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과 기계문명
양동휴 외 / 서울대학교출판부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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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 괜찮은 책이 잘 알려지지 않고 묻혀있다는 것이 아쉽다. 한 명의 경제학자와 두 명의 영문학자가 쓴 이 책은, 산업혁명을 영국에 초점을 맞추어 그 경제사적 의의는 무엇인지, 산업혁명이 야기한 변화들이 당대 사람들의 오감을 통해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러한 변화들이 문학과 예술에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그리고 산업혁명이라는 전대미문의 변화과정에 대한 사상적 대응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다루고 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산업혁명은 유럽에서 영국의 선도로 이루어졌고, 그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는 당연히 유럽인들에 의해 행해졌다. 그래서 물론 이 책도 외국에서 이루어진 기존 연구들에 기반해서 쓰여진 것이기는 하다. 그래도 상당히 폭넓은 문제의식을 갖고 쓰여진 책이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양동휴 선생의 글에는 산업혁명을 두고 일어났던 경제사에서의 논쟁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으며, 윤혜준 선생과 송승철 선생의 글에서는 산업혁명이 야기한 전사회적 변화에 대한 대응으로서 마르크스주의, 공리주의 등이 다루어지고,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말하는 '문화와 사회' 전통이 소략하지만 핵심적인 인용문과 간명한 해설을 통해 제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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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와 자본주의
베르너 좀바르트 / 문예출판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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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바르트는 자본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그가 이야기하는 것을 단순한 명제의 형태로 환언하여 생각해 보면, 그것이 동시대의 또 다른 학자의 견해와는 명백하게 모순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또 다른 학자는 좀바르트와 거의 같은 시기에 독일에서 태어나서 비록 그보다 훨씬 단명했지만 현대 사회과학에 더욱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막스 베버이다. 좀바르트가 제시하는 명제와 베버가 제시하는 명제는 명백히 상충된다. 한쪽은 사치가 자본주의의 원인이라 하고, 다른 한쪽은 노동윤리와 검약이 자본주의 초기의 특성임을 주장한다.

물론 이 두 사람의 주장이 전적으로 모순되고 양립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베버가 훨씬 섬세한 논의를 이끌어가고 새로운 용어를 도입해 가며 독단적이지 않은 다원주의적 설명의 수준에서 자신의 견해를 표출하고 있기는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둘은 근대 초 자본주의의 형성인(形成因)으로서 서로 다른 영역, 서로 상이한 집단―좀바르트는 궁정·귀족·졸부, 베버는 종교개혁 이후의 종교적 소수집단―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둘은 동일한 대상에 대해 상충되는 진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바르트는 1912년에 『사치와 자본주의』를 발표함으로써 베버와 논쟁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여기서 하나 질문해 볼만한 것은, 왜 이들이 동시대에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개념을 다룰 수밖에 없었는가, 그들의 학문에 있어 '자본주의'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는가에 관한 것이다. 어찌 보면 베버와 좀바르트는 공통점이 더 많다. 두 사람 다 프로이센의 유력한 정치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그래서 김나지움 교육을 통해 어렸을 때부터 탄탄한 문헌학(philology)적 수련을 받을 수 있었고, 경제적인 곤란에 무감한 채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잡지』를 간행하기도 했고, 연구에 충분한 시간을 쏟을 수 있는 독일의 대학 교수였으며, 경제·사회학자였고, 사회주의자라기보다는 독일 민족주의자였다. 그러나 다른 어떤 공통점보다 두 사람을 하나로 묶고 있었던 것은, 이들이 칼 마르크스의 시대 이후에 태어났다는 것, 그래서 그의 압도적인 영향 하에서 학문을 해야 했으며, 더군다나 경제사회학을 한다고 할 경우 마르크스에 대한 답을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일 것이다. 베버의 학문은 여러 측면에서 '마르크스의 유령과 나누는 대화'라는 말로 비유된다.

