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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소망 그리고 호랑이
박금산 지음 / 문학수첩 / 2025년 8월
평점 :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성경 구절이지만 너무나 유명해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의 제목은 믿음과 소망 사이에 반점(,)을 제거하여 나란히 놓았습니다. ‘사랑’은 없애버리고 그 자리에 ‘그리고 호랑이’를 넣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답을 찾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태어났을까”(9쪽) 질문하는 ‘나’의 기원을 찾기 위해 ‘폴란드에서 태어난 고조할머니 헬렌,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증조할머니 라헬, 한국에서 태어난 할머니 데보라, 미국에서 태어난 엄마 카렌’의 역사를 거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판타지의 옷을 입고 등장한 여성 호랑이는 햄버거를 좋아하는 맹견 릴리를 닮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난제는 하나 더 있습니다. “-것 같다”와 “-고 한다”의 반복입니다. 왜 이런 문체를 사용할까요? 해답보다는 질문이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는 미로 속을 헤매는 기분이 들게 합니다. 게다가 저는 길치랍니다.
나․릴리․여성 호랑이
처음으로 돌아가 ‘나’의 이야기로 방향키를 잡아봅니다. 나는 산책 가드로 맹견 릴리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햄버거를 좋아하는 릴리의 취향까지 아는 남성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면 목줄을 풀면 문다는 릴리의 목줄을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격당한 남성’이라는 팩트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릴리를 동굴에 숨겨놓는다고 해도 소문은 퍼집니다.
그러나 이상하죠? 개가 아닌 호랑이가 공격했다고들 하니까요. 호랑이라니. “그리고 호랑이”는 비교적 빨리 등장했습니다. 새벽 3시에 현관 앞에 갑자기 나타난 여성 호랑이는 릴리를 닮았습니다. 사람으로도 변신이 가능한 호랑이는 ‘나’와 옷도 나누어 입었습니다. 호랑이와 함께 릴리를 집으로 데려온 나는 이제 책임져야 합니다.
여성 4대의 역사
“어쩌면 큰 돈이 될지 모르”(137쪽)는 호랑이는 라헬 할머니를 떠오르게 했습니다. 라헬 할머니의 비망록엔 ‘사진’이란 증거로 노근리 사건의 진실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습니다. 친구 할라의 파트너가 궁금해하는, 데보라 할머니의 삶은 제주 4.3 사건의 상처를 관통합니다.
‘나’가 할머니들을 생각하며 쓰는 글엔 “이리저리 폭력을 피해 다닌 헬렌과 라헬”(312쪽)도 포함됩니다. 폴란드 바르샤바 인근 유대인 게토에서 태어난 헬렌은 우크라이나 오데사에 이르러 기독교와 독립운동을 배우러 온 한국 유학생을 만나 라헬을 낳았습니다. 혼자가 된 헬렌은 라헬과 함께 상하이를 거쳐 오키나와의 도시 나하로 갔습니다. 라헬의 아버지를 찾고 싶어 한국으로 갔지만 만나지 못합니다. 대신 데보라를 입양하게 됩니다.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횡단해야 했던 할머니들의 여정은 살아남기 위해 탈주한 기록입니다. 20세기를 살았던 네 세대 여성들의 삶에는 제국주의의 폭력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습니다. 개인은 단지 ‘나’로 살 수 없습니다. ‘나’는 ‘우리’가 되고 ‘우리’가 살아내는 삶은 역사입니다.
호랑이의 다른 이름, 사랑․유희․폭력
제목에서 성경을 떠올리게 되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이야기 곳곳에 유대교와 기독교가 등장하며 종교의 역할을 질문합니다.
13장에 도착해 ‘나’는 제주의 서점에서 《고린도전서》를 읽다가 “믿음, 소망, 사랑. 이 중에 제일은 사랑”(381쪽)을 마주했습니다. “모든”과 함께하는 사랑에 거부감을 느끼며 다시 출생의 기원을 추측했습니다. 사랑, 유희, 폭력 중 무엇일까. 그리고 호랑이를 찾았습니다.
호랑이의 뱃속에서 나를 공격했던 그를 만나 이곳에서 “나가”(391쪽)라고 말했습니다. 반복하면 죽이겠다는 협박과 함께. 피해자이자 생존자이면서 가해자라는 사실을 인정한 나는 호랑이를 놓아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과 유희와 폭력은 함께 들어 있”(396쪽)는 것이라고.
사랑이 ‘모든’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제일이 될 수도 없습니다. 대신 부분이 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호랑이가 나인 ‘것 같고’ 릴리인 것 ‘같은 것’처럼.
“–고 한다”와 “–것 같다”는 믿음 소망, 불확실성의 정직
이야기 속엔 ‘-고 한다’와 ‘-것 같다’가 반복됩니다. ‘-고 한다’는 타인의 말이나 글에 대한 전달이자 인용입니다. 전달하는 나는 그 말에 책임질 순 없습니다. ‘-것 같다’는 추측입니다. 추측엔 주관성이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고 한다’와 ‘-것 같다’의 세계는 불확실합니다. 과거가 그렇듯 현재도, 느낌이 그렇듯 사실도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브리서, 11:1)가 될 순 없습니다. 소망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소망은 반점(,)이 없이 나란히 놓여야 합니다.
이야기는 여성들의 삶을 다룹니다. 남성(인 작가)에게 여성의 삶은 타자의 세계입니다. 다시 말해 -고 한다와 –것 같다의 세상일 테지요. 단언하지 않는 것은 정직함일 ‘것 같’습니다. 다른 한편으론, 겸손일 ‘것도 같’습니다.
덧 - 이 소설은 제가 읽어낸 부분들보다 깊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전부 담기 어려워 제목을 중심에 두고 글을 풀어보았습니다. 쉽지 않은 소설이지만 많은 분들이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