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앙스 - 성동혁 산문집
성동혁 지음 / 수오서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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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읽을수록 자꾸만 투명한 구 모양의 오브제가 떠올랐던 산문집. 성동혁 시인의 <뉘앙스>. 시인의 문장은 슬프고 맑지만 결코 깨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의 기분은 마치 아무도 밟지 않은 설원을 눈 앞에 두고 있을 때 느낄 법한 바로 그런 기분.



성동혁 시인의 시집을 오랜시간 아껴 읽어왔다. <6>과 <아네모네>. 첫 시집에 적힌 ‘이곳이 나의 예배당입니다‘라는 시인의 말을 오래도록 중얼거리던 날들도 있었다. <아네모네>는 오래도록 침대 맡을 지켜주었던 시집이고.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지만, 각별하게 여기는 시인이나 시집에 대해 말하는 것은 내밀한 모습을 들키는 것처럼 여겨져 말을 줄이는 편인데, 희한하게 주변에 성동혁 시인을 아끼는 이들이 많아 그의 시 이야기는 종종 나누곤 했었다. 산문집은 어떨지 가늠이 되지 않아 두고두고 아껴 읽자 싶었었는데 참지 못하고 그만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읽고 나니 문장들로 엮인 글 한 편 한 편이 마치 시와 같아서 미루지 않고 읽어보기를 잘했다 싶다.



수사를 늘이지 않아도 마음이 오롯이 전달되는 문장들. 이 책에 담긴 슬픔은 아주 투명하고 맑은 것, 이 책에 담긴 다정함은 아주 조심스럽고 따뜻한 것. 책을 읽은 것만으로도 소중한 마음을 전달받은 것 같다. 그중에서도 특히 ‘문장은 나의 아름다운 사람들을 담기엔 너무 협소하다.‘는 문장을, 그 속에 담긴 마음을 가만히 헤아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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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인 채 완전한 축제
술라이커 저우아드 지음, 신소희 옮김 / 윌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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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수전 손택의 말을 빌리자면 사람들은 모두 건강의 왕국과 질병의 왕국을 넘나든다. 기대 수명이 늘어난 오늘날 이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스물 두 살에 급성 골수성 백혈병을 진단받고 약 4년간의 투병생활 끝에 살아남은 술라이커 저우어드는 두 왕국을 넘나드는 자신의 여정을 솔직하고 가감없이 그려낸다. 처음 증상을 느꼈을 때부터 환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과정, 끝까지 자신을 지탱했던 글쓰기와 사랑, 이후 건강의 왕국으로 진입하기 위한 자동차 여행까지. 이 책은 한 인간이 자신을 이뤘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자신을 처음부터 하나씩 받아들여나가는 이야기다.

질병과 고통만큼 삶의 불확실성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하는 것은 없다. 그리고 한 번 이것과 마주한 사람은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회복은 익숙한 내 모습을 영원히 버리고 새로운 나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저자는 생존확률 35퍼센트를 뚫고 살아남았으나 꿈과 사랑, 정체성을 비롯한 모든 것을 다시 처음부터 찾아나가야했다. 세상은 병에서 살아남은 이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예전과는 영영 달라진 몸과 면역체계를 이끌고 다시 처음부터 자립해야하는 건 전부 자기 자신의 몫이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 저자는 자신의 투병 칼럼을 읽고 편지를 보낸 이들을 만나기 위해 자동차 여행을 떠난다. 보통 사람보다 아주 느린 속도로, 그러니까 새로운 그녀만의 속도로. 내밀한 이야기를 자기연민 없이 그러나 솔직하고 용감하게 드러내는 저자의 태도는 무척 매력적이다. 한치 앞을 모르는 여정을 떠나는 저자의 모습은 우리 자신의 모습과도 닮았다.

삶은 계속된다. 병을 진단 받은 뒤에도, 화학 치료를 받은 뒤에도, 성공적으로 치료가 끝난 뒤에도. 그게 무엇이든, 병이든 고통이든 슬픔이든 기쁨이든 우리는 그것과 ‘함께‘ 살아간다. 그 누구도 예외일 수는 없다. 우리는 술라이커 저우어드의 경이로운 이야기를 통해 ‘고통의 존재를 외면하지 않고 삶을 고통에 빼앗기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설령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야 할지라도.

​+ 원제 ‘Between Two Kingdoms‘도 좋지만, 한국어 제목 ‘엉망인 채 완전한 축제‘도 정말 좋다.

++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저자의 근황을 찾아보다가 병의 재발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근황을 알리며 프리다 칼로의 ‘나는 나의 뮤즈다. 나는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다. 내가 더 잘 알고 싶은 주제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나와 나의 몸과 질병과 고통과 삶. 용기와 희망. 그녀가 남긴 모든 문장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강인함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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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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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이 몰아닥칠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여기 혼돈과 싸우는 것이 평생의 과업이었던 이가 있다.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 그가 30여년간 몸과 마음을 다해 수집해온 어류 표본들이 갑작스러운 지진 때문에, 삶의 손가락질 한 번으로 전부 박살났을 때에도 그는 주저없이 다시 일어난다. 대체 어떻게. 어떻게 그는 혼돈 속에서 다시 설 수 있었나. 이 책의 저자 룰루 밀러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일대기를 따라가며 바로 그 의문을 풀고자 한다. 그녀 삶의 혼돈으로부터 바로서고자, 인생의 의미를 찾아내고자 노력하며. 즉,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기이자 회고록이다.



