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공감, 착각—으로 이어지는 단어의 맥락과 강렬한 표지를 보고 지레짐작으로 내용을 예측했다. 사회학, 인식론, 인권과 연대의 이야기를 담은 진중한 책일 거라고.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이야기에 담긴 기억과 지식, 감정을 따라가는 일은 산뜻하고 경쾌하다. 이길보라 작가는 청각장애인 부모와 함께 살며 겪은 코다로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여러 논픽션 작품을 소개하며 타인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일, 생각을 바꾸고 세계를 확장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꾹꾹 눌러쓴 편지처럼 구체적인 경험과 고민을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자연스럽게 장애, 다름,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세상을 연결하고 확장하는 책에 소개된 작품들도 인상적이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미루어 보건대 삶은 우리가 쓰는 낱말들을 초월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떤 말인가가 결여되어 있기 마련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가 필요해진다” 소설 속에 인용된 존 버거의 말에 따르면 진연주 소설가의 이번 작품집이 바로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사건이나 상황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문장이 아니라 정지한 채로—서술하거나 판단하는 문장이 아니라 감각하고 사유하는 문장으로 사건이나 상황을 낯설게 만든다. 비가 내리는 골목길, 노쇠한 반려견과의 산책, 어머니의 죽음, 연인과의 이별, 흔적, 소멸, 상실에 대한 이야기는 그 상황의 직접적인 묘사보다 화자의 감정—문장으로 표현된, 동시에 문장으로 채 전달되지 않는—을 드러내고 있다. 채워지지 않은 이야기를 짐작하고 상상하는 동안 이야기는 독자의 삶으로, 감정으로 확장된다. ‘모든 쓰는 이가 사랑하는 이다. 사랑하는 이가 결국은 쓴다‘는 작품 해설의 말처럼, 모든 읽는 이는 사랑하는 이라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마땅히 사랑받아야 할 이 소설이 여러 독자에게 가 닿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마음이라는 걸. 좋아하는 옷을 입고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즐거운 일을 만들어 내는 일. 모두가 똑같이 욕망하는 것들, 이를테면 돈이나 직업이나 그런 거 말고 내가 만들어 온, 내가 찾아낸 내 마음은 결코 가난해지지 않는다는 걸. 패셔니스트자 스탠드코미디언, 치를 즐기는 무직의 이십 대인 작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는 그것으로도 차고 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