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에 관하여 - 비판적 성찰의 일상화
강남순 지음 / 동녘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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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부제는 "비판적 성찰의 일상화"다. 제목과 이어보자면, '배움은 비판적 성찰의 일상화다' 가 되겠다.

비판적 성찰은 무엇인가. 이 책의 서문에 친절하게 제시되어 있다. 우선 "무엇도 자명한 것은 없다"는 전제를 세워야 한다. 즉 "진정한 배움을 위해서는 우리가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물음표를 붙여야 한다."(6쪽)

전제를 세운 후 세 가지 단계를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묘사적 단계, 분석적 단계, 비판적 단계"다. 스스로 묘사하고 분석한 후에야 비판이 가능하다.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사유에 근거 해 '판단'하며 그 판단이 개혁과 변화를 모색하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배움이 가능하게 된다."(7쪽) 나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진짜 내 것이 된다고 생각하기에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이 책은 저자의 위와 같은 생각이 담긴 91편의 에세이집이다. 1장은 "살아감, 그 배움의 여정"이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계속 배울 수밖에 없다. 무엇을 어떻게 배우는가.

"자신이 아닌 어떤 사람의 모조품이 되지 마라. (…) 눈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발자국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21쪽)

저자는 '토마스 크바스토프'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가 배워야 할 대상(혹은 가꾸어가야 할 대상)은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대체 불가능한 유일성"을 가진 나라고 말한다. 이는 '나르시시즘'이 아니다. '내가 나로 살아간다'는 의미는 '나'라는 존재를 앎으로 인해 '타자'의 존재도 배운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자기 사랑'을 배우고 연습하지 않으면, '타자 사랑'을 하는 법도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자기 사랑'이란 자동으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배워야 하고 연습해야 하는 것이다."(89쪽)

"자신의 주변과 연계하고 반응하는 방식이 이렇게 사람마다 다른 것을 보면서, 사실상 각기 다른 모습들이 특정한 사람에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속에 모두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하나의 나'가 아닌 것이다."(30쪽)

'나'에게는 '타인과는 너무나도 다르고 특별한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수없이 많은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다양한 나'로 성장한다. 즉, 나만 사랑받을 존재라고 주장하는 나르시시즘과 다르게 '나를 배운다'는 의미는 '연대'를 가능케 한다. 

2장이 "살아 있는 텍스트, 타자의 얼굴들"이 되는 이유다. 나를 들여다 보는 과정에서 "타자의 얼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법을 배운다면" 나와 너와 다르다고 단정내릴 수만은 없게 될 것이다.

타자의 얼굴을 배우는 행위는 "사랑이 치열한 생명 긍정의 희망"(3장)임을 알게 되고 "인식의 사각 지대를 넘어"(4장) "감히 스스로 생각"(5장)할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책 속에 길이 있"으니 계속 배우"려는 시도다.

"인간은 누구나 각가의 인식록적 한계는 물론 자신의 정황에 한계 지워진 존재라는 점에서 그 한계들을 넘어서기 위한 '부단한 배움'이 없을 때 독선과 아집에 빠지게 된다. 배움을 멈춘 인간은 '나'를 찾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그만 배워라"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배움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이 먼저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다."(276쪽)

"한 권의 '좋은' 책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것은 맹목적 '정보'가 아닌 다층적 '세계들'이다. '나의 존재함'이란 개별적 존재로서의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개별적 나'는 타자와의 절대적 분리 속에서는 불가능하다. 좋은 책은 바로 나-타자-세계의 다양한 존재 방식을 담은 '다층적 세계들'과의 만남을 담고 있다. <중략> 이 점에서 인간은 '홀로'이면서 동시에 '함께 존재'라는 것, 그 '홀로-함께 존재'로서 이 세계에 개입해야 하는 책임성. '좋은' 책이 우리에게 인식하게 하는 중요한 통찰이다."(278-279쪽)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지식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다. 계속 배우는 과정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인식함과 동시에 나라는 존재의 한계를 깨닫기 위해서다. 한계가 있는 나는 타인과 함께 존재하는 과정 속에서 내가 이 세상에 책임이 있음을 배운다. 독서는 그런 과정에 이르도록 돕는 수단이다.

그러다 보면 대안"을 생각하게 된다. 나만 잘 살면 된다고 말하고, 끊임없이 타인을 배척하고 미워하게 만드는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게 된다.

"역사의 변화는 언제나 새로운 대안적 세계를 꿈꾸고 실천하고자 무수한 시도를 하는 '소수'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희망의 근거는 '성공과 승리의 보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렇게 보다 나은 대안 공동체를 위하여 씨름하고 새로운 시도들을 과감히 해내는 바로 그 '과정' 속에 있다. 대안을 꿈꾸는 이들은 확고한 성공의 보장 때문이 아니라, 그 성공의 불확실성 속에서도 그 대안이 꿈꾸는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열정과 신념으로 모험의 여정을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이렇게 모험을 감행하는 이들이 꿈꾸는 대안적 세계에 대한 열정으로 변화해왔다는 것을 우리는 끊임없이 기억해야 할 것이다."(367-368쪽)

그 가능성을 희망한다. 결과가 아닌 과정을 살아가는 삶은 불안하고 불확실하고 불투명하여 수없이 좌절하게 만든다. 좌절한다 해도 멈출 수 없다. 계속 배우며 살아갈 뿐이다. 그 끝에서도 끝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저항'은 그 자체로 '대안'이다.

덧- '5장 감히 스스로 생각하라' 중에서 "정황불감증, 그 정서적 폭력성에 대하여"는, 신영복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K씨가 트위터에 올린 글에 관한 저자의 사색이 담겨 있다. 나와 생각이 비슷하여 공감했다.

실제로 (그가 신영복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바가 거의 없다"고 해도 신영복 선생님의 죽음이라는 '정황'에 이런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저자의 말대로 "정황불감증"은 "정서적 폭력을 가하는 것"이 되는 동시에 "비인간화"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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