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소녀들
팜 제노프 지음, 정윤희 옮김 / 잔(도서출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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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제 2차 세계대전 여성 비밀 요원들의 이야기. 소설 속에서나 현실에서나 전쟁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성 요원들의 성과는 안팎으로 잘 알려져있지 않은 듯하다. <고아 이야기>로 제 2차 세계대전 독일 서커스단에서의 이야기를 담았던 팜 제노프가 이번에는 영국 특수 작전국 소속 소녀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소설은 우연히 기차역에서 가방과 그 안에 놓인 소녀들의 사진을 발견하고 미스테리를 추적하는 그레이스, 영국 특수작전국의 유일한 여성 책임자로서 소녀들을 도맡아 지휘하는 엘레노어, 유창한 프랑스어 실력으로 비밀 요원이 되어 독일군이 점령한 프랑스로 침투하는 마리, 세 여성의 이야기로 번갈아 진행된다. 저자는 베일에 가려진 여성 비밀 요원들의 이야기를 수면 위로 끌어내며, 소설 속에서 그들의 업적을 다시 복원시킨다.



전쟁이 끝난 뒤 그대로 잊혀져버린 여성 비밀 요원들의 이야기가 그레이스라는 외부인을 통해 다시 파헤쳐진다는 이야기의 구조가 재미있다. 그동안의 오해를 밝혀내고 진실을 발굴해내는 사람 역시 여성인것이다. 당시 책임자였던 엘레노어는 폴란드계 유대인인데다 여성이기에 특수작전국 안에서의 입지가 좁았다. 그때문에 여성 요원들의 신상을 달달 외울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으면서도 상부에 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그런가하면 막상 현장에 투입되자 훈련받았던 것과 동떨어진 임무를 맡게되는 등 각종 돌발상황에 처하게 된 마리는 어떤가. 소설은 마리, 엘레노어, 그레이스의 사점으로 전쟁이 벌어지는 바로 그 장소 안에서, 밖에서, 전쟁이 끝난 뒤 그 시간 밖에서의 이야기가 번갈아 펼쳐진다. 임무에 충실했던, 책임을 지고자 했던, 사실을 밝히고자 했던 세 여성은 어떻게든 연결되어있다. 이들의 연결 축을 그려보는 것이야말로 이 소설의 가장 큰 재미다.



무릇 역사적 진실이란 시간이 지난 뒤 밝혀지기 마련이지만, 모든걸 바쳐 헌신했음에도 이름조차 잃은 채 묻혀진 수 많은 이들을 생각하면 조금 아찔해진다. <사라진 소녀들>을 읽으며 전장에서 매분 매초 치열하게 사투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 우리 모두가 지금을 살 수 있는 건 이들 덕분이라는 것을 헤아려본다. 선악과 옳고 그름을 떠나 우리는 앞선 이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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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마와라시
온다 리쿠 지음, 강영혜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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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여름 소설에 필요한 모든 것! 독보적인 소설 세계를 가진 노스텔지어의 마법사 온다 리쿠가 돌아왔다. 이번에는 스러져가는 과거와 그 안에서 피어난 기억 속 아이에 대한 이야기다.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는 다로와 산타 형제는 건물 철거 현장에 나타나는 흰 여름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를 발견하며 ‘스키마와라시‘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사람과 사람의 기억 사이에 깃드는 아이라는 뜻. 형제는 스키미와라시의 흔적을 따라가며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에 얽힌 비밀, 잊혀진 기억들을 발견해낸다. 따뜻하면서도 몽글몽글하고 흥미진진하면서도 쫄깃하다. 소설 <스키마와라시>.



급변하는 시대. 건물도 사람도 사라진다면 기억은 어디로 갈까? 오래된 물건을 찾아헤매는 형제와 과거의 흔적 속 ‘스키마와라시‘ 이야기는 그리움의 정서로 가득하다. 누구보다 빨리 앞으로 달리느라 뒤돌아볼 틈이 없는 이 시대에 지나간 것들의 가치를 되새겨보게 만드는 이야기다. 오래된 것들에 대한 이야기. 머무르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그야말로 온다 리쿠 세계의 정수만을 뽑아낸 작품이다. 낡은 건물, 골동품, 예술 전시 등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틋함도 가득 담겨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건 미스테리 요소! 동생 산타에게는 사연이 있는 물건을 만지면 그 물건이 간직한 기억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가 우연히 오래된 타일을 만졌다가 돌아가신 부모님과 관련된 기억을 만나는 순간은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축이다. 이후 산타는 같은 타일을 찾아다니며 기억을 추적해나가는데, 그 과정이 무척 흥미진진하다. 결국 이 여정의 끝은 ‘스키마와라시‘의 정체와도 이어진다. 결말부에 모든 연결성이 드러났을 때 얼마나 감동이 밀려오던지! 몽환에 더해 미스테리 추리물의 장점도 훌륭히 갖춘 소설이다. 과연 온다 리쿠 소설의 완성판이라 할만하다.



온다 리쿠의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마음이 애틋함으로 가득 차오른다. 시간이 갈수록 더 멋진 작품으로 만날 수 있어 얼마나 기쁜지. 저자의 최신작이기도 한 <스키마와라시>! 지나간 어린 시절을 그리웠던 과거의 기억들을 돌아보게 만드는, 따뜻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소설이다. 올 여름의 미스테리 소설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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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더카머 - 시, 꿈, 돌, 숲, 빵, 이미지의 방
윤경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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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을 기다려왔다. 원형을 파고들어 독창적이고도 섬세한 언어로 기억을, 예술을, 문학을 그려내는 글. 에세이라면 마땅히 어떠해야한다는 분별을 부수는, 내면의 심연에서 길어내는 독특한 문장들. 윤경희의 <분더카머>.



