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의 종교와 신화 속 악마들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만큼 거대한 몸집으로 인간을 꾀어내는 사악한 존재로 그려진다.그러나 김화진 작가가 그린 악마 Z는 ‘손이 작은 축인 여자의 손바닥보다 조금 큰 정도’이며, ‘바퀴벌레와 돈벌레와 거미와 싸워 이겨서 얻은 싱크대 하부장 어둡고 먼지투성이인 곳’에서 살아간다.악마 Z가 머무는 집은 인디밴드에서 피아노를 치던 가영의 집이다. 바이러스가 돌기 시작한 지 1년이 지난 현재, 수입이 0에 가까워진 가영은 아예 집에 틀어박혀 지내고 있다. 그러던 중 유독 가영의 스쿠터가 탐났던 악마 Z는 우연을 가장한 채 가영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소원을 물어본다. 한참을 망설이던 가영이 마침내 뱉은 말은 “소원이…… 없는데요. 잘 죽게 해 주세요”뿐이었다.악마 사회에서조차 패배자에 가까운 악마 Z는 의욕이라곤 없는 인간 가영과 몸을 바꾸고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치열한 경쟁과 등급 체계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악마답지 않게, 인간 사회의 녹록지 않은 현실 속에서 여러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부지런히 살아간다. 심지어 악마 Z의 몸을 하게 된 가영을 돌보기까지 한다.누구보다 인정받는 삶을 원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던 악마 Z는 가영과 몸을 바꾼 후 예상치 못한 일상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가끔 스쿠터를 타고, 어린 시절 악마와의 거래로 사람의 체온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종현과 함께 맛집을 찾아다니며 소소한 온기를 나눈다.소설은 악마 Z와 가영, 그리고 종현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고독과 고통을 따뜻하게 위로한다. 저마다의 어려움을 안고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버텨내는 이들의 진솔한 모습은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우리는 종종 거대한 절망 앞에서 '소원 따윈 없다'며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곤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몸과 삶을 바꾸는 엉뚱한 상상을 통해 오랫동안 외면해 온 내 안의 진짜 목소리를 마주하게 만든다.고립이라는 차가운 방 안에서도 타인과의 스침을 통해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는 이들의 모습은, 결국 상처 입은 우리 모두가 다시 연결될 수 있다는 작고도 단단한 희망을 건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