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 코펜하겐 삼부작 제1권 암실문고
토베 디틀레우센 지음,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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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덴마크의 여성작가 토베 디틀레우센의 회고록 ‘코펜하겐 삼부작‘ 중 첫번째 <어린 시절>. 덴마크 바깥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작가이고, 코펜하겐 3부작 또한 출간 이후 50여년이 지난 시점에 해외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을유문화사 암실문고의 첫 책이기도한 이 책, 책 소개 중 유년 시절의 묘사가 엘레나 페란테를 연상시킨다는 구절에 이끌려 읽게 되었다.

<어린 시절>은 1917년 공장 노동자 아버지와 가정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저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어둡고 건조한 편이다.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린 시절을 다시 되새기고 싶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그때로 되돌아가니 나의 시원을 되짚지 않을 수가 없다‘는 정도의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행간에서는 도서관에서 책을 탐독하고 홀로 시를 적었던 시간에 대한 기쁨이 드문드문 반짝인다. 어둡고 깜깜한 밤하늘에 빛나는 몇 안되는 별처럼, 저자의 고된 어린시절을 밝혀준 순간들이었으리라 짐작한다.

‘아무도 내 시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시를 써야만 한다. 시가 내 마음 속의 슬픔과 갈망을 무디게 만들어 주니까.‘(157p)

저자는 스스로를 이방인이라고 여기고, 막연한 미래를 불안해하면서도 시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여기서 시 쓰기란, 내면 속으로 침잠하여 몽상의 나래를 펼치는 순간까지도 전부 포함한다. 저자의 이야기는 분명 어둡고 무겁지만 괴롭거나 고통스럽기 느껴지지는 않는다. 건조함, 냉정함, 거리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당부분은 시적인 순간에 대한 묘사 때문인듯하다. 어쩌면 이 책에는 ‘지독하다‘는 표현이 가장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끝끝내 견뎌낸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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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비비언 고닉 지음, 서제인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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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앞으로 비비언 고닉 작품은 무조건 찾아 읽어야겠는데. 이 책,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를 다 읽자마자 든 생각이다. 비비언 고닉의 작품이 국내에 소개되는 건 이번이 두번째다. 가장 먼저 소개된 작품은 그의 가장 유명한 회고록이자 애증의 모녀 관계를 다룬 <사나운 애착>. 괜히 트라우마를 건드릴까봐 읽기를 주저했었던 책인데 조만간 읽어야겠다 싶다.



고닉의 글이 가진 특별함은 주변과 자기 자신을 향한 호기심과 세심한 관찰력에 있다. 뉴욕의 거리를 오가며 마주치는 사람들에 대해서, 몇 년간 호텔에서 일하며 만났던 이들에 대해서, 대학에서 만난 동료들에 대해서, 가장 결정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저자는 애정과 관심이 아니었다면 잡아내기 어려웠을 것들을, 이를테면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의 흐름 같은 것들을 예리하게 포착해낸다. 이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외로움, 수치심, 후회 등등 저자의 감정들 또한 숨김없이 드러나있다. ‘내가 하고 있던 이야기는 언제나 나 자신에 관한 것이었다‘(165p)는 말처럼, 저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는 결국 독자의 이야기와도 닿아있다. 우리 안에도 같은 감정들이 자리하고 있으니까. 타인 안에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만을 본다.



가장 좋았던 글은 맨 마지막에 실린 편지 쓰기에 대한 글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언제든 전화를 걸 수 있게 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편지를 쓰지 않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고독하게 쓰기에 몰입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야기하는 내면의 삶‘이 사라져간다는 이야기. 이 책의 출간년도(1996)로부터 26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을 보면 몰입의 시간이 더 줄어들면 줄어들었지 더 늘어나지는 않은 것 같다. 실시간 채팅과 SNS의 시대-영상, 이미지와 더불어 다시금 문자의 시대라고도 볼 수 있는-의 특징은 즉각적이고 즉흥적이라는데 있으니, 심사숙고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글쓰기와는 거리가 있는 셈이다. 저자는 모두가 편지를 쓰지 않는 시대에 내면의 고요함에 다가가려면 분투해야한다고 일갈한다. 일기든 뭐든 써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매번 넷플릭스를 선택해버리곤 하지만, 항상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마치 소란스러움에 대한 반작용처럼 조용히 내면으로 침잠해 그 안애서 맴도는 것들을 표현하고 싶다는 갈망이 점점 커지는 것이다. ‘자신을 온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아 있는 것이야말로 고귀한 일‘(237P)이라는 저자의 마지막 문장을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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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된다는 것
니콜 크라우스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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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아하는 작가 니콜 크라우스의 단편집. 그의 작품들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문장에 있다. 크라우스가 자아내는 문장들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그는 내면의 미세한 균열을 정교하게 그려내고, 기어이 문장 하나하나가 정체성과 삶과 사랑이라는 주제에 닿도록 직조해낸다. 작중 인물들과 그들을 지켜보는 독자들 모두 불가해하고 난해한 삶의 그물 속에서 기어이 사랑을 찾아내도록.



열 편의 단편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 <에르샤디를 보다>. 영화 <체리향기>에서 미스터 바디를 연기한 바로 그 에르샤디 맞다. 무용수인 주인공은 도쿄의 어느 정원에서 에르샤디를 보게 된다. 어쩌면 에르샤디의 모습으로 눈 앞에 현현한 자기 자신을.



