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릴 수 있었던 여자들. 마음이 철렁하는 제목이다. 그럼에도 올해 가장 읽기 잘 한 책이 있다면 바로 이 책이 아닐까 싶다. <살릴 수 있었던 여자들>은 살인사건으로 이어지는 가정폭력의 실태를 그 내부에서 치열하게 조망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작품이다. 가정폭력은 소수에게만 벌어지는 일 아니냐고? 착각이다. 전세계에서 가정폭력으로 목숨을 잃는 여성이 하루 평균 137명이다. ‘가정폭력은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가장 긴급한 공중보건의 문제다.’(32p) 이 책은 모두가 읽어야만 한다.전 세계에서 수많은 여자들이 가정폭력으로 죽어간다. 그런데 왜 가정폭력은 공론화되지 않을까? 정말로 가해자와 피해자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걸까? 저자는 사건의 심장부로 들어간다. 그는 피해자가 왜 마지막에 이르러 가해자를 보호하는지, 잠재적인 살인을 예고하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가해자와 피해자의 매커니즘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이야기한다.취재는 폭력적인 남성이 비폭력을 배울 수 있는지, 어떻게하면 가정폭력이 살인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지까지 이어진다. 그가 집요하게 밝혀낸 현실은 충격적이다. 너무도 많은 여자들이 고통받으며 죽어간다. 너무도 많은 남자들이 ‘폭력적인 남성성’의 지배에 굴복하여 가해자가 된다. 책 전체를 끝없이 관통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어떻게 하면 가정폭력으로 살해된 여자들을 살릴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다르게도 말할 수 있다. 어떻게하면 집에서 가정폭력을 몰아내고 다시 안전을 되찾을 수 있을까? 먼저 문제의 핵심을 알아야한다. 가정폭력은 결코 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있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그러니 부디 모두가 가정폭력의 심각성에 관심을 기울이기를. 이 엄청난 책이 그 시작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가성비’ 높은 공부는 이런 책을 읽는 것이다.’(정희진)www.instagram.com/vivian_books
구묘진이 살아있었으면 어땠을까. 끈질기게 삶을 계속했더라면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그린 소설을 읽을 수도 있었을까. 구묘진은 스물 여섯의 나이에 자살했고 소설 속 화자 또한 죽음을 선택했다. 아무리 자전적인 소설이라지만 작가와 화자를 분리하기가 쉽지 않다. 타이완 퀴어 문학계의 전설적인 존재, 구묘진의 유작 <몽마르트르 유서>. 강렬하고 매혹적인 작품이다. 끈덕지게 배어나는 사랑, 우울, 죽음의 향기. 물론 그중에서도 제일은 사랑이다. 소설은 여러 실험적인 형식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파리에 남은 주인공 조에가 타이베이로 떠난 연인 솜에게 쓴 편지들이 주를 이룬다. 그의 문장은 관능적이고 애절하며 동시에 철학적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방식은 모두 네게 지도록 허락하는 것이다”(117p) 이 사랑의 밀도높은 순수함과 비극성 앞에서는 무릎꿇을 수밖에 없다. “결국 내가 죽는다면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마지막 화해이며, 혐오와 뒤엉킨 내 깊은 사랑과의 마지막 화해인 것이다. 또한 솜의 삶과 화해하는 마지막 방식이다.”(107p)가능하다면 소설 속으로 뛰어들어가 비극의 장막을 걷어주고 싶다. 예정된 끝을 찢어버리고 다시 쓰고 싶다. 어떤 이의 사랑은 뼛속 깊이 솔직해진들 이루어질 수 없어서 결국 죽음으로 완결되어야(재시작되어야) 함을 안다. 그러나 세상이 동성 간의 사랑을 배척하지 않았더라도 그러했을까. <악어노트>를 읽고서도 그랬듯 이번 책에서도 한동안 빠져나오기 힘들 것 같다. 구묘진이 남긴 모든 글을 읽고 싶다.www.instagram.com/vivian_books
인생은 속도전이 아니라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나 자신을 다른이들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속도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누구보다 빠르게 누구보다 멋진 성공을 이루어야 할 것만 같다. 저들은 저만치 앞에서 달리고 있는데 왜 나는 계속해서 뒤쳐지는가? 매일이 조급하고 불안하다. 그런데 여기, 대학 입학도, 취업 준비도, 앵커 오디션도 끝없는 도전 끝에 겨우 성공한 사람이 있다. ‘속도를 기준으로 본다면 나는 패배자다‘라고 말하는 그는 ‘그럼에도 나의 경쟁력은 한 번에 되지 않는다는 거였다‘라고 담담히 고백한다. 꿈을 이루는데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믿음과 기다림이라고 말하는 김경호 앵커의 에세이 <한 번에 되지 않는 사람>.뭘 해도 한 번에 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를 믿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다. 쉽게 얻은 사람들은 절대 알 수 없는 기쁨과 감사함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다. 저자는 그동안의 실패와 도전의 역사를 한보따리 풀어놓으며 그럼에도 ‘자기 자신의 속도를 믿고 나아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오래 걸린다는 말은 상대적이다. 나 자신과 꿈, 두 가지만 떼어놓고 보면 속도의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 계속해서 꿈을 품고 살아간다는 한 가지 옵션만이 남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단 한 순간도 꿈을 내려놓은 적이 없다는, 게다가 꿈은 가능성과 상관없이 소망할 수 있는 것이라는 그의 말에는 힘이 있다. 그런가하면 책 속에서는 소심하고 낯가림 심한 사람의 사회생활 경험담도 만나볼 수 있다. 저자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직접 겪은 일화들이 솔직하게 수록되어 있는 만큼 무척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었다. 싫은 소리를 잘 하지 못하는 내향적인 사람이라면 신나게 읽을만한 구절들이 가득하다. 일방적인 조언이 아닌 자신의 경험을 소탈하게 풀어내고 있어 좋았다. 그러니까 책의 전반부에는 꿈을 가진 사람들에게 보내는 응원이, 후반부에는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이 담겨있는 셈이다. 유독 마음에 남는 구절이 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바뀐 세상이 무엇을 요구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내가 스스로 꿈에 선을 그을 필요는 없다.‘는말. 남들보다 뒤쳐지는 것 같아 좌절하는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격려.