특히,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마르크시즘의 사적 유물론에 대한 반증으로서, 즉 '상부구조'에 해당하는 것이 '토대'의 발전을 촉진시킨 반례로서 제시되었고 또 그렇게 해석되는 것이다. 이러한 틀에서 보면, 좀바르트도 마르크스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표출한다는 점에서 베버와 같은 입장에 서 있다. 그는 책 속에서 '조악하게 이해된 '유물사관'으로 사치현상과 같은 미묘한 문제에 간섭하려고 하는 얼간이들에 대해서는 아예 아무말도 않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들이 마르크스에 대해 만들어낸 자신들의 자리는, 이렇게 '미묘한' 문제들, '상부구조'에 해당하는 것들에 천착하는 자리였으며, 이들의 고민은 마르크시즘 내에서의 사적유물론·경제결정론에 대한 반성과는 별개로, '문화'를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에게 지속적인 영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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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그대 - 1983년 제7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서영은 외 / 문학사상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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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그대>의 작가 서영은이 1983년 이상문학상을 받으면서 밝힌 수상 소감을, 나는 2년 쯤 전에 읽었는데, 도중에 어느 구절에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소감문에서, 자기 작품에 대한 이 시대 독자들의 평가에 초연하여 세잔느 같이 사후에나 인정받는 작가가 되는 것을 더욱 큰 영예로 여기겠다고 했다.

거장 혹은 천재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은 역사 속의 숱한 예술가들이 죽은 후에야 자신의 작품세계를 제대로 평가받았던 일들을 되새겨 볼 때, 그런 마음가짐이 과연 진정한 작가정신의 발로라고 여길 만도 하다. 그러나 그런 예술가들이 생전에 진정 당대의 세평에 초연했던가? 그들의 위대함은 세상과 그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자신의 내면과 자신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시대와의 처절한 투쟁 속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사후에나 인정받는 작가가 되고자 한다는 말은 시대와 맞설 의지가 없는 범용한 작가의 치기어린 망상을 표현한 데 지나지 않는다. '미래'의 삶을 향한 투쟁은 항상 '현재'에 투신하는 투쟁이며 그것은 동시에 '역사'를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역사를 위한 투쟁은 다시 말하면 현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투쟁이다.

현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은 그 사실로부터 충분한 시간이 흐르면 보다 더 객관적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그런 이유로 현재의 사실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투쟁을 억압할 수 없다. 위대함은 당대에 승리하건 패배하건, 바로 그 동시대와의 대결이라는 조건에서 나올 뿐이다. 나는 서영은의 문체에서 배어나오는 저 진한 고독감 앞에서는 어찌할 수 없으나, 그러한 견해는 선뜻 수긍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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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의 거장들 - 인물로 읽는 인류학의 역사와 이론 호모사피엔스
제리 무어 지음, 김우영 옮김 / 한길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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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요약하려는 자들은 지식과 사랑을 모두 망쳐놓는 놈들이다.' 보통 책보다 조금 작은 판형의 책 456페이지 분량에, '인류학의 거장들' 스물 한 명이 '차곡차곡' 채워져 있는 이 글을 읽다보면 다 빈치의 그 말이 기억나다 말다가 한다. 이 책의 미덕이라면, 번역자가 말하고 있듯이, 인류학의 역사와 이론을 초창기부터 인물 중심으로 서술하되 메리 더글라스, 빅터 터너, 제임스 페르난데스 등과 같이 아직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현대의 인류학자들을 소개하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인 제리 무어는 미국 인류학 내에서 고고학을 전공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거의 믿기 힘들 정도로 광범한 문헌을 섭렵하여 각각의 학자에 대해 해설하고 있다. 책 앞부분에는 주요 학자들의 사진도 실려있어, 책을 읽으면서 현장을 누비고 연구하는 인류학자들을 훨씬 더 구체적인 이미지를 동원해서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거장들의 삶과 학문을 열 페이지 남짓한 분량에 요약하려다 보니 과히 단순화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는 인류학 초보자들을 위한 간략하고 균형잡힌 소개서를 쓴다는, 본래 지은이가 갖고 있었을 법한 의도에도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은이의 요약 자체는 훌륭한지 몰라도 그 요약된 글을 읽었을 때 책에서 언급되는 어느 학자의 이론체계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나친 요약이 풍부한 민족지적 자료에 기반하고 유장한 사유를 거쳐서 나온 학문체계를 도리어 무슨 암호같이 느껴지게 한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고, 타일러나 모건, 보아스, 뒤르껭, 사피어와 레비스트로스에 할당된 장들은 재미있게 읽을 만 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직접인용이 너무 많아 저자 자신이 각각의 인류학자들에 대한 자신만의 완결된 스토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번역은 딱히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번역인데, 원래 제리 무어의 문장이 그러한지 몰라도, 다소 조탁이 섬세하게 되어 있지 않고 이따금 투박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외국 인명을 표기함에 있어, '문교부 고시 외래어 표기법'에 기준하여 표기하였다고 했는데, '문교부'에서 교시판 표기법을 잘 읽어보진 못했지만, 기존에 계속적으로 표기되어 온 바 클리포드 기어츠, 루스 베네딕트, 멜빌 허스코비츠 등을 '거츠', '베니딕트', '헤스코비츠'로 각각 옮긴 것은 기존의 표기법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조금 의외였다. 이는 수고로운 번역에의 작은 흠이다.

