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은 다른 곳에 - 교양선집 16
밀란 쿤데라 지음, 안정효 옮김 / 까치 / 198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날은 2002년 1월 17일이고 다 읽은 날은 2월 6일이다. 그럼 이 책을 다 읽는 데 무려 20일이나 걸렸단 말인가. 아니다, 실제로 내가 이 책을 붙들고 있었던 날은 다 합쳐봐야 나흘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20일이나 지나서야 이 책을 덮을 수 있었던 이유는 처음 사흘 동안 200여 페이지를 읽고 나서 나머지 130여 페이지를 남겨둔 채 한동안 이 책을 들여다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특별히 바쁜 일이 있어서도 아니고 책이 지루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십 수일을 쉬어야 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쉴 새 없이 터져나오는 위트, 메스로 파고드는 듯한 풍자―소설 읽기의 쾌락이 도를 지나쳐 나를 피로하게 했다.

피로하다는 것, 이 소설이 좀처럼 포근한 휴식을 주지 않는다는 것.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농담』을 읽고 쿤데라의 소설을 짐작하는 나로서는 이 책이 여전히 낯설다. 이 책은 1969년에 쓰여졌고, 쿤데라는 체코의 1968년과, 정확히 말하면 68년의 사건으로 하나의 매듭을 지은 48년 이후의 정치적 사건들과 충분한 심리적 거리를 두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1965년에 쓰인 『농담』이나 1982년에 쓰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와 같은 패러독스와 풍자 속의 따뜻한 감성, 담담한 관조가 이 책에서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서정적인 세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어머니는 어떤 신비한 역할을 담당하는가? 그리고 만일 젊음이 무경험의 시대라면, 절대성에 대한 열망과 무경험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존재하는가? 또는 절대성에 대한 열망과 혁명적인 열정 사이에는? 쿤데라는 이러한 질문들에 걸맞는 배경으로서 1940년부터 1968년까지의 체코를 '택한다.' 그가 만들어 낸 시인인 야로밀은 스무 해라는 짧은 삶 속에 랭보, 앙드레 브레똥, 이르체 볼커, 푸쉬킨, 빅토르 위고, 미하일 레르몬토프의 인생을 구현한다. 그리고 40년대의 혁명을, 아울러 68년의 혁명까지 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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