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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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일 뿐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질문도 하지 않고 특별히 놀란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고개를 까닥했을 뿐이다.” (p239)

나는 작가의 소설을 여러 권 읽었다.
혹여 첫 장을 펼쳤을 때 핍진성이 떨어지는 설정이 나오더라도 굳이 그 이유를 알려고 하거나 놀라지 않은 채 이야기를 따라간다.
그 덕분인지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는 소설도 별다른 거부감 없이 읽었고, 대부분은 호(好)에 가까웠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3년 만에 내놓은 신작 <가호> 역시 꿈인지 현실인지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호가 브라질 밀림에 살던 개미핥기 부부를 만난다.
그리고 그들의 간청으로 무사시사카이로 이사를 가고, 그곳에서 사악한 재규어에 씌인 ‘칼 가는 집’ 주인을 구하기도 한다.

<가호>는 누군가에게 줄거리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복잡한 구조의 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그들의 행동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생각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밖에 없었다.

띠지에 적힌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라는 문구를 보며 주인공 가호가 하루키의 목소리를 전하는 분신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림책 작가인 가호는 소설 속에서 세 편의 그림책을 작업한다.
우리는 그림책을 읽으며 논리적인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설정이 나오더라도 그 합리성이나 인과관계를 따지려 들지 않는다.
어쩌면 작가는 가호가 만드는 그림책을 통해 자신의 소설을 읽는 태도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장 오래 생각이 머문 것은 어머니와 가호의 이야기였다.
어머니는 가호를 이 세상에 있게 해 준 존재이지만, 때로는 서로에게 모질게 대하는 모녀 사이이기도 하다.
어쩌면 건강한 관계를 회복하는 일은 불안한 관계를 깨뜨리는 데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가호가 어머니에게 행했던 행동이 납득이 가기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툭 불거져 나온 기억, 어째서 떠올랐는지 알 수 없는 유년 시절의 풍경, 뜬금없이 스쳐 지나가는 인연 같은 것들이 모여 지금의 나라는 사람이 만들어지듯, 앞뒤가 꼭 맞아떨어지지 않는 하루하루가 모여 인생을 이루는 것이 아닌가 싶다.
모든 장면이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아도 흘러가는 인생처럼, 하루키의 소설은 우리 삶과 닮아 있다.

하루키의 소설은 책을 덮고 난 뒤에도 밀려오는 여러 가지 생각들로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든다.
하지만 나는 작가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릴 것이고, 또 버릇처럼 그의 소설을 읽게 될 것을 잘 알고 있다.
부디 문득 떠오르는 생각과 기억들을 하나하나 직조한 듯한 작가의 소설을 오랫동안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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