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속학개설 - 신고판
이두현 외 / 일조각 / 199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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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두현(李杜鉉), 장주근(張籌根), 이광규(李光奎) 세 사람이 쓴 민속학 개설서이다. 이두현과 장주근은 국어국문학 출신이고 이광규는 오스트리아 유학파의 인류학자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민속'이라는 말은 친숙하지만 '민속학'은 상당히 애매한 학문으로 여겨지기 쉽다. 그것은 '민속학'을 하는 학자들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 학문이 대학의 학과와 같은 제도로 뒷받침되지 않고 있는 데서 기인한 것 같다. 실제 국내 학부에 민속학과가 설치된 학교는 안동대 뿐인 것으로 알고 있다.

상당히 오래 전에 나온 이 민속학 개설 책은, 물론 독자가 무엇을 기대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쉽게도 '민속학'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민속'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민속학 개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으면서도 민속학의 관점, 연구 대상, 방법론이나 민속학의 역사에 대해서는 지면을 아끼는 반면, 한국민속이라 부를 수 있는 잡다한 것들을 서술하며 책의 대부분을 채운 것이다. 우리 민족 안의 여러 집단의 민속을 서술하려면 부득히 특정한 시점에 시선을 고정시켜야 하는데, 이 책은 조선시대 중-후반의 우리 민속을 다루고 있다. 그 시대의 민중들의 생활을 알고 싶거나, 우리의 '옛 풍습'으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여러가지 모습들(관혼상제와 세시풍속 등등)을 대강이나마 일반적으로 훑어보려 하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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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정치경제학 - 제1개정판
김수행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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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실 이 책은 서울대학교에서의 마르크스경제학 관련 강의를 위해서 집필된 것이다. 김수행 선생은 서울대학교 경제학부에서 '정치경제학 입문', '마르크스 경제학', '현대 마르크스 경제학' 등을 강의하고 있는데 이 책은 '정치경제학 입문'의 텍스트에 해당한다. 전체적으로 마르크스의 경제사상에 대해서, 또 정치경제학의 일반적 원리에 대해서 항목을 나누어 평이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 장점이다.

정치경제학을 처음으로 접하는 사람이 경제학의 기초가 없어도 큰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금상첨화인 것은 이것을 교과서로 저자가 강의한 것을 녹화한 동영상이 웹에 올려져 있어서, 이 책의 독자는 직접 저자의 강의를 들으면서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강의는 노동자들의 정치경제학 학습을 위해 저자가 총장으로 있는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 노동대학' 홈페이지에 가면 있다.

책의 뒷부분으로 가면 이론보다는 20세기의 세계자본주의 역사와 8,90년대 한국자본주의에 대한 구체적 사실에 대해 저자의 관점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사회구성체논쟁의 회고라든가 김영삼, 김대중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평가가 제시되어 있어 읽을만 하다.

그러나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다. 책이 그다지 꽉 짜인 구성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다소 군말이 많이 섞여있다. 그리고 김수행 선생의 문장은 분명하고 단순하긴 하나 마르크스의 그것처럼 아름답고 날카롭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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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31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성규.허정애 옮김 / 범우사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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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포드님, 우리들 열 둘을 하나로 만들어 주소서,
사회의 강 속에 있는 물방울처럼;
오, 우리들을 함께 달리게 해 주소서
그대의 빛나는 플리버처럼 빠르게

오시오, 위대한 그대여, 사회적 친구여,
열 둘을 없애 하나로 만들어 주소서!
우리들은 죽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들의 더 큰 인생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위대하신 그 분이 어떻게 오시는가를 느껴라!
기뻐하라, 그리고 기쁨 속에서 죽으라!
북의 음악 소리에 도취되어라!
나는 너고 너는 나이기 때문에.

올더스 헉슬리가 그린 신세계는 결코 멋진(혹은 희망적인) 세상이 아니다. 그 세계는 암울하고 아무런 변화의 가능성이 없는 세계이며, 헉슬리는 다소 시니컬하게 그 세계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왜 이 세계를 '멋진' 신세계라고 했는가? 그것은 이 작품이 쓰여질 당시 사람들이 꿈꾸는 새로운 세상이 - 즉 그들이 기대하는 멋진 세상이, 종국적으로는 헉슬리가 그려낸 암울한 세상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작가의 위기의식 또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멋진 신세계는 어떤 세상인가? 그 사회의 운영 원리는 무엇이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는가? 멋진 신세계의 운영 원리는 세계 국가의 모토에 잘 나타나 있다; 공동사회, 동일성, 안정. 동일성은 안정됨의 표현이며 전제이다. 그리고 안정은 가족 단위의 안정이 아니라 공동 사회의 안정에 다름 아니다. 안정을 위해서, 멋진 신세계에서는 철저한 인구 통제가 이루어진다. 여기서 말하는 인구 통제는 이 시대에 적용되는 단순한 수준의 정책적인 인구 조절책이 아니고, 아예 인간을 공산품처럼 생산하는 것을 말한다. 사회 성원은 남녀의 자연스러운 결합으로 -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사회의 필요에 의해서 공급된다. 그들에게 가족은 없다. 그리고 그곳은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끊임없는 행동조절과 최면교육을 받아 '사회 안정'을 해치지 않도록 심성이 조작된다.