‘분더카머’는 근대 유럽 초기 지식인들이 진귀한 사물들을 수집하여 진열한 공간을 뜻하는 말이다. 경이로운 사물들의 방. 이러한 제목에 걸맞게 책 속에 실린 글들은 곧 저자의 고유한 기억 시공간의 보물들이다. 어린시절의 단칸방에서, 파리에서, 베를린에서, 저자를 사로잡은 문학과 예술에게서 나온 이미지와 텍스트들이 즐비하다. 지적이고도 감각적이다.



끊임없이 돌고 도는 원형의 이야기 속에서 반짝이는 저자의 언어는 그야말로 경이롭다. 은폐되기 직전의 마음 깊은 곳의 진실들. 이런 문장들은 읽히는 것이 아니라 체험된다. 가령, ‘나는 은합에 가장 붉은 심장을 도려내 주려는데 너는... 차마. 어쩌나. 내 선물을 받아주겠니. 쓰레기라 비웃을 거니. 나는 두렵다. 나는 글을 쓸 수가 없다. 나는 말을 할 수가 없다.’ 하는 문장들. 어떻게 매혹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이 책을 읽는다는 건, 현실에서 의식의 무게를 지워내고 마음을, 우주를 여행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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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방식 - 수전 손택을 회상하며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홍한별 옮김 / 코쿤북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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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보다 부풀려지거나 혹은 평가 절하되기 일쑤였던 수전 손택의 가장 진실한 초상. 후에 전미도서상 수상 작가가 되는 저자 시그리드 루네즈는 20대 중반 수전 손택과 인연을 맺으면서 그의 아들 데이비드 리프와 교제했으며, 두 사람과 함께 거주하기도 했다. 저자의 손택을 향한 존경과 그리움은 물론, 인간 수전 손택의 날카로우면서도 의존적인 진짜 모습을 낱낱이 담아낸 책이 바로 <우리가 사는 방식>이다. 수전 손택이 세상을 떠난지 6년 만에 출간된 작품이기도 하다.



수전 손택이라는 한 인간을 그려내는 저자의 문장은 거침없이 솔직하다. 그는 손택의 미와 예술에 대한 열정과 박식함이 자신의 문학 세계를 만드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음을 시인한다. 그런가하면 저자는 손택의 지성에 이견이 없는 찬사를 보내면서도 고통과 외로움으로 가득했던 손택의 개인적인 삶 또한가감없이 드러낸다. 화려하게만 보이는 손택의 삶이 주변의 오해로 얼룩진 면이 있다는 것, 사실은 손택이 아들과 연인에게 의존적이었다는 것을 짚어낸다. 이는 손택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만이 적어낼 수 있는 글이다. 사랑과 미움, 어쩌면 두 감정으로 다 설명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얽히고 섥혀있는, 진실된 글.



누구보다 진지하고 치열했던 수전 손택.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열 배는 더 강렬히’ 느끼고자 했던 사람. 그러나 혼자 멍하니 있는 것을 견디지 못했으며 소설가로 성공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던 사람. 모순적이고 인간된 수전 손택의 진짜 모습이 궁금한 이들이라면 손택을 다룬 그 어떤 책보다 흥미로울 회상록이다. <우리가 사는 방식 : 수전 손택을 회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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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딸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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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죽은 성녀, 영원한 아이를 어떻게 이길 수 있나. 이미 완성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자매를 어떻게 이길 수 있나. 아니 에르노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 여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언니에게 편지를 쓴다. ‘내가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건 당신을 되살린 후 다시 죽이기 위해서일까요?’ 에르노는 자신의 근원으로 되돌아가 언니가 죽은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태어난다. <다른 딸>은 수신인이 없는 편지이며 에르노가 자신의 삶을 다시 명명하는 자리다.



‘나는 당신이 죽었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죽은 것은 내가 글을 쓰도록 하기 위함이에요.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에르노의 삶은 글쓰기로 집결된다. 삶의 모든 순간을 해체해 그 의미를 탐색하는 에르노식 글쓰기는 삶 자체다. 이번 책, 죽은 언니의 완성된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다. 언니가 사라진 자리에서 살아온 에르노는 ‘정말로 살아있지 않은’, ‘허구의 삶’을, ‘존재의 부재’를 파고들기 위해 글을 쓴다. 그러나 그동안 비밀로 부쳐졌던 죽은 언니를 낱낱이 파헤치며 에르노가 직면한 것은 텅 빈 형체다. 글쓰기로 채울 수 없는, 추억 없는 사람. 이미 완결된 이야기.



편지의 결말부에 이르러 에르노는 ‘내 존재를 당신의 존재로 바꿀 수 없음’을, ‘나는 존재하기 위해서 당신을 부인해야만 했음’을 고백한다. ‘죽음이 있고 삶이 있다’고. 에르노는 이 문장에 이르러서야 죽은 언니의 그림자를 떨쳐내고 자신의 존재를 삶의 자리에 돌려놓는다. ‘나’가 되기 위해 ‘당신’을 그림자의 자리로 돌려보낸다. 이제서야 누군가의 대체가 아닌 그녀 자신이 그려진다.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여운이 길다. 역시 아니 에르노.



+) 책의 말미에 실린 신유진 작가님의 추천사가 정말 좋아요! 죄다 밑줄밑줄. 이 편지의 다른 제목으로 ‘나’이기 위해 부르는 ‘당신’이라니. 황홀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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