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알랭 드 보통 지음, 이강룡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여기에 내가 있고 그곳에 네가 있다. 우리 둘 사이에는 무엇이 존재하는 것일까? 영화 [비포 선 라이즈]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신이 있다면 너와 내 안이 아니라 너와 내 사이에 존재할 것이다.” 라는... 그래, 저 고매한 신은 차치하고서라도 자아와 타아의 관계를 정의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그렇다면 나와 그 사이에는 어떤 장치와 어떤 의미, 어떠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것일까? 알랭 드 보통의 kiss & tell 은 이러한 궁금증을 기저에 깔고 이야기를 끌어간다. 연애담을 빌은 한 여인에 대한 전기(傳記) 형식으로.


보통은 이사벨의 전기를 11개의 챕터로 이어간다. 물론 한 시도 손을 뗄 수 없을 만큼 강한 흡입력을 자랑하는 보통의 글이지만, 그 중 흥미 있었던 챕터는 <기억>과 <다른 이의 눈을 통해 본 세상> 이다. <기억>에서는 기억이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듯 알연히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나란히 전개되는 것이며 이로써 우리는 두 측면을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보자, 내 과거를 말씀드리자면 이러하다. 나는 코흘리개 적, 그 간절한 달콤함을 억누르지 못해 ‘자두맛사탕’ 한 봉지를 훔치다 걸려 하루 종일 주인아줌마 옆에서 무릎 꿇고 손을 든 채 X망신을 당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그것이 벌써 20여년 전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마트나 가게에서 ‘자두맛사탕’의 붉은 봉지만 보면 식은땀이 나고 주춤주춤 꽁지를 빼는 것이다. 자 어떠한가! 이만하면 과거와 현재가 나란히 전개되는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기억은 자신과 현재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시간을 녹여 버린다는 이야기이다. 멋지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기억은 스스로 단계를 밟아나가며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불친절하게 불쑥 튀어나오고, 어떤 우연한 주제를 여는 서막일 뿐이다. 프라이팬에서 지글거리며 튀겨지는 요리가 아니라 다시 데운 음식이다.] 아... 미치겠다..... 죽갔다.... 보통이 기억을 정의하는 이 부분에선 보통의 징글맞은 필력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질투심을 억누를 길이 없어 총탄에 심장을 빗맞은 짐승처럼 흐느끼며 새벽 내내 온 손톱과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먹어야 했다. 보통.. 보통.. 정말 보통 놈이 아니다.. 각설하고... 


<다른 이의 눈을 통해 본 세상>에서는 자아와 타아의 입장 차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가령, 나와 타인은 어떤 투명한 하나의 물 컵을 놓고 보아도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보통은 ‘합리적’ 이라는 단어를 예로 들고 있다. ‘합리적’이라는 단어를 두고 화자는

1. 고상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칭찬의 일종,

2. 감정과 대립되기도 하고 더 풍부하게 해주기도 하는 '긍정적인 형용사'로 보는 반면,


이사벨은 ‘합리적’이라는 단어를

1. 아는 척하는 따분한 작자들을 가리키는 것,

2. 감정과 반대의 의미, 전통적인 가족이원론을 떠올리게 하는 '부정적인 형용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사전적인 정의가 엄연히 존재하는 단어마저 각자의 눈으로 본, 경험으로 체득한 의미를 따로 발견할 진대, 하물며 자아와 타아를 이루는 수많은 관계와 보이지 않는 의미들의 해석이 어떻게 일치 할 수 있단 말인가!  보통은 말한다. “이런 어긋난 결과를 가져온 작은 의미의 충돌은 하나의 개별 사건이 상이한 의미 영역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라고.


그런 것이다. 누구의 말대로, 누군가 한아름의 꽃을 사가지고 집 앞에서 기다린다고 해서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보장은 없다. 나는 꽃을 든 그의 출현을 통해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가늠하며, 아마도 감동과 눈물의 환타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저 지나가다 꽃이 아름답길래 샀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다라고 말한다. 그저 꽃이 예뻐서 샀으며 마침 당신의 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기에 주는 것뿐, 꽃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면... 그런 것이다. 그저 우리는 그렇게 알면 그뿐인 것이다.


이야기가 길었지만, 보통의 책은 다른 것도 그러하지만 상당히 재미있다.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는 그만의 위트와 통찰력에 읽는 내내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마지막 결론조차 보통답다. 재밌는 건, 화자의 치밀한 인간에 대한 분석과 관계에 대한 심리, 보고, 추론에도 불구하고 이사벨의 한마디에 모든 것은 갈 길을 잃고 만다. ‘왜 사람들의 삶을 그런 바보 같은 전기들처럼 요약해야 하는지 말야‘ 라는 통쾌한 외침! 아, 치밀한 파라독스! 이사벨도 모르는 것이다. 왜 내가 이곳에 살고 있는지, 왜 문은 그렇게 생겼는지, 왜 치즈는 사각으로 자르는지... 자기 자신에 관해서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 아닌가!(누군들 그러하지 않은가! 당신은 왜 대한민국에 태어났는가! 저기 어디 도둑놈의 나라에서 태어났으면 어쩔 뻔 했는가 말이다!) 텔레비전보다 책을 더 많이 읽어야 하는 걸 알지만 티비가 더 좋은걸! 사람들에게 친절해야 하지만 싫은 놈은 당최 재수없기만 한 걸!

왜! 왜! 사람들의 삶을 그런 바보 같은 전기들처럼 요약해야 하는지 이사벨은 정말 모르겠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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