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든 씨의 사탕가게 - '이해의 선물' 완전판 수록
폴 빌리어드 지음, 류해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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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치지도 않는 기운으로 끊임없이 재잘거리고 움직인다. 극장에서는 통로를 달리거나 울어대고, 식당에서는 접시를 엎고 꺄르르 웃어댄다. 나는 이런 아이들에게 여유나 친절이나 아량이나 배려 따위를 보일 수 없다. 그렇지만 아이들이란 원래가 그렇게 기운이 좋고,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게 생겨먹었다. 세상이 온통 신기한 것들 천지니까. 이런 아이들의 생김을 마음으로 이해하고 받아주어야 아이들은 밝고 건강하게 자랄지도 모르겠다.

 

주인공 폴은 다행스럽게도 그의 철없는 모든 행동을 마음으로부터 이해하고 받아들여준 어른들을 많이 만났다. 그래서 힘든 성장과정을 이겨내고 따뜻한 사람으로-그의 가게에 열대어를 사러 온 아이들에게 보인 그의 행동은 그가 따뜻한 사람임을 알려준다-자랄 수 있었다. '성장통'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이야기는 그런 어른들과의 추억을 모은 것이다.

 

은박지에 싼 버찌 씨앗을 들고 가서 사탕을 잔뜩 살 수 있었던 것은, 돈은 모르지만 달콤한 사탕의 맛은 알고 있었던 아이의 그 초롱초롱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할아버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이를 성가셔하는 내가 보기에 폴은 유난히 사건과 사고를 많이 일으키는 아이였다. 공원에 불을 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나중에 이모 댁에 가서도 감자를 구워먹느라 소방차가 출동할 일을 만든다. 총을 잘못 만져 고양이를 죽이고 집을 물바다로 만들었으면서도 또 소총을 가지고 기차 칸의 등을 맞춘다. 깜짝 놀라거나 혼이 나는 것은 잠시 뿐이다. 아무것도 그의 호기심을 막을 수가 없었다.

 

폴이 만난 수많은 이해심 많은 어른들 중에서도 안내를 부탁합니다씨와 베커아저씨가 가장 인상 깊었다. 전화가 흔치 않던 시절에 폴은 자신의 집에 있는 전화로 안내를 부탁합니다씨와 만났다. 어려운 일, 걱정스러운 일, 모르는 일이 생기면 언제나 수화기를 들고 안내를 부탁합니다를 찾았다. 그런 폴에게 안내를 부탁합니다씨는 성의를 다해 응해주었다. 갑자기 이사를 가고 새 집에서 만난 검은 전화기를 보며 이런 흉측한 물건 속에 안내를 부탁합니다씨가 있을 수 없다며 반짝반짝 빛나던 참나무 통으로 만들어진 전화기를 생각하던 폴은 결국 미운 새 전화기를 바닥으로 밀어 떨어뜨린다. 이런 모습들이 아이의 심리와 그에 따르는 행동을 정말 잘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베커아저씨의 동네를 떠날 때, 아저씨가 마지막으로 폴에게 주었던 선물은 품평회에 출품하여 최우수상을 노리던 큰 양배추였다. 아저씨가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밭으로 찾아가 몰래 양배추를 뽑아 먹던 행동은 아저씨를 귀찮게 만드는 것이었지만 외로운 아저씨에게는 고마운 친구가 생긴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저씨는 품평회에 출품하는 대신 폴에게 작별 선물로 양배추를 준 것이다.

 

아이들은 천사가 아니다. 언제나 말썽을 달고 다니는 작은 악마에 가깝다. 그렇지만 그들의 말썽은 순수함에서 오는 것이다. 지켜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야 그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남을 배려하고 이해할 수 있는 건강한 어른이 될 것이다. 작가의 추억담은 성인인 독자에게는 함께 추억할 수 있는 아련함을, 어린 독자에게는 자신들도 당장 시도하고 싶은 모험을 선사한다. 누가 읽어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기분이 좋아질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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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1
미우라 시온 지음, 윤성원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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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을 끄적이기 전에, 이 책의 구매를 고려 중인 분께는 가능한 한 초판을 피하라는 말을 미리 해두고 싶다. 나는 북폴리오의 책이 좋다. 한손에 들어오는 단출한 장정이 맘에 들어 좋고, 가네시로 가츠키나 온다 리쿠같은 작가를 만나게 해주어 고맙다. 생소한 작가라도 북폴리오의 선택을 받은 작가라면 어느 정도는 신뢰한다. 미우라 시온의 책을 들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책을 읽게 되어 나는 좀더 행복해졌다. 그런데… 오탈자가 너무 많았다. 근래 구매한 책 가운데 초판은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오탈자가 있었지만, 이 책은 진정 그 분야에서 최고였다.

