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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스콧 스미스 지음, 남문희 옮김 / 비채 / 2026년 4월
평점 :
지난 7월, 비채 1만 기념 책 처방 이벤트가 있었다.
감사하게도 당첨되어 처방전과 함께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는데, 바로 스콧 스미스의 <폐허>다.
‘평생 단 두 권의 소설로 전설이 된 작가‘라는 설명이 있었지만, 나는 여태 이 작가의 존재를 모르고 살았다.
멕시코에서 휴가를 즐기던 두 젊은 커플은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독일인과 말이 통하지 않는 그리스 청년과 함께 독일인의 동생을 찾아 정글 속 유적지로 향한다.
동생이 남긴 지도를 따라가다 우연히 마야인 마을을 만나고, 그들에게 쫓기듯 폐허 같은 유적지에 발을 들이게 된다.
지구 상의 생물 중 가장 무해한 종으로 여겨지던 식물이 지금까지의 이미지를 완전히 깨고 인간을 공격해 온다.
소리와 냄새를 흉내 내고, 생각하고 움직일 줄도 아는 식물은 그것을 이용해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서로 적대하게 만든다.
언덕 위에 고립된 일행의 앞을 정체를 알 수 없는 식물이 가로막고 있고, 마야인들은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다.
말이 통하지 않는 그리스인은 부상을 당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동료의 죽음에 슬퍼할 여유조차 없다. 오히려 그 죽음마저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누군가 자신들을 구하러 올 가능성을 계산하며 고립된 상태에서 먹을 것은 점점 줄어들고, 일행 중 우두머리로 나선 제프의 행동은 때로 잔혹하기까지 하다. 거기에 시시각각 잔인하게 파고드는 식물의 공포와 함께, 극한의 상황에서 조금씩 달라지는 사람들의 모습은 식물만큼이나 두렵다.
무엇보다 섬뜩한 것은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설명이 끝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식물이 왜 인간을 공격하게 되었는지도, 마야인들이 왜 그들이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그토록 막았는지도 알 수 없다.
이유를 알 수 없으니 탈출할 방법조차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저 그들이 처한 공포를 함께 견딜 수밖에 없다.
어쩌면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이 소설을 더욱 공포스럽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비 온 뒤 덩굴손을 뻗어 나가는 덩굴식물을 본 적이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혹시 저 식물이 정말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특히 생태계교란 생물로 지정될 만큼 번식력이 강해 주변의 나무와 풀을 뒤덮고 광합성을 방해해 결국 고사시키는 가시박은 이제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소설을 읽는 내내 스즈키 고지의 <유비쿼터스>가 떠올랐다.
<유비쿼터스>가 전 인류에게 닥친 식물의 공포를 다뤘다면, <폐허>는 언덕에 고립된 개인에 닥친 공포에 집중한다.
공포의 범위는 훨씬 좁지만, 그 강도는 더 크고 잔인하며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색다른 존재에 대한 참신한 공포가 궁금하다면, 또 <유비쿼터스>를 재미있게 읽었다면 꼭 읽어보길 권한다.
그나저나 비채의 책 처방은 최고였다.
진료는 의사에게, 처방은 약사에게, 책 처방은 비채에게 맡기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