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빅 머니
이시다 이라 지음, 오유리 옮김 / 토파즈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물질의 시대고 돈의 시대다. 성실이니 노력이니 도덕이니 하는 옛 시대의 덕목들은 말 그대로 '낡아빠진 구호'가 되어 이제는 공허한 외침조차 만들어낼 수 없다. 매주 발표되는 로또 한 방에 인생역전을 노리는 것은 일상이 되었고, '대박'이란 단어는 한국인의 기본 어휘로 오늘도 바쁘게 여기저기를 부유한다. 부자가 되는 것, 돈을 거머쥐는 것 말고는 꿈이 없는 사람들의 시대다. 아이들에게 꿈이나 소원을 물어보면 열에 여덟은 부자가 되는 것이라고 답한다. 부자가 되어서 뭘 할 것인가를 물으면 그 대답이란 것이 아무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조악하기 그지없는데, 이는 한 밑천 만들기를 평생토록 소원하는 어른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돈의 시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만드는 땀방울을 밀어내고 '하이 리스크에 하이 리턴'을 외치며 그저 부자 되기만을 노래한다. 그 돈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시류에 영합-'쩐의 전쟁' 운운하는 띠지는 또 뭐람-한 듯한 참으로 멋대가리 없는 『빅 머니』라는 제목의 이 책 역시 돈의 시대에 부자가 되는 길, 그 짜릿하게 살 떨리는 쾌감을 보여줄 뿐, 그 이상은 없다.
어디에 이력서 넣기 심히 민망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주인공 청년은 20대의 가진 것 없는 백수가 지닐, 딱 그 만큼의 비뚤어짐으로 세상을 보며 하루하루를 빠찡코에서 보내는 중이다. 꿈도 희망도, 돈도 일도 없이 지방의 부모에게 1년의 보조를 부탁하며 그럭저럭 살고 있었다. [누군가를 위해, 세상을 위해선 어떠한 도움도 되고 싶지 않다. 무리에서 떨려난, 굶주린 늑대라도 된 양 배배 꼬인 자존심에 겨우 매달려 있을 뿐. 번듯한 일자리를 여봐란 듯 꿰찬 또래들로부터 뒤처져, 갈수록 힘들어지는 내리막을 두 발바닥에 올곧이 느끼면서도 나는 남다른 존재라 맘 한켠에서 믿고 있었다.] 말은 이렇게 해도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현재 처지란 것이 늑대는커녕 살찐 오리도 못 된다는 것을. 이쯤에서 알 수 있듯 주인공은 평범한 젊은이였다, 노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런데 야거(yager)는 야거를 알아본다던가. 웬 노인이 그에게 다가와 아르바이트로 비서직을 제안했다. 노인은 지하 경제에서 돈 좀 굴린다는 할아버지로-어쩐지 '쩐의 전쟁'에서 신구 할아범과 주인공이 연상되는-청년에게서 뭔가를 감지한 모양이다. 청년은 이때부터 몇 달 간의 투자전쟁에 몸을 싣게 되고 이것은 그의 인생을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든다. [그곳은 근면과 성실성 같은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덕목이 별 의미를 갖지 못하는 세계다. …일단 뼈까지 시장에 담그고 나면 이쪽 세상으로 되돌아오긴 어려울지도 모른다. 마켓을 지배하는 황금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노동의 대가가 아닌, 리스크를 감수한 대가로 벌어들이는 돈에 맛이 들기 때문이다.]
『빅 머니』는 청년이 노인을 만나 마쓰바 은행을 상대로 한 투자전쟁을 치르는 몇 달 간의 이야기다. 노인은 그 시간 동안 청년에게 마켓이라는, 돈이 돈을 부르고 돈이 사람을 먹어치우는 무서운 세계를 보여준다. 노인이 마쓰바 은행을 상대로 전투를 감행하게 된 데는 해묵은 은원도 있고, 변액 융자 보험 피해자들에 대한 나름의 정의감도 있었다. 근데 그 정의감이란 것에서 좀 피식하게 되었다. 그 피해 노인들의 이야기가 슬슬 몰아치는 부분에선 '어이, 제발 정의인양 잰 체하지만 말아줘.' 라는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시대가 변했어. 한 나라의 성쇠를 판가름하는 파도가 몇 차례 지나갔네. 이제부터는 청운의 로망도, 다같이 일하고 다같이 잘 살자는 공동성장도 기대할 수 없어." 이야기는 그저 너무도 변한 오늘의 시장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더 이상 생산하고 판매하여 수익을 올리는 것으로는 경제의 한 귀퉁이에도 다리를 걸칠 수 없는 미친 시대에 '나는 마켓과 상관없어, 난 돈놀이 몰라, 투자? 그게 뭔데?' 라고 아무리 아닌 척해봤자 전 세계를 덮고 있는 시장의 우산에서, 그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 모르는 우리는 어쩌나. 그저 당할밖에 도리가 없다, 보험 피해자인 그 불쌍한 노인들처럼. 이 책을 읽으면 당하지 않느냐? 물론 아니다. 돈도, 기술도, 두뇌도, 근성도, 하다못해 체력조차 없는 나는 앞으로도 계속 당하고 살 것이다. 나와 상관없는 누군가가 흔드는 마켓의 우산, 그 우산이 만드는 그늘 아래서 웃고 울 것이다. 그래도 알고 당하는 거랑 모르고 당하는 거랑은 다르지 않겠냐고? 다르긴 뭐가 달라, 마찬가지지. 눈물 콧물 뽑는 건 마찬가지지.
마쓰바 은행의 주가가 77엔에 이르고 노인이 매수 주문을 냈을 때야 증권거래법 위반에 생각이 미쳤다. 나는 그렇다 치고 그 청년은 정말 그 때까지 거기에 대해선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걸까? 그렇담 그는 마켓이라는 마약에 빠져 정신 못 차리고 있었음이 분명하고, 그게 아니라면 작가가 그 뻔한 결말로 이끌기 위해 미리 안배한 것일 텐데…… 그 결말이 너무 뻔해서 이야기는 입체감이랄까 그런 것이 없더란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