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는 텍스티에서 진행한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제공받았습니다.>텍스티 출판사가 새롭게 시작한 HIP 시리즈의 첫 번째 책으로 정보라 작가의 미출간 단편선이 출간되었다. 세 편의 짧은 단편이 실린 얇은 소설집은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판형이라 외출할 때 가볍게 들고 다니기 좋다.‘내 이름을 불러줘’의 세계는 15년간의 혁명이 끝난 뒤 이름 대신 숫자로 불리는 사회다. 여성은 결혼이 아니라 국가가 배정한 남성과 아이를 낳아야 하고, 태어난 아이마저 국가의 소유가 된다.’바늘 자국‘의 마을에서는 20년마다 요물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치고, 표제작 ‘귀야옹 씨의 조그만 상실에 관하여’에서는 길고양이의 시선을 통해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를 비춘다.나는 정보라의 작품을 좋아한다. 말로만 투쟁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 나가 직접 부딪치며 세상의 변화를 위해 행동하는 작가이기에, 그의 소설에는 현장의 목소리가 배어 있다.그래서인지 그의 소설은 SF와 호러, 괴담의 외피를 쓰고 있어도 결국 세상에서 상처받고 밀려난 존재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세 작품의 중심에는 모두 여성 혹은 암컷이 있다. ‘내 이름을 불러줘’의 여성은 가족과 분리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혁명이 끝난 후에도 달라진 것 없는 세상에서 이름조차 잃은 채 사랑 없는 관계 속에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마저 빼앗긴다. ‘바늘 자국’의 소녀 역시 부잣집에 입양되어 부족함 없이 자라지만 결국 친딸을 대신할 제물로 선택된다. 길고양이 귀야옹 씨도 거리에서 낳은 여섯 마리 새끼를 모두 잃는다.흥미로운 것은 그들을 끝내 붙들어 주는 존재들이다. 이름조차 지어주지 못한 채 빼앗긴 아이들, 죽기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살아온 소녀를 끝까지 돌본 몸종 애련처럼, 정보라의 세계에서는 거창한 영웅보다 곁을 지켜주는 존재가 더 큰 의미를 가진다.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꽤 오래전에 쓰였다고 하지만, 읽고 있으면 지금의 정보라 소설이 이미 이 안에 들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배경은 미래이기도 하고 먼 과거이기도 하며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사는 어딘가이기도 하다. 시간이 흘렀어도 약한 존재들이 겪는 고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마지막 장을 덮고 난 뒤에도 오래 남는다. 그래서 이 얇은 소설집의 뒷맛이 유난히 씁쓸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