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이야기 예술과 심리 동화 시리즈 2
김태연 그림, 임민주 글 / 나한기획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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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민주님과 김태연님의 "길 이야기"라는 그림책은 글과 그림이 상호 보완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림책의 속성을 자 드러내는 작품이다. 그림책을 읽을 때 독자는 그림을 한 번 보고 글을 읽을 다음 다시 그림을 보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마음속에서 양자를 통합해 간다. 그런데 이 책을 일독 했을 때 뭔가 불편한 느낌이 든다.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 처음에는 잘 알아차릴 수 없었다. 몇번이고 반복해서 본다. 그림책에서 대개 글을 그림을 어떻게 보아햐 할지 방향을 제시하고 그림은 글이 말하지 않는 내용을 함축적으로 전달한다. 때문에 글을 읽으면서 방금 보았던 그림의 의미에 대해서  "아하 이런뜻이군"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반대로 그림을 보면서 글에서 말하지 않는 내용을 알아내는 즐거움이 있다. 이 책은 글과 그림이 차원이 다른 메시지를 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처음 읽고 느껴졌던 불편함은 바로 이때문인 듯 하다.
 
먼저 문자로 된 서사를 읽어보자. 이 책의 주인공인 길은 문자서사에서 아직 문명화 되기 이전의 순박하고 거친 시골길이다. 그것도 큰 길이 아닌 오솔길이다. 사람들이 그 길을 지나다니면서 불평을 늘어놓는다. 진흙탕이 되어 질척거린다고 싫어하고 흙탕물이 튀긴다고 "이놈의 길 다시 만들들가 해야지!"라고 심한말을 한다. 거기다가 시골길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도시아저씨가 넘어지면서 "아이쿠, 무슨 길이 이해"라고 불평하는 대목에서 오솔길의 자존감을 깨지고만다. 누구든지 주변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는다면 자아상이 건강해질리 없다. 오솔길은 그 자체로서 봄이면 꽃으로, 여름이면 진한 녹음으로, 가을이면 단풍으로 겨울이면 하얀 눈으로 옷을 갈아입으며 그곳을 걷는 사람들에게 낭만과 건강한 휴식을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오솔길은 자신의 긍정적인 모습은 보지 못한채 "나도 깨끗하고 반듯한 길이 되고 싶어. 그러면 사람들이 날 좋아하겠지?"라는 소망을 품는다. 참 자신이 아닌 사람들의 지극히 편협한 기대에 부응하는 거짓자아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렇게하여 오솔길은 자신을 파헤쳐 두꺼운 아스팔트로 포장하는 거친 공사를 꾹 참아낸다. 이제 포장도로가 된 아스팔트길위로 자동차가 쌩쌩달린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좋은 데 그 다음에 비극이 시작된다. 과속으로 달리던 자동차가 사고가 나면서 사람이 죽고 피가 뿌려진다. 이제 예전처럼 더 이상 길 자체를 즐기는 사람은 없다. 그저 죽을둥 살둥 모르고 달리는 사람들뿐이다.  길은 비로소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뼈져리게 느끼며 옛날의 오솔길로 돌아가고자 하는 강력한 소망을 품는다. 그리하여 기를 쓰고 아스파트를 갈라 숨을 내쉰다. 그것도 잠시 도로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깨진 틈에 아스팔트를 다시 들이붓는다. "제발 숨 막히고 무서운 이 옷 점 벗겨주세요."소리친다. 오직 아이들만이 그 소리를 듣고 어른들에게 전해 주지만 아이들의 소리는 어른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오솔길은 지금도 울고 있다.
 
이제 그림을 읽어보자. 그림서사에 등장하는 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다.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룬 태극 모양으로 등장한다. 태극의 전체는 하나의 원이다. 즉 음과 양, 너와 나,주체와 객체,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근원을 가지고 있고 하나의 공동체을 상징한다. 둥근 태극 안에는 빨강색 부분과 파랑색 부분이 서로를 감싸 안은 모습으로 어울어져있다. 둘이 분리 된 것이 아니라 하나이면서 둘로 나뉘어 만물이 생성되는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다. 따라서 그림작가가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라 음양이 조화와 균형과 질서를 이룬 하나의 아름다운 세계를 형상화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길이 아프면 길이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니라 땅을 상징하는 파랑색 부분이 아파한다.
 
문자서사가 진행되면서 태극문양은 다양한 표정과 다양한 모습, 다양한 형상을 띤다. 결정적인 구조의 변화는 아스팔트가 깔렸을 때이다. 이전까지는 음과 양이 서로를 껴안은 듯한 모습이었는데 이제 아스팔트 도로를 경계선으로 상하가 분명하게 구별된다. 너와 나, 주체와 객체,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 받는 사람, 자연과 인간이 이분법적으로 분리됨을 상징하는 듯하다. 음과 양, 자연과 사람,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 약함과 강함이 조화를 이루던 세계는 더이상 없다. 그러자 오솔길은 병이나고 만다. 둘로 갈라진 길은 상상 속에서나마 예전의 조화를 이룬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두꺼운 아스팔트로 단절된 두 세계를 통합하려고 있는 힘을 다하여 금을 내본다. 하지만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또다시 원상복귀되고 만다.
 
자 이렇게 글과 그림을 따로 읽어보니 문자 서사의 길과 그림서사의 길이 어떻게 같으면서도 다른지 이해할 수 있겠다. 문자서사는 미시적 길로서 소우주를 상징한다면 그림서사는 거시적이고 우주적인 길로서 대우주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자가 타인의 부정적인 피드백을 자아상으로 만들어 타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비극을 이야기한다면 후자는 자연을 한 몸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것으로 대하는 인류 문명의 비극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문자서사의 길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가짜 자아상을 스스로 만들지만 그림서사에서는 오히려 땅을 파헤치는 인간들의 모습이 더욱 강조되고 있는 점이다. 그렇다면 길이 길답지 못하게 된 것은 내적인 동기때문인가 외적인 환경때문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이 대목이 이 책을 단순하게 환경을 파괴하지 말고 자연을 보호하자는 상투적인 메시지를 뚸이 넘는 부분이다.
 
이렇게하여 문자서사의 길과 그림서사의 길이 다른 차원의 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면서 둘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두겹으로 꼬여진 새끼줄처럼 말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타인이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자기다운 삶, 참 자기를 살아갈 때 자연이든지 타인이든지 그것으로 취급하지 않고 나-너로서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 수 있을게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미시적으로 볼 때 곧 가장 자기답다는 것이요 거시적으로 볼때 자연과 사람이 조화를 이루는 삶, 서로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배경이 되어주는 상생의 삶일 것이다.
 
사람을 세우는 사람 이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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