 
단거리 달리기는 화려하다. 천분의 일초를 다투는 선수들의 폭발적인 힘과 리드미컬하게 오르내리는 온몸의 근육. 특히 결승선을 향해 가슴을 내미는 그들의 흔들리는 얼굴은 달리기神에게 선택받지 않고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세계가 있음을 알려준다. 그에 비해 장거리 달리기는 관중들의 눈을 붙잡아두기 힘들다. 운동장에서 여러 경기가 진행될 때 장거리 주자들은 조용히, 마치 고립된 섬처럼 경기장의 모든 것에서 등을 돌리고 자기만의 세계에 들어 앉아 고통과 싸운다. 내 눈이 그들을 떠나 필드의 화려한 경기에 매료된 사이 그들은 어느새 몸의 한계를 넘어서고 정신의 한계 위에 올라서서 상체를 흔들며 턱을 치켜들고 마지막 호흡을 쥐어짜며 결승선을 향한다. 단거리 선수의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자세와는 달리 장거리 선수들의 마지막은 거의 언제나 괴로움이 함께 한다. 그들의 달리기에는 화려함이 없지만 결승선을 향해 힘겹게 몸을 옮기는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무엇이 있다. 한계점을 넘어서서까지 다리를 멈추지 못하게 만드는 달리기의 매력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간세 대학 육상부 기숙사인 지쿠세이소에 드디어 10명의 인원이 모였다. 주장이자 대학 4년 동안 하코네 역전 경주만을 꿈꿔왔던 기요세를 제외한 나머지 주민들은 그곳이 육상부 기숙사인지도, 자신들이 육상부원인지도 모른 체 방세가 싸다는 이유만으로 이 낡은 아파트에 모여들었다. 열 번째이자 마지막 주민인, 달리기신에게 선택받은 가케루가 지쿠세이소에 들어온 순간, 기요세의 꿈은 잠을 벗고 현실이 되었다. 난데없는 역전 경주 출전 소식에 주민들은 당황하지만 기요세의 설득에 그들은 어느 새 달리고 있었다.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는 두 가지 멋진 세계를 독자에게 선사한다. 그 하나는 달리기의 세계다. 직접 달려보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영역까지 책을 통해 맛볼 수는 없겠지만, 달리기라는 움직임이 가진 매력만은 넘치도록 깨닫게 된다. 달리기가 아름다운 것은 결벽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그 단순함 때문이다. 달리기 선수의 몸이 아름다운 것은 그 몸에 고독하게 달려온 그의 달리기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기요세, 유키, 가케루, 니코짱, 쌍둥이, 킹, 무사, 왕자, 그리고 신동이 여느 달리기 선수들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하코네 역전경주를 통해 홀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달리기라는 세계에서 손 내밀 수 있는 유대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것이 독자가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멋진 세계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대신에 고맙다고 말할 수 있는 서로에 대한 믿음의 세계가 따뜻하게 그려지고 있다.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는 달리기를 보여주지만 속도를 말하지는 않는다. 속도가 아닌 강인함을 말한다. 장거리 선수에 대한 최대의 찬사는 '강하다'이다. 이 강인함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상대와의 유대가 필요하다. 지쿠세이소의 주민들이 모두 빠른 선수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한 선수였고 앞으로도 강한 선수로서 세상을 달릴 것이다. '강인함'이라는 찬사는 비단 장거리 선수만을 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인생이 달리기라면 우리 인생도 홀로 가는 길이다. 고독할 수밖에 없으며, 그 고독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그 안에서 어깨끈을 넘겨받을, 넘겨줄 누군가를 만날 수는 있을 것이다. 고독한 역주를 마음으로 이해하는 동지를 만날 수는 있을 것이다.


인생이 장거리 달리기에 비유되듯 우리를 향한 최대의 찬사도 '강하다'가 될 것이다.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달리는 내 다리가, 몸이, 강한 바람을 불러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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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콘 근크리트 - 전3권
마츠모토 타이요 지음, 김완 옮김 / 애니북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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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폼을 잡으면서 거하게 얘기를 풀어보자면, 이것은 '순수'에 대한 이야기다. 순수한 아이들, 순수한 폭력, 순수한 피, 순수한 저항과 순수한 추억을 순수하게 그리워하는 이야기다. 뭐, 힘 빼고 얘기하면 지구별 일본국 어느 뒷골목에 있는 타카라쵸 지지리 궁상들의 너저분한 이야기일 뿐일지도 모르겠지만.