이 작품은 영화 <체리향기>와 배우 에르샤디, 주인공과 친구 로미의 이야기가 다층적으로 펼쳐진다는 점에서 무척 매력적이다. 또, 영화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에르샤디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결국 주인공 자신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각별하다. 작품의 말미에 주인공은 ‘에르샤디로부터 무언가를 포착하고 싶은 욕망. 현실이 나를 위해 팽창했고 다른 세상이 다가와 나를 건드렸다고 느끼고 싶은 욕망 때문에 내 상태를 더 빨리 자각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결국 외부 현실의 징후들은 내면을 드러내는 장치인 셈이다. 이 과정이 영화 <체리향기>의 줄거리를 빌어 꽤 아름답게 드러난다.



다음으로 좋았던 단편은 <스위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폭력적 관계에 자신을 내맡기고 벼랑 끝까지 다녀오는‘ 한 소녀에 대한 이야기다. 소녀는 ‘자신을 벼랑 끝까지 밀어붙이며 어둠 혹은 두려움과 맞붙어 이긴 사람의 품위‘를 가졌다.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기어이 벼랑 끝으로 스스로를 내모는 소녀. 이런 류의 이야기는 거부하는 것이 더 힘들다.



니콜 크라우스의 전작들로는 <사랑의 역사>, <위대한 집>, <어두운 숲>이 있다. 가장 좋아하는 건 단연 <어두운 숲>. 그렇지만 아직 그의 작품들을 만나보지 않은 운 좋은 독자라면 최신작이자 첫 단편집인 이 책 <남자가 된다는 것>으로 가볍게 시작해보는 것도 좋을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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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너머 어렴풋이
신유진 지음 / 시간의흐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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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층 빌딩 사무실에서 통유리창 너머로 도시의 정경은 실컷 보지만 정작 내 마음의 창은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는 요즘. 틈이 날 때마다 이 책을 들고 카페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창문 너머 어렴풋이>.

보통 책을 읽으면 전반적인 분위기나 흐름으로 감상이 정리되곤 하는데, 유독 특정한 문장이나 챕터가 마음을 사로잡을 때가 있다. 이 책에서는 ‘그 여름의 끝‘이라는 글을 여러 번 읽었다. 어느 여름의 끝에 십 대 후반을 함께 보낸 친구와 재회하는 이야기. 이 글은 고여 있는 시간과 새롭게 흐르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고,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좋아하는 것들과, 우정과, 다정함이 가득 흘러서 마치 이 글의 일부가 되고 싶은 마음으로 푹 빠져들어 읽었다. 작가님의 글은 다정하다. 유연하기도 하고 강인하기도 하고 조금은 쓸쓸하기도 한 다정함. 그래서 더 좋은.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사랑이 느껴진다. 창을 여는 일도, 글을 쓰는 일도, 살아가는 일도 결국 사랑의 힘으로. 사랑이 있다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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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의 고수 - 신 변호사의 법조 인사이드 스토리
신주영 지음 / 솔출판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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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재미있는 법정 에세이라니. 법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면 어렵고 무겁겠거니 싶겠지만 이 책은 다르다. 판사나 변호사, 의뢰인과 나눈 대화와 속마음이 흥미진진하게 쓰여져 있어,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읽어나가게 되는 책이다. (실제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원작 에피소드가 실려있는 책이기도 하다. 비교하며 읽어보면 재미 2배.) 사실 법은 재미없고 딱딱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과 밀접하게 닿아있는 것이다. 결국 법정사건은 사람 사이의 일이고, 재판도 사람의 일이다. 신주영 변호사의 <법정의 고수>는 법정에 선 변호사와 판사의 마음을 중심으로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비교적 일상적인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는 드라마화되기도한 제2자유로 도로구역결정 취소소송 사건이다. 마을 주민들이 행정부를 상대로 건 소송인데, 책 속 상당부분이 이 사건에 할애되어있다. 이 사건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어떻게든 재판의 판도를 바꿔보려는 저자의 치열함과 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명쾌한 판결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부분 때문이기도 하다. 저자는 ‘본래 판단하는 것은 칼로 자르는 것이기에 재판은 아프지만, 정의롭고 합리적인 판결은 당시자들을 속시원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패소하는 경우에도 말이다. 이상하게도 이 부분을 읽으면서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거듭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판장에 서는 궁극적인 이유는 마음의 찌꺼기를 없애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리고 그건 승소나 패소와는 크게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판사의 마음, 변호사의 마음, 원고와 피고의 마음. 재판장은 법이라는 기준 아래 치열한 공방이 오가는 곳이지만, 수많은 마음이 깃들어있는 곳이기도 한 것 같다.

책의 시작과 끝에는 선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 모두는 어디에 서 있든 선택의 여지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순간 짐의 무게는 가벼워지며 성장하게 된다고. 사건을 수임하느냐 마느냐 선택권이 사실상 없다는 변호사의 경우에도,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인 이야기다. 결국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이 우리의 인생을 구성하고, 그 사건들 중 일부는 법정에 선다. 그러니까 이 책은 사람 살아가는 일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이번 개정판을 시작으로 2,3편이 출간 예정이라는 소식이 단비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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