여성학자 정희진의 글쓰기 세번째 책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저자의 책은 전부 주저없이 구매한다. 데일듯 뜨거운 저자의 사유와 문장은 나로 하여금 끝없이 배우고 공부해서 어제보다 오늘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한다. 아마 저자의 책에는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들 중 가장 많은 밑줄과 가장 많은 메모가 적혀있을 것이다. 때로는 수긍하고 때로는 반박한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의 다짐은 항상 같다. 어떤 삶을 살든 읽고 쓰는 것만이 살 길이다. 어제의 나를 오늘의 내가 갱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번 책에는 스물 일곱 편의 서평이 실려있다. 책의 서두에 실린 ‘또 다른 창작, 서평‘이라는 글이 인상적이다. 저자는 ‘창작으로서의 비평, 예술로서의 비평을 지향하는 나는 서평과 그 외 글을 구분하지 않는다‘고 밝히며, 본문 다시쓰기가 아닌 창작이자 새로운 이야기로서의 서평을, 글쓴이의 또렷한 입장이 담긴 글쓰기를 이야기한다. 과연 내가 그의 서평을 찾아읽는 이유도 새로운 책을 알기 위함이 아니라 글 자체에 담긴 사유 때문이 아니던가. 같은 책도 누가 읽느냐에 따라 그 감상과 해석이 달라진다. ‘독후감은 개인의 맥락에서 읽혀야 한다. 다시 말해 서평을 쓴 사람은 한 사람의 독자일 뿐 독자를 대변하는 길잡이가 아니다.‘(220p) 책을 읽고 난 뒤에 그것을 나의 것으로 온전히 체화하고 내보내는 과정이 나에게도 필요함을 절실하게 깨달았다.저자의 ‘편파적인 독서‘는 인간의 몸과 고통, 권력, 젠더에 관한 사유와 글쓰기로 이어진다. ‘정치적, 이론적, 학문적으로 다른 어떤 언설보다 세련되고 앞서 있으며 상상력조차 뛰어넘는 참신한 문제의식과 질문을 던지는 사상 체계‘(146p)인 페미니즘을 기반으로 그가 써내려간 글은 그 자체로 ‘공부‘가 된다. 사실 최근 몇 달간 나는 기존의 통념을 뒤흔드는 ‘전압이 높은 책‘을 의도적으로 회피해왔다. 단적으로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담긴 책들. 구체적인 개인의 이야기가 주는 울림은 더없이 크지만 그만큼 거리두기가 어려워 몸과 마음이 고통스럽다. 그런데 이 서평집을 읽으면서 다시 치열하게 읽고 쓰기를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대로 읽고 내 언어로 써야 한다는 생각. 물론 나에게도 공부의 출발점은 페미니즘이다. 페미니즘이야말로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이며 내가 가진 인식의 틀을 계속해서 부수고 확장시키는 가장 멋진 도구이기에.www.instagram.com/vivian_books
(*도서협찬)자연 앞에서 말은 거추장스러운 것에 불과하다. 자연과의 대화는 말 없이 이루어진다. 필수불가결한 침묵.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읽으면서 나는 인간의 말소리가 소거된, 자연의 풍경과 소리로 가득한 시적인 다큐멘터리를 떠올렸다. 노르웨이의 작가 로이 야콥센의 대표작으로 2017년 맨부커 국제상을 수상하기도 한 이 소설에는 비뢰이 섬에 사는 한 가족의 이야기가 담겨있다.외딴 섬에서 고립되어 사는 비뢰이 가족은 필연적으로 자연에 그들의 삶을 ‘내맡긴다‘. 이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아야하기에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소박한 삶이라고 결코 쉽지는 않다. 오히려 이들의 삶은 생존을 위한 치열한 사투다. 그렇지만 이들에게는 스스로의 힘으로 생활을 꾸려가는 이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위엄이 있다. 본토 사람들에게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고결함이 있다. 자연이 비뢰이 섬을 내려다본다면 바로 이런 문장을 썼을 것 같다. 간결하고도 담백하다. 비뢰이 가족의 이야기는 다른 모든 인간사가 그렇듯 굴곡져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저자가 이들의 삶을 그려내는 방식에는 감정의 개입이 최소화되어있다. 있는 그대로를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문장은 내칠 것 없이 단단하고, 오히려 그 단순함에서는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자연이 아무런 가치판단을 하지 않듯 저자는 그저 비뢰이 가족의 일대기를 내보일 뿐이다. 결국, 어떻게 흘러가든 모든 인생은 아름답다고 말하려는 듯이.독특한 매력이 있는 소설. P.S. 이 책이 노르웨이에서 베스트셀러라는 이야기에 놀랐다. 노르웨이 사람들 정말 멋지다.. 당신들은 대체..www.instagram.com/vivian_boo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