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자유 - 김인환 산문집
김인환 지음 / 난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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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문학, 인물, 예술 등 광범위한 지식을 탐구하는데 쏟아온 김인환 평론가의 산문집 <타인의 자유>. 총 11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이 책은 각 챕터마다 독서, 동학, 중세철학, 불교, 팝 음악 등 하나의 주제를 깊게 파고든다. 솔직히 말하자면 읽기 쉽지 않았다. 문장이 어렵지는 않으나 문장 간 사유의 폭이 촘촘하여 책을 읽는 내내 쏟아지는 폭포를 그대로 맞는 것 같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글은 단연 ‘독서의 가치‘다. 얼마 전 버지니아 울프의 산문을 읽고 고전을 더 열심히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던 터라(<지난날의 스케치>) 이 글이 더 마음에 와닿았는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한 권 한 권을 천천히 공들여 읽는 독서이며 옆으로 확장되는 맥락의 독서다. 요즘 나는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독서와 공부를 위한 독서를 구분하려는 참인데, 저자의 글은 특히 후자의 독서법을 구체화하는데 있어 새겨들을만했다. ‘창조적 직관을 함양하는데 필요한 독서‘를 위하여.



그런가 하면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을 다룬 ‘릴케의 천사‘ 챕터도 재미있게 읽었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토마스 아퀴나스의 천사학부터 기독교-이슬람교의 전통을 거쳐 중세와 근대의 상호 조명까지 논하고 있다. 이제껏 나는 릴케를 제대로 읽고 있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당장이라도 중근대 역사와 철학을 파헤쳐야만 할 것 같은 투지가 불타올랐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앎을 향한 투지.



책장을 덮고 나서야 띠지에 적힌 ‘공부의 모자람을 알게 하여 자유롭게 공부하게 만드는 책‘이라는 문구의 의미를 알 것 같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 책과 저 책을 넘나들고, 잔뜩 메모를 적고, 새벽 서너시쯤 어떤 깨달음으로 정신이 맑아지는 순간을 다시 겪고 싶어진다. 이대로 무지해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이 바짝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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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장소, 환대 현대의 지성 159
김현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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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이 나왔다는 소식에 겸사겸사 구매해서 다시 읽은 책, <사람, 장소, 환대>. 2015년 출간 이후 많은 호평을 받아왔으며 이후 다수의 책에 심심치않게 인용되고 있는 화제의 책. 제목 그대로 사람, 장소, 환대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사회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다룬 인문서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한다. 타인과 사회에게 받아들여지고 싶어한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환대받는다는 것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대받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즉,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는 노예가, 오늘날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여성이 그러하다. (본문에 더 많은 범주들이 소개되어있다.) 저자는 제목의 세 가지 키워드를 놓치지 않으면서 노련하고 가뿐하게 오늘날 사회의 취약한 지점을 짚어낸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무너뜨리고 있는 가치들에 대해서 말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절대적 환대라는 개념이 불가능해보일지라도 그것을 지향해야 한다는 취지의 문장이었다. (완벽한 민주주의 사회는 도래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 가능성을 꿈꾸며 살아가듯이!) 세상은 더 나은 쪽으로 바뀌어야만 한다는 정혜윤의 문장(<아무튼, 메모>)도 함께 생각났다. 브렉시트 이후 각종 혐오와 포퓰리즘이 만연한 근미래를 그려낸 영국 드라마 <이어즈 앤 이어즈>의 장면들도 스쳐지나갔다. 거듭 생각하는 바이지만, 혐오와 배제는 결코 답이 될 수 없다. 오늘날 한 개인은 소수자성과 특권을 동시에 가진다. 그러니 내가 살고 남이 살기 위해서는 환대라는 단어를 새길 필요가 있지 않을까.



다양한 참고 자료와 예시들이 함께 수록되어있어 어렵지 않게 읽혔다. 담고 있는 내용이 풍부하고 유익한만큼 공부하듯이 정리하면서 아예 외워버려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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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괜찮아
니나 라쿠르 지음, 이진 옮김 / 든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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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 작가 누구야? 절반쯤 읽고 저자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온갖 정보를 쓸어담았다. 아직 국내에 번역 출간되지 않은 다른 책들의 제목도 메모장에 휘갈겼다.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저자의 전작을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담았다.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는 찬사를 받은 소설이라기에 기대 반 의심 반 상태로 펼쳐들었는데 읽고 나니 과연 찬사를 받을만한 소설이었다.



주인공 마린은 뉴욕의 대학 기숙사에서 홀로 메이블을 기다리고 있다. 마린과 메이블은 둘도 없는 친구였고 어쩌면 막 연인이 되려는 참이었다. 그러니까 마린의 할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후 마린은 모든 연락을 끊고 학기 시작 전에 무작정 뉴욕으로 도망쳐버렸다. 그리고 몇 달이 흘렀다. 이윽고 소설의 첫 챕터에서 마린은 몇 달 만에 메이블을 마주하게될 참이다. 소설은 마린와 메이블의 재회가 이루어지는 크리스마스 언저리의 현재와 마린과 할아버지가 단 둘이 살았던 과거가 교차되며 진행된다. 그 사이의 빈 시간, 그러니까 마린이 겪어야 했던 일들과 마린과 메이블의 복잡한 관계는 서서히 드러난다. 매력적인 서사 구조다.