한편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제리 무어가 타일러나 모건에 대해 언급하는 방식에 대해서, 엘리너 버크 리콕이 그러했던 것처럼 '천편일률적인 모건 비판에 대한 묘한 반발심'을 느낀다. 그는 이미 전통이 되어버린 레토릭으로, 모건과 타일러의 단선적인 진화론을 비판하고 있다. '타일러가 말하는 '물리적 법칙'이 서구 과학의 원리임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원리에서 벗어나는 인식론은 오류로 가득찬 전(前)과학적 미개함의 잔재일 뿐이다.' '편견에 물들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회를 등급화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수사법, 이러한 문장들은 인류학 교과서에 종종 등장하며, 일종의 정치적인 교정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들 초창기 진화론자들의 견해를 비판하는 엄밀한 '논리'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것 같다. 그러한 수사를 동원해 진화론을 비판하기는 너무나도 쉽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사회 혹은 문화의 진화론에 대한 학문의 진화론이 아닌가? 진화론에 대한 비판은 현대 사회과학에서 진화론에 거의 승리하다시피 했다. 진화론에 대한 비판은 결국 현재 학문적·정치적으로 '적자'이며 그 근거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우월한' 위치에서 구시대의 퇴락한 진화론을 내려다보며 비판하는 것은 아닌가. 그것은 그들이 비판하는 '진화론자'들의 논리와 다소 추상적인 수준에서 다를 것이 있는가. 거친 문제제기지만, 여하튼 반진화론 내지는 서구의 자기성찰이라는 레테르가 학문적 논쟁의 수준과는 또 다른 우열의 관계를 함축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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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과 권력
시드니 민츠 지음, 김문호 옮김 / 지호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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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과 권력은 저자인 민츠가 설탕의 역사에 접근하는 데 있어 매우 인류학적인 관점을 도입하기 때문에 다소 어렵고 때로는 산만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가 규명하고자 하는 것은 영국의 역사에 있어서 설탕과 연관되어있는 '의미'이며 그러한 물질의 '의미' 어떻게 권력에 의해 구성되는가이다. 유럽 세계에 있어 설탕이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중세 후기의 아랍을 통해서였으며 수세기 동안 상류계급의 전유물이었다.

설탕을 소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부와 지위를 과시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한 과시적 소비는 때로는 설탕을 '섭취하는' 것에서 나아가 설탕을 몸에 '바르는'(때로 의약품으로서) 데에까지 갔다. 18, 19세기에 설탕의 수요는 점점 늘어갔고 그에 따라 설탕 소비도 늘어갔는데, 이는 곧 그에 맞추어 설탕의 공급이 늘어났다는 것을 뜻한다. 설탕은 영국의 식탁에 저렴한 단순탄수화물을 제공해 주었으며 그에 따라 부유한 사람들의 전유물로서의 상징성은 감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그 '부유한' 사람들은 설탕 생산과 판매를 통해 엄청난 이윤을 축적했고 그것이 '가진 자'가 이끌어 온 근대 자본주의적 과정의 일부라는 것이다.

민츠는 이러한 과정을 당대의 문학과 연설을 통해 들여다보고 있다. 책 중간 부분의 문단들이 약간 응집성이 없고, 민츠의 문장 자체가 썩 빼어난 것은 아니지만, 인류학 혹은 식민주의, 영국 노동계급의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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