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의 코드, 록 Art@Culture(북하우스) 3
임진모 지음 / 북하우스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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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서적이나 문학 분야의 책만 읽어오다가, 오랜만에 <젊음의 코드, 록>이라는, 대중음악에 대한 책을 읽게 되었다. 굉장히 신선한 느낌이다. 클래식은 고사하고 록 음악에 대해서도 거의 문외한이다시피 한 나에게도 이 글은 굉장히 재미있었고, 또 읽는 데도 무리가 없었다. 내용상의 측면에서 나의 마음에 드는 것은, 엘비스 프레슬리로부터 비틀즈, 포크, 헤비메탈, 프로그레시브, 얼터너티브, 하드코어까지 록의 발전사를 개관하면서, 저자가 록이라는 대중음악에 대해 사회사적 지식을 동원해 알기 쉽게 해설하고 있는 점, 그리고 구미의 음악사를 다루면서 한국에서 록음악을 수용하는 역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에 와 닿는 사실은 이 책의 저자 임진모 씨가 어렸을 때부터 록 음악에 열광하고 심취하며 즐거워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자기 분야에 대해 쓰는 책은 읽는 사람에게도 즐거움을 준다.

이 책은 디지털 문화예술 아카데미에서 기획하는 사이버 강좌의 하나였던 임진모 씨의 강연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내용을 기술하는 방식이 상당히 친절하고, 각 챕터마다 매듭이 맺어져 머릿속에서 그때그때 정리가 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판형도 작고 분량도 200페이지를 조금 넘는 정도라서, 3-4시간 앉아서 죽 읽어내려갈 수 있는 부담없는 책이다. 나는 책에서 소개되는 노래들을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감상해 보며 읽었기 때문에 훨씬 많은 시간이 들었지만 말이다. 또 비록 컬러는 아니지만 뮤지션들의 사진이 많이 실린 것도 책 읽기를 지루하지 않게 해 준다. 이래저래 재미있고 간편해서, 이 강연 시리즈의 다른 책들을 읽어보고 싶고, 임진모씨가 쓴 다른 음악 관련 책들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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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상스러움 -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
진중권 지음 / 푸른숲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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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린 글들은 대략 1999년 상반기동안 진이 '한겨레21'에 '엑스리브리스'라는 이름의 고정 코너를 열어 연재한 장편(掌編)들이 주종이고, 몇몇 글들은 다른 곳에 기고한 글들인 것 같다. 책으로 묶으면서 새로 12개로 장을 나누어 각 글을 주제별로 묶었다. 글의 형식은 대개 철학적 저서나 자신이 논박할 저자의 문구에서 한 구절을 문두에 인용해 놓고 풀어내는 방식이다. 그러면서 내용은 굉장히 구체적이고, 당대 한국사회의 현실적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이 인용되는 책의 첫 부분에서, 철학적 사유로 시작해서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를 두고 전투적인 글쓰기를 하는 것은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지는데, 뒤로 갈수록 그 신선함이 자꾸 떨어져 간다. 뒷부분으로 가면 각 장을 통할한답시고 붙여놓은 주제가 걸맞지 않은 경우도 있고, 그가 특정 인물에 논쟁을 걸고 비아냥거리는 데에는 다소 지겹기도 하다.

사실 그의 입장에는 딱히 왈가왈부할 것이 없다. 대부분에 수긍한다. 나는 1999년 전후의 사건과 이슈들, 논쟁들을 다시 살펴본다는 느낌으로, 그리고 진중권이 제시하는 입장에 대부분 수긍하며 읽었다. 안티조선 운동, 여기에 대해 이문열의 '홍위병' 운운한 일, 여기에 극우언론들이 가세한 것 하며, 운동권 열사문화의 변태성, 복거일의 대책없는 자유주의, 최장집 임동원 등에 대한 언론의 공세, 당대비평의 일상적 파시즘론을 조선일보에서 정략적으로 이용한 것 등등, 당시에 자못 심각했던 일들, 또 그때 주목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던 일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는 경험이었다.