이 멋진 신세계는 어떤 세상인가. 한마디로 말해 전체주의적 사회이다. 모든 사람은 행복해 보이지만, 그들은 실상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하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주입받는 것에 불과하다. 행복과 불행이 있다면, 그들은 그것을 인식하고 분별할 능력을 '과학적'으로 제거당한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해 가는 것이 행복이라 한다면, 멋진 신세계에서 추구되어야 할 가치는 '공동 사회'가 정하는 것이다. 즉, 행복의 기준이 개인에 있지 않고 외부에서 주어진다. '안정'해야 하는 공동사회의 테두리도 항상 외부에서 - 통치자에 의해 정해진다.

이러한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는가? 이 사회의 운영 원리에 회의해 보는 사람은 없는가? 있다. 헨리 포스터 혹은 레니나 크로운이 멋진 신세계의 전형적인 인물이라면, 버나드 막스와 헬름홀츠야말로 예외적인 개인이다. 그들이 특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독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막스는 자신이 속한 계급인 알파-플러스 급의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육체적인 결함이 많았다. 그는 다른 알파로부터 조롱을 받는다. 이로 인해 그는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현재의 자기 자신을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반면 헬름홀츠는 다른 알파-플러스보다 정신능력이 과다했지만, 이 때문에 막스처럼 자의식을 갖게 되고 고독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예외적일 뿐이다. 이들의 회의는 어떤 공동체의 행동을 유발하는, 사회 경제적 상황에서 출발하는 의식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그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대안도 없고, 계급적 기반도 없다. 막스의 경우 자신의 열등감이 해소되면 그 사회에 순조롭게 동화되고 만다.

그렇다면 존은 어떠한가. 존으로 인해 그 세계의 모순됨이 극명하게 드러나기는 하지만, 그는 결국 죽음을 택한다. 야만인 보존 지역에서의 고독과 소외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했던 존이었지만, 고독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 사회인 그 멋진 신세계야말로 미치광이 사회였던 것이다. 늑대소녀가 발견된 것 마냥, 사람들은 그에게 모여들고, 그를 자신들의 우월함을 확인하는 도구로 이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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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디드 범우고전선 4
볼떼르 지음 / 범우사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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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도둑을 맞았다. 동아리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지갑을 벗어 놓은 바지에다 넣어 두었는데, 잠시 나간 사이에 도둑놈이 들어왔던 것이다. 지갑 속에 있던 현금 7만원이랑 동전, 그리고 버스 카드까지, 돈 될만한 것들은 싹 털려 버렸다. 지갑은 가져가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그저 허망하고 망연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는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그 도둑놈을 실컷 두들겨 패 주는 상상이나 할 뿐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이런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 '지갑을 털린 건 내가 그동안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일 지도 몰라.' 사실 나도 전적으로 착하게 살지만은 않았고, 그동안 이것저것 나쁜 짓도 많이 했으니 그 죄값을 하느라고 이렇게 지갑을 털린 게 아닌가?

사실, 좋지 않은 상황에 처했을 때, 혹은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한번쯤은 해 볼 것이다. 이런 생각은 악을 행하면 벌받게 마련이고 선을 행하면 상을 받게 마련이라는 믿음에 닿아 있다. 『깡디드』에 나오는 철학자 빵글로스의 생각이 이러하다. 빵글로스는 모든 사물은 결과를 위해서 존재하고, 모든 것은 보다 나은 결과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 그는 모든 사물은 현재 상태 그대로이며, 다르게는 절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지선(至善)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사상을 제자인 깡디드에게 가르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결국 지고의 선으로 귀결되는 것인가? 과연 그 도둑은 나를 징벌하기 '위하여' 도둑짓을 한 것일까? 내가 도둑을 맞아서 정죄가 되었다면 다행이지만, 도둑놈은 도둑질이라는 또 하나의 죄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이 도둑질은 어떻게 단죄할 것인가?

세상 모든 것이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은, 그 세상의 모든 것들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한다. 다시 말해, 세계가 이미 정해진 원리에 따라 이미 결정되어버린 궁극적인 귀착점을 향해 나아간다는 생각은 형이상학적 독단물에 불과하다. '운명'이니 '인연'이니 하는 말들은 현재의 상황을 합리화하려 할 때 쓰여지거나, 그에 관계된 모든 일이 끝나고 그 일을 보기 좋게 설명하려 할 때 덧붙여질 뿐이다.