책을 읽으며 가장 황홀함을 느끼는 순간은 나의 감정을 대변해주는 언어를 찾았을 때다. <우린 괜찮아>가 내게 바로그런 책이었다. 마린에게 일어난 일과 나에게 일어난 일은 다르지만 마린이 느끼는 불안과 고독, 슬픔만큼은 조금 안다고 말할 수 있다. 불과 일 이년 전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나는 영영 헤어나올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을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 회피하는 것, 상대의 호의를 받아들이고 싶으면서도 애써 거절하는 것…. 모두 뼛속까지 익숙하다. 그리고 <나사의 회전>, <백년 동안의 고독>, <제인 에어>, 실비아 플라스를 사랑하는 소녀라니!



어른이 되려는 찰나 몰아닥친 비극과 우정과 사랑의 경계에 놓인 소중한 관계. 이 두 가지가 씨실과 날실처럼 소설의 두가지 축을 이룬다. <우린 괜찮아>는 성장 소설이며 전형적이지 않은 퀴어 소설이다.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감정 묘사가 뛰어난 수작이다. 더불어 결정적이고 깔끔한 마무리까지! 이건 비밀인데 사실 끝까지 읽고 나서 다시 앞으로 돌아가 한 번 더 읽었다. 상황을 전부 파악하고 다시 읽으니 더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연달아 두 번 읽고도 재미있다니.



<리틀 라이프>를 아끼는 만큼 이 책, <우린 괜찮아>를 아끼게 될 것 같다.



(*서평단 활동으로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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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시간 - 느리게 사는 지혜에 관하여
토마스 기르스트 지음, 이덕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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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일과중 가장 즐거운 시간은 해 질 녘 집 근처 강변을 짧게 산책할 때다. 외출을 하지 못해 답답하던 차에 궁여지책으로 인적드문 강변이라도 걸어보기로 한 것인데, 이제는 아침부터 손꼽아 기다리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다이어리에 빼곡히 적힌 할 일을 잠시 미뤄두고, 온갖 SNS를 넘나드는 일도 멈추고 그저 천천히 걷는다. 흐르는 물과 타오르며 지는 해와 흔들거리는 나무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하루 중 유일하게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순간이다.



<세상의 모든 시간>은 시간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책이다. 오랜 시간을 들여 완성한 것들, 즉 느림, 끈기, 사색의 결과물들을 소개하며 그것을 예찬하는 책이다. 책을 읽는 속도가 빨라 한 번 손에 들면 휘리릭 읽어버리는 나지만, 이 책만큼은 천천히 아껴가며 읽었다. 그렇게 읽는 것이 어울리는 책이다.



저자는 미술, 수학,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시간이 소요되는 일들을 꼽아 소개하고 있다. 우체부가 33년동안 만든 성, 수 백년간 미결로 남았던 수학 문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세계에서 가장 긴 오르간 연주! 가장 재미있었던 챕터는 ‘눈 위의 흔적‘이었는데, 작가 로베르트 발저의 깨알같은 손글씨와 그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이야기다. 해독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그의 깨알같은 손글씨가 20년동안의 해독과정을 거쳐 책으로 출간되었다는 일화는 언제 들어도 놀랍다.



빠름은 좋다. 그러나 느림은 더 좋다.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더 좋다. 속도에 치이는 초연결 사회를 살고 있는 오늘날, 더더욱 시간을 재조명하는 일이 필요한 이유다.





(*서평단 활동으로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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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 나와 당신을 돌보는 글쓰기 수업
홍승은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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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는 것은 그러니까 서사를 가진다는 것은 아주 오랫동안 권력층의 특권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약자와 소수자의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왕왕 잊곤 한다. 하지만 대개 인식의 확장은 역사의 가장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일 때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끊임없이 사회 주변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배움, 독서)



더 나아가 ‘직접 나의 이야기를 쓰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이 바로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다. 저자는 개인적인 삶을 글쓰기로 옮겨온 지난날들의 기록과 글쓰기 공동체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글쓰기가 가진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히 저자는 글을 통해 개인의 구체적인 서사가 이야기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그가 페미니즘이 글쓰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소하다하여 기록되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는 없었던 일이 되어버리므로. 이 부분을 읽을 때 은유의 <글쓰기의 최전선>과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



내가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을 직시하는 일이다. 또한 내가 나를 안다는 것은 받아들임과 마음챙김과도 큰 관계가 있다. 저자가 어머니, 동생과 함께 매일 아침 15분동안 글쓰기를 하며 겪었던 변화를 다룬 일화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망설임없이 이야기를 적어내려가는 어머니의 모습, 그 이야기들을 낭독하며 다함께 흘렸던 눈물들. 삶에서부터 뻗어나온 글쓰기와 그것을 경청하며 공감해주는 사람들, 어쩌면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제대로 알고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리고 나와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손을 잡기 위해서. ​



‘글쓰기는 내 이야기가 단지 사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 사소하지 않다는 것, 내가 경험한 고통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폭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걸 각성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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