그의 입장은 요약적으로 말하면 우리 사회에서 최소한의 합리성이 관철되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자유지상주의와 극우보수주의가 자유주의인 양 오인되는 상황과 얼치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판치는 우리 사회의 상황은 타개되어야 한다듣 것일 게다. 그러나, 글쎄, 시종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읽기는 했지만, 그의 글쓰기 '행태'는 뭔가 걸리적거린다. 이런 뭔가 켕기는 느낌은 내가 지적엄숙주의에 빠져있다는 징후인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가 정작 제일-다소 강박적으로-좋아하는 것은 논쟁, 다시 말하면 말싸움 같다. 웃음을 자아내는 레토릭을, 또 어떤 때는 욕지거리를 굉장히 빈번하게 구사하긴 하지만 그건 매번 비웃음이다. 웃기기는 한데, 폭소를 터뜨리게 하는 것은 아니다. 깔끔(?)하지가 않다.

서문에서 발터 벤야민을 인용해 말한다. 인식적 전환이 있을 때마다 서술의 문제에 직면하는 것이 철학적 글쓰기의 본질을 이룬다는 말이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특정한 문제의식, 특정한 시대정신을 반영하기 위해서는 글을 어떤 스타일로 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스스로의 글쓰기를 광대적 글쓰기, '조커'식의 글쓰기라 명명하는 진중권은 자신만의 스타일의 존재 근거를 여기에서 찾는다. 모든 것이 고상하고 근엄해서 역겨운 시대에 자신은 광대가 되는 것이라고. 그러나 이런 설명 자체가 멋있기는 하지만 너무 거창하지는 않은가.

나는 그의 글쓰기가 '광대'같은 글쓰기라고, 별로 인정해 주고 싶지 않다. 사람들은 더러 그를 재기발랄하다고 하지만, 난 거기에 조금 뜨악하다. 그가 매번 강조하는 유물론에 의거해 설명하자면, 그가 <폭력과 상스러움>에서 구사하는 스타일은, 인터넷이라는 기술적 매체가 만들어낸 매우 물질적인 것이다. 굳이 이름붙이러면 시정잡배적 글쓰기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인터넷 상의 논쟁에서 이용되는 어법과 욕설이 구사되는 바로 그 문체에 지나지 않는다.

난 차라리 광대적 글쓰기나 욕의 미학에 대해서라면 70년대 김지하가 譚詩에서 쓴 것이나 김용옥이 80년대와 90년대 초에 분에 겨워 썼던 글들을 높이 사겠다. 스타일에 대한 고민의 깊이에서, 진중권이 따라잡을 수준은 아닌 것 같다. 진중권 같이 저력있고 전투적 글쓰기를 하는 논객의 존재가치를 어찌 부정하랴만은,나는 이따금 그의 행간에서 세상에 대한 진정성이 안개에 싸인 것을 본다. 고독으로부터 나오는 도저함에서 배울 것도 있을진대, 그는 그것을 너무 간단히 무시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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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굴뚝청소부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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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쯤 전에, 어느 신문에선가 이 책의 저자인 이진경씨가 나온 대담이 실렸었다. 그 중의 한 구절이 이러하다. 이진경씨는 80년대 대학생들에게는 '사사방'(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으로, 90년대 대학생들에게는 '철굴'(철학과 굴뚝청소부)로 통한다고.