언제인지, 지구상 어디쯤인지 알 수 없는-그저 지구별 일본국이라는 것만 확인 된-그곳에 타카라쵸라는 거리가 있다. 기괴한 모양의 건물들, 음산한 문구의 간판들, 신기한 오브제들, 툭툭 불거진 불편한 얼굴의 수많은 사람들로 채워진 이 동네는 생쥐라 불리는 야쿠자 스즈키에게 술, 담배, 여자, 도박, 돈벌이를 가르쳐준 곳이다. 스즈키의 똘마니 키무라에게는 스즈키라는 목표를 세우게 한 곳이다. 이 벅적지근한 동네에 야쿠자만 있을리 만무하다. 자신이 제복 경찰이었을 때는 그래도 따뜻한 동네였는데 지금은 확실히 싸늘해졌다는 낡아빠진 멘트를 심심하면 흘려보내는 형사 후지무라와 그 낡은 멘트에 "함부라비가 세운 바빌로니아 시대부터 동네란 건 냉랭했어요."라는 쿨한 대답을 준비하는 형사 사와다도 있다. 그리고 이 거리의 주인이 있다. 내 동네라고 당당하게 떠벌리는 쿠로와 그의 반쪽 시로다. 부모가 없는 시로와 쿠로는 타카라쵸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해져야 했다. 쿠로는 시로를 지키기 위해, 아니 시로와 함께 살아남기 위해 피와 폭력을 신앙으로 삼게 되었고, 시로는 그런 쿠로를 돌보는 것으로 신앙을 삼은 모양이다. 이렇게 고양이와 생쥐와 후줄그레한 형사는 나름 균형을 잡으며 사이좋게 살아가고 있었다, 타카라쵸에서.

그런데 언제부턴가 타카라쵸의 균형이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경찰의 등쌀에 도시를 떠났던 스즈키가 돌아왔고, 시로는 외지인이 동네에 많이 나타난다고 중얼거린다. 어제까지 경품 초콜릿을 나눠주던 점장이 있던 파칭코는 '어린이의 성'이라는 리조트로 변했고, 리조트와 함께 타카라쵸를 내 도시로 만들겠다는 뱀이 나타났다.

폭력 마니아 쿠로와 시계 마니아 시로는 때려서 빼앗는다. 그걸로 살아가고 있다. 스즈키는 야쿠자다. 싸늘한 동네라면서도 잘만 살고 있는 후지무라와 합법적으로 총질을 하고 싶어 형사가 된 사와다는 정의의 사자가 아니다. 이런 그들이 어찌된 일인지 뱀의 등장 이후 꽤나 그럴싸하게, 사람 냄새 팍팍 풍기며 다가온다. 덧붙여 어설픈 아마추어처럼 보이기도 한다. 뱀이 나타나기 전까지 잔혹하고 뻔뻔하고 차가운 프로처럼 보이던 이들이 말이다. 그것은 이들이 변하는 타카라쵸를 붙잡으려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변화에 저항하는 그들 앞에 놓인 길은 순탄치가 않았다. 그 길은 피 흘리고 머리가 깨지고 팔다리가 으스러져야 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나의 타카라쵸'를 지키기 위해 그 길을 가겠다는 그들은 더 이상 잔인하지도 뻔뻔하지도 믿음직스런 프로도 아니었다.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한다는 사실 뿐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저항하는 인간은 늘 문제를 떠안게 될 뿐이다. 그러나 그 변화란 것이 언제나 긍정적인 의미로서 기능하는 것은 아니니 가끔은 저항이 필요하다. 당연히 고통이라든가 고뇌라든가 하는 문젯거리가 옵션으로 따른다. 저항은 문제를 낳지만 때때로 새로운 답을 펼치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타카라쵸 지지리 궁상들의 저항이 답을 펼치진 못했다. 그들은 사라지거나 떠나야 했고, 남아있는 자는 그저 지나간 봄날을 노래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타카라쵸는 건재하다. 그것이 타카라쵸의 색깔이 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리고 또 누군가가 그 타카라쵸를 다시 다른 색으로 물들이려고 나설 것이고. 그렇게 세상은 변해간다. 나쁜 쪽으로든, 좋은 쪽으로든. 생각해보면 변하는 세상은 결국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거기 적응해 살다보면 결국 그게 그것인 세상이 되어버리니까. 그럼 결국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나는 한번도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재주 없음을 빤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만화를 즐겨 읽음에도 그 직업을 동경해본 적은 없다. 지금도 물론 그렇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철콘 근크리트』를 읽으면서 마츠모토 타이요가, 그의 재능이 죽을 만큼-그래그래 과장법 좀 써봤다-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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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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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5월, 유소기(劉少奇)가 주재한 중앙정치국 확대회의 기간 중에 처음으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세계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최고 정치지도자에 의한 반역사적 대중운동이 시작되었다. 1976년 모택동의 죽음과 사인방의 몰락으로 문혁이 종결되기까지 10년의 기간을 중국인들은 '10년의 대재난'이라고 한다. 문혁의 광풍은 시대와 사람, 사물을 가리지 않고 휩쓸었다. 죽어 흙이 된 공자에서부터 수많은 문화유산들, 학자와 대문호는 물론이려니와 등소평 같은 정치인과 어린 학생에게까지 피바람이 불었다. 그 중에서도 1967년부터 1969년 사이 중·고교 졸업에 해당하는 세대를 문혁의 가장 큰 피해자로 본다. 이들은 문혁으로 인해 학교 수업을 전혀 받지 못했다. 작품에 등장하는 '뤄'와 화자인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책을 읽을 만하게 되니 산골로 재교육을 와 아무 것도 읽을 것이 없다는 말을 종종 한다. 이 작품이 작가의 자전적 소설임을 생각하면 작가가 바로 그 세대일 것이다.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는 위에서 장황하게 얘기한 그 시대에 의사 부모를 둔 죄(?)로 인민의 적이 되어 '하늘긴꼬리닭'이라는 산중으로 하방된 두 소년의 이야기다. 열여덟, 열일곱의 이들은 부모와 떨어져 생전 처음 겪는 시골 생활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똥지게를 지고, 언제 내려앉을지 모르는 탄광을 기고, 말라리아에 걸리는 이들의 생활은 고난보다는 명랑과 유쾌한 모험의 어느 언저리쯤으로 보인다. 그들 삶을 모험으로 채색해 준 것은 우연한 기회에 손에 넣게 된 발자크의 소설 [위르쉴 미루에]였다. 발자크의 소설을 만나고 소년들은 자유와 사랑 같은 평범하고 지극히 인간적인 인생에 눈뜨게 된다.