이 책은 과학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철학적이며 자기 성찰적이다. 저자는 여러가지 소재를 한데 엮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가는데, 끈질기게 혼돈으로부터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녀는 그 답을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알려줄 수 있다는 듯 그의 삶을 파고들어간다. 이 책의 묘미는 중반부부터 시작되는 반전에 있다. 영원히 꺾이지 않을 것만 같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불굴의 의지 이면의 것들이 조명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야기는 빠르게 진행된다.



다른 독자분들로부터 독서의 즐거움을 빼앗을 수는 없으니 스포일러는 접어두고, 저자의 깨달음과 비슷한 맥락에서 최근 하는 생각들을 적어볼까 한다. 내려놓는 것에 대해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그저 모든 것이 흘러가도록 두는 것에 대해서. 어쩌면 자연에 순응하는 것은 가장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행위일지도 모른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두는 것은 우리들 중 가장 용감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던가. 자연이 우리 삶에 혼돈을 내리꽂는다면 그 혼돈에 몸을 맡겨버리는 것이 가장 빨리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일 것이다. <듄>의 폴 아트레이데스가 모래폭풍속에 자신을 내맡기기로 선택했듯이.



흥미로운 이야기, 인생에 대한 성찰, 매혹적인 구조. 한 번 읽고 다시 들춰보았을 때 더 매력적이었던 책. (표지 디자인 너 무 아 름 다 워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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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더지 잡기 - 노년의 정원사가 자연에서 배운 것들
마크 헤이머 지음, 황유원 옮김 / 카라칼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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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한 해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시점에 는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자주 던지게 된다. 때마침 읽고 있었던 책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었다. 시인이자 정원사인 마크 헤이머가 황혼을 넘긴 나이에 쓴 첫번째 에세이 <두더지 잡기>. 책 속에는 저자가 20여년간 생계를 책임져준 두더지 잡기를 그만두기로 결심한 이유, 그동안 그가 걸어온 삶의 여정이 간결한 문장으로 담겨있다.

자연 속에서 사는게 아니라 자연을 관람하며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의 순리를 모른다. 자연은 치열하고도 냉혹하게 계절과 섭리에 맞게 흘러가는 것. 자연 속에서 일하는 사람인 저자는 기꺼이 자연과 함께 흘러가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벨벳 천 같은 가죽을 두른 채 고독하게 생활하는 두더지에 대해서, 맑은 정신으로 생각들은 그저 지나가게 둔 채 내면을 자연으로 채우는 자신에 대해서.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건 저자가 열 여덟살때 홈리스가 되어 자연 속을 걸어다녔다는 일화다. 이 이야기는 파편적으로만 소개되지만 자연 속에서 순간만을 사는 저자의 태도가 시작된 시기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연과 두더지 이야기로 가득한 이 책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배웠다. 알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는 의식의 상태로, 고요하고 평온한 순간을 확보하며, 순간순간을 살 것. 그러니까 나와 타인을, 세상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살 것. 기본에 충실하며 매 순간을 살아있음이라는 경이로 가득 채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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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제니 오델 지음, 김하현 옮김 / 필로우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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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제목부터 매혹적이다. 현대인들의 새해 소망이 있다면 일상의 피로가 씻겨나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 아닐지. 제니 오델의 첫 에세이인 이 책은 디지털 기기와 소셜미디어로 매 순간 연결된 나머지, 진짜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해진 현대인들에게 건네는 일종의 제안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웃들에게, 동식물들에게, 주변 환경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또 연결되어야 한다는 제안 말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강의라기보다는 산책에 가까운 이 책은 저자의 사고 흐름을 따라가도록 구성되어 있다. 필경사 바틀비, 데이비드 호크니, 에피쿠로스, 1960년대의 코뮌 등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풍부하게 실려있어 읽는 재미가 있다. 결국 기억해야할 것은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러니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고 매 순간의 경이로움을 알아차릴 것.



이 책을 열흘에 걸쳐 읽었는데 첫날 적어둔 메모를 옮겨둔다. 언제나 나로부터 시작되는 연결.

: 사는 것에는 목적이 없다. 더 많은 것을 경험하는 것, 더 사랑하는 것. 좋은 무언가를 소유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본질로부터 벗어난 것. 나 자신을 제외한 다른 것들에게 중심을 옮겨두지 말 것. 내게 밀려오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환영하고 느낄 것. 진짜 중요한 것은 이미 내 안에 있음을 잊지 말것. 어쩌면 인생은 이것을 다시 깨달아가는 여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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