이 말은 2000년대에 대학에 입학한 내게 묘한 느낌을 갖게 한다. 나에게 이진경씨는 사사방으로도, 철굴로도 '통하지' 않는데, 그렇다면 나는 80년대의 세례도, 90년대의 세례도 받지 못한 세대인가? 2000년과 19XX년. 숫자가 지독하게 역사를 구획해 버린다. 비록 입학하고 나서 독서욕에 불타 넘겨 본 여러 새내기 추천도서 목록에 이 책은 빠지지 않고 나왔던 것 같지만, 학회라는 전통이 사라진 그 시기에 나에게 이 책을 '읽어주는' 사람은 없었고 나는 따라서 이 책을 '읽게 되지' 않았다. 그래서 새내기 시절, 이 책과 나와의 만남은 유예되었고, 결국 '철굴'은 대학 3학년을 마치고 나서 이제야 읽게 된 - 여기저기에 밑줄을 긋고 나의 생각을 행간에 채워 넣으며 열심히 읽기는 했지만 - '평범한 책' 축에 끼게 되었다. 내 책상에는 지금, 대학 도서관에서 빌려 온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이 함께 놓여 있는데, 이걸 보면 정말이지 '철굴'과 나의 만남은 '시대적'인 만남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탈시대적이라는 점에서 시대적인 만남일 수도 있다. 나와 같은 세대에게 있어, '철굴'과 '사사방'은 그들 자신의 시대를 이탈하여 독자와 만나고, 이따금 하나의 책상에서 저렇게 섞이는 것이다. 나는 같은 시점에 별다른 의식상의 모순을 겪지 않으며 두 권의 책을 읽고, 또 기실 고등학교 때부터 ('다현사'나 '태백산맥'과 함께) 이진경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았던 것이다.

여하튼,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냥 서양 근대철학 개설서 쯤으로 알고 있었는데, 읽고 나니 그만큼 '단순한(평면적인?)' 책은 아니었다. 이 책은 1993년에 이진경씨가 민예총 문예아카데미에서 한 철학 강연을 채록한 것인데, 10년이 지난 지금 이진경씨의 전위적(?)인 사유와 실천의 연장이 되는 철학사 정리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철학사를 쓰는 것 뿐만 아니라 철학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언제나 그 이야기하는 자가 철학이라는 것에 대해 갖고있는 주된 관심의 표명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최근에 이진경씨가 <노마디즘>을 펴내며 이 책을 들뢰즈/가타리와의 우정의 기록이라고 하였다면, 이 책은 '들뢰즈/가타리로 가는 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다소 경박한 수사가 허용된다면 '들뢰즈/가타리를 위해 새로 쓴 철학사'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은 서양근대철학에 대해 쓰고 있지만 그 시작에서부터 (특히 맑스의 입장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를 도입하는 방식으로, 혹은 그 반대?) 근대철학을 넘어서려는 기획으로 충만해 있다. 그만큼 이 책은 - 가치중립적 의미에서 - 편향된 책이며, 그래서 또한 재미있게 읽힌다. 그러니까, 이 책은 단순한 교양강연의 원고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문제의식의 소산이며 따라서 강의인 동시에 공부이다. 그의 문제의식 하에서 칸트가 너무 '죽은 개' 취급을 받는다거나, 레비스트로스의 연구결과들이 지나치게 요약되는 느낌이 없지 않으나, 그의 공부의 궤적은 좇아가보지 않으면 안될 것만 같은 열정과 진지함의 흔적을 도처에 남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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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은 다른 곳에 - 교양선집 16
밀란 쿤데라 지음, 안정효 옮김 / 까치 / 198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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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시작한 날은 2002년 1월 17일이고 다 읽은 날은 2월 6일이다. 그럼 이 책을 다 읽는 데 무려 20일이나 걸렸단 말인가. 아니다, 실제로 내가 이 책을 붙들고 있었던 날은 다 합쳐봐야 나흘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20일이나 지나서야 이 책을 덮을 수 있었던 이유는 처음 사흘 동안 200여 페이지를 읽고 나서 나머지 130여 페이지를 남겨둔 채 한동안 이 책을 들여다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특별히 바쁜 일이 있어서도 아니고 책이 지루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십 수일을 쉬어야 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쉴 새 없이 터져나오는 위트, 메스로 파고드는 듯한 풍자―소설 읽기의 쾌락이 도를 지나쳐 나를 피로하게 했다.