작품은 고생스런 재교육의 하루하루를 보내는 소년들이 금서가 된 서양문학을 한 줄기 빛 삼아 버텨내는 4달 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부모는 인민의 적이 되어 만인 앞에서 자아비판을 했고, 여전히 힘겨운 삶을 어딘가에서 보내고 있다. 자신들도 다시 도시로 나가 이전의 생활을 영위할 가능성은 천분의 삼, 즉 3퍼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들은 3퍼밀을 떠올리는 시간보다 근처 마을 재봉사의 딸인 바느질 하는 처녀와 발자크에 더 관심을 둔다.

인물이 처한 상황과 달리 이야기는 유쾌하게 흘러가는데, 이에 대해 작가는 그것이 중국인 특유의 낙천성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중국인의 국민성과 더불어 문학이 지닌 힘이고 인간이 지닌 힘일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문학은 인간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고, 인간은 힘들수록 문학의 힘에 의지하려 한다. 모두가 무산계급 혁명을 위해 감정을 잃고 살아야 하는 시대였지만 영화-선전선동의 수단이었다고 해도-는 상영되고, 사람들은 눈물짓는다. 문학이 금지되어도 어딘가에는 책이 있고 그것을 읽으며 울고 웃는 사람들이 있다. 두 소년의 구전 영화에 눈을 빛내고 마음을 열어주던 마을 사람들과 촌장, '나'의 몽테크리스토 백작 이야기를 아흐레나 이어가게 했던 재봉사, 발자크를 통해 다시 태어난 바느질 하는 소녀, 푸 레이의 문체를 기억하고 있던 산부인과 의사, 그 의사의 한 마디에 푸 레이를 위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나'까지 모두 문학의 힘을 알고 있었던 평범한 사람들이다. 우리 어딘가도 문학의 힘을 기억하는 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볼거리 놀거리가 너무 많은 오늘날이라 그것은 잠들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언제고 우리가 힘겨울 때 그것은 깨어나 우리가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힘을 줄 것이다.

작가는 실제로 재교육을 받던 시기에 발자크로 인해 힘을 얻었다고 했다. 작가 뿐만 아니라 당시를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문학의 힘으로 그 시절을 버텨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읽을거리가 없는 상황에서, 이전까지 자신을 지탱하던 모든 것이 무너진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문학을 통해 울분을 토로했고 희망을 부여잡았다. 문혁 시기의 지하문학은 숙청된 문인들이나 하방이란 명목으로 농촌이나 공장으로 흩어진 학생들을 중심으로 성행했고, 그것은 문혁 종결 후 중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밥은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도록 돕지만 그것만으로는 인간으로서 살아간다고 할 수 없는 모양이다. 뤄와 '나'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출판사에서 어련히 알아서 했을까 싶긴 하지만 읽으며서 좀 의심스러웠던(?) 부분. 작가의 이름이 '載思杰 다이시지에'로 표기되어 있는데 '戴思杰 다이쓰지에'로, 본문에 나오는 바-엘-자-케는 바-얼(er)-자-커(ke)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지. 사실 작가가 프랑스로 귀화했고 프랑스어로 쓰여진 책이라... 하지만 역시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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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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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리쿠와 만나다! 인생이 좀 더 즐거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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