노학자 마르땡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란, 심한 불안감 속에서가 아니면 권태로운 혼수 상태 속에서 살기 위하여 세상에 태어난 것이오.' 한편 빵글로스는 여전히 이렇게 말한다. '세상엔 언제나 지독한 고통이 있게 마련이지만, 그러나 일단 견뎌 내기만 하면 모든 것이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게 되네.' 하지만 이러한 대답은 깡디드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 세상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질문 또한 부질없다. 세상의 모든 고난을 겪은 깡디드에게 무엇무엇을 '위해서'라는 말은 모두 알 수 없는 것. 그는 이제 그의 뜰을 경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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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탱 게르의 귀향
내털리 데이비스 지음, 양희영 옮김 / 지식의풍경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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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일차적으로 사료를 통해서 아르티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나아가서 이 책은 표면적인 사건의 이면에 있는 의미와 상황, 행위의 동기와 민중들의 심성을 살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저자는 바스크 지역의 상속 관습과 툴루즈 부근의 관습을 비교하고, 당시의 기본적인 인구구조와 아르티가의 지리적 조건, 생산활동, 남성과 여성의 관계, 가문의 결합으로서의 결혼 절차를 살핀다. 또한 당시의 사법관할구역이라든지, 재판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가치 등을 설명한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그 이면의 맥락에서 파악한다. 마르탱 게르를 가장한 아르노와 피에르 게르 사이의 갈등은, 단순히 아르노가 피에르에게 배은망덕한 행위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문의 재산을 상업적으로 이용해서 재산을 늘리는 데 거부감을 갖고 있는 ― 피에르가 자연스럽게 여기는 ― 바스크의 관습과, 상속지의 일부를 파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인 ― 아르노가 자연스럽게 여기는 ― 레즈 강 계곡의 관습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베르트랑드가 의도적으로 아르노를 자기 남편으로 끊임없이 재확인하려 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체 하는, 이른바 '이중 게임'에서 드러나는 재빠른 현실감각은, 남성만이 사회의 공적 정체성과 결합되어 있는 세계에서, 남편의 선의에 종속되어 있는 여성들이 남편에게서 바라는 것을 얻어내고 이익을 계산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이것 또한 예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고 일반적인 것이다.

장 드 코라스는 아르노를 사형에 처하면서도 재판이 진행될 때부터 그에 대한 미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이 아버지를 고소했던 유사한 경험을 아르노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 둘 사이에는 공통적인 프로테스탄트적 배경이 있다는 것, 당시의 귀족계급을 지향하는 법관계층으로서 익히는 에티켓이라든지 출세를 앞당기고자 하는 처세의 방법들이 아르노가 행한 '자기 형성'과 유사한 면이 있다는 것 등에서 연유한다.

그런데 이렇게 수백년 전의 사회를 기술함에 있어 문화기술지적 형식을 감행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르게 마련이다. 분명 데이비스는 사료의 벼랑에 서 있다. 그러니까, 현재 자신이 검토할 수 있는 자료는 남김없이 섭렵했고, 전통적인 역사학의 연구 방법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마르탱 게르와 아르노 뒤 틸, 베르트랑드에 대한 이야기의 일정 부분은 정황적 판단에 의존하고 있다. 그녀는 '대담하게 추측하건대 ~ 했을 것이다' 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불사하면서, 사료의 공백을 이유로 이들을 둘러싼 문화적·사회적 맥락이 빈칸으로 남게 하지 않는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많은 것들이 구체적인 사료의 엄증성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지만, 그녀는 단정적 표현을 쓰지는 않는다.

데이비스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책 전반에서 느껴지는 저자 자신의 '사실에 대한 의구심' 때문인 것 같다. 그녀는 사료의 공백을 메우는 이야기를 할 때, 페미니스트적 지향을 비춘다든지, 민중문화의 독자성을 강조하려든다든지 하는 이데올로기적인 면모를 다분히 드러내지만, 계속해서 제기하고 자문하는 것은 진실과 창안 사이의 모호함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 16세기 사회에서 진정한 정체성이란 무엇인가를 결정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20세기를 살면서 역사가가 진실을 추구하는 것 또한 좀처럼 쉽지 않은 일'임을 말하고 있다. 그녀는 장 드 코라스의 『잊을 수 없는 판결』을 두고 이것의 사료적 객관성과 투명성을 의심하여, 여러 판본을 대조하여 거침없이 문헌비평을 가하고, 재판관의 내적 갈등을 읽어낸다. 그러나 마지막에도 텍스트에 대한 의혹을 떨치지 않는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사건의 진위에도 짙은 의심을 품고 있다. 몽테뉴의 글을 자세하게 다루는 것은 그 때문이다. 몽테뉴는 진실을 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불확실한 도구인지를 말한다. 마르탱 게르 사건의 경우 판결을 보류했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그리고 묻는다. '나무 의족을 하고 스페인에서 돌아온 그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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