피로하다는 것, 이 소설이 좀처럼 포근한 휴식을 주지 않는다는 것.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농담』을 읽고 쿤데라의 소설을 짐작하는 나로서는 이 책이 여전히 낯설다. 이 책은 1969년에 쓰여졌고, 쿤데라는 체코의 1968년과, 정확히 말하면 68년의 사건으로 하나의 매듭을 지은 48년 이후의 정치적 사건들과 충분한 심리적 거리를 두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1965년에 쓰인 『농담』이나 1982년에 쓰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와 같은 패러독스와 풍자 속의 따뜻한 감성, 담담한 관조가 이 책에서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서정적인 세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어머니는 어떤 신비한 역할을 담당하는가? 그리고 만일 젊음이 무경험의 시대라면, 절대성에 대한 열망과 무경험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존재하는가? 또는 절대성에 대한 열망과 혁명적인 열정 사이에는? 쿤데라는 이러한 질문들에 걸맞는 배경으로서 1940년부터 1968년까지의 체코를 '택한다.' 그가 만들어 낸 시인인 야로밀은 스무 해라는 짧은 삶 속에 랭보, 앙드레 브레똥, 이르체 볼커, 푸쉬킨, 빅토르 위고, 미하일 레르몬토프의 인생을 구현한다. 그리고 40년대의 혁명을, 아울러 68년의 혁명까지 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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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조류의 중국 - 현대중국, 그 저항과 모색의 역사
마크 블레처 지음, 전병곤 외 옮김 / 돌베개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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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건 KBS1 TV에서 목요일마다 하는 ''TV책을 말하다''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였다. 그때 조너던 스펜스의 <현대중국을 찾아서>가 소개되었는데, 기타 중국에 대한 책으로 몇가지 더 소개된 책 중에 같은 저자의 <천안문>과 <반조류의 중국>이 기억에 남는다.그리고 다른 것에 신경쓰느라 한참 잊어버리고 있다가, 학교에서 중국 관련 수업을 듣게되었다. 수업의 주교재가 로이드 이스트만의 <중국의 지속과 변화>와 바로 이 <반조류의 중국>이었다.그런데 이 책을 두 번이나 읽었지만, 무엇보다 이 책은 너무 '재미'가 없다. 물론 학술서가 항상 재밌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책이 재미있다는 것은, 글쓴이가 자신의 글을 많이 팔아먹기 위해 책에 첨가한 양념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연구 대상에 대해 글쓴이가 어느정도로 애착을 가지고 있느냐 - 어느정도 자신의연구에 몰입해있느냐 - 얼마나 스스로 재미있어하고 있느냐를 반영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나는 이 책이 20세기 중국사회를 체계적으로, 그것도 중국의 역사, 정치, 경제, 국가제도, 사회 등등의 굵직한 항목을 세워놓고 매우 체계적으로 서술해 놓은 것은 높이 사지만 그 ''체계성''에도 불구하고 왠지 말끔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저자는 ''반조류'', 즉 중국이 20세기 들어 스스로가 만들어 낸 조류에(1차 5개년 계획에서 대약진운동으로, 문화대혁명으로, 개혁개방으로), 세기 공산주의 국가의 반적인 경향에, 혹은 자본주의화의 길을 걸었던 동아시아 국가들이 방향에, 모두 역행하는 노선을 택했다고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것은 책 속에서 20세기 중국을 보는 패러다임으로 구축되어 있다기보다는 (상당부분 그 반조류라는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상황상황에 따라 이용하는 레토릭에 불과하다.

이 책은 사회과학 방법론과 연구시각의 여러가지 새로운 점을 의욕적으로 제시하는데, 과연 이 책이 나온 1997년의 시점에 제시된 것들이 사회과학의 연구방법에 있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또 책 전체에 걸쳐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도 명쾌하게 들어오지 않는 것이 단점이다.그리고 눈에 띄는 것으로, 중국 전통사회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 고대사에 대한 무지 내지는 무관심, 지배(국가)의 측면에서 주로 서술한 점 등도 문제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몇몇 부분은 중국사회 전체의 메커니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도와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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