음껏 퍼먹기도 한다. 하지만 잔소리를 하지 않기로 약속한 부모는 그냥 지켜 볼 수밖에 없다. 학교에도 안 갈까 하다가 친구 올레에게 이 놀라운 사실을 자랑하기 위해 간다. 부모님이 잔소리를 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지키는가 테스트해 보기 위해 무단으로 조퇴하고는 오디오를 사러간다. 하지만 그 일은 나이가 너무 어려서 실패하고 집으로 일찍 돌아 온 푸셀에게 엄마 아빠는 한마디의 잔소리도 하지 않는다.
잔소리 없는 날을 만끽하고 싶은 푸셀은 파티를 계획하고 친구들을 초대하려 하지만 약속되어 있지 않던 파티에는 한 명도 올 수 없게 된다. 직접 거리로 나가 보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에 파티에 참석할 사람은 없었다. 단 한 명 술주정뱅이 아우구스트씨만이 참석하게 되지만 그는 곧바로 잠들어 버리고 만다. 푸셀에 파티에는 엄마만이 유일한 손님이 된다. 집에 돌아오신 아빠도 잔소리 없이 술주정뱅이 아저씨를 친절히 대하고 집에까지 바래다준다.
저녁이 되자 엄마 아빠는 잔소리 없는 날이 드디어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푸셀은 마지막으로 공원에서 텐트를 치고 단짝 올레와 자정까지 시간을 보내겠다고 한다. 올레와 함께 아무도 없는 공원에서 밤을 보내기는 쉽지 않고 점점 무서움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벤치에 앉아 있는 그림자가 귀신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용기를 내서 다가가 보니 아이들의 야영이 걱정되어서 따라 왔지만 잔소리를 할 수도 없고 방해를 할 수도 없어 아이들 모르게 지키고 있었던 푸셀의 아빠였던 것이다.
잔소리 못하게 된 부모는 잔소리를 할 때보다 보이지는 않지만 더 조심스러운 눈길로 아이를 살펴야 하고 잔소리가 없어진 아이도 자유 뒤에 오는 책임 때문에 즐겁지 만은 않은 모양이다. 잔소리는 사랑하고 있고 널 항상 지켜보고 있어 라는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이 책 한 권으로 한순간 잔소리를 안 하는 엄마나 엄마 잔소리를 사랑에 외침으로 좋게 들어주는 아이로 변하지는 않겠지만 잔소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과연 나도 잔소리를 멈추고 지켜볼 수만 있을까? 아이는 잔소리 없는 날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며 보내는 하루를 원 했던 것이 아닐까? 한없는 아량으로 푸셀을 지켜보는 부모에게 존경에 박수를 보내본다. 나도 어린 시절 엄마에게 많은 잔소리를 듣고 컸다.
""동네 어른들 보면 인사해라.""
""학교 갔다 오자마자 숙제해라.""
""맛있는 것 생기면 할머니 먼저 드려라.""
""형제간엔 우애가 최고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 ……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의 잔소리는 나도 모르는 새 내 인생의 지침서가 되 버린 듯 하다. 그때는 엄마 잔소리 좀 안 듣게 얼른 자라서 엄마 그늘을 벗어나고 싶었는데 요즘은 그 잔소리가 그리워진다. 엄마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라도 하면 엄마는 여전히 잔소리를 하신다. 하지만 그 잔소리는 더 이상 이 딸을 향한 잔소리가 아니라 사위 걱정, 손자 걱정에서 하시는 잔소리로 변해 있다. 잔소리를 듣는 입장이 아닌 하는 입장의 엄마와 아내의 이름으로 살다 보니 어린 시절의 엄마 딸이 되어 엄마의 잔소리가 듣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