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에겐 보이지 않아 - 함께하고 싶지만 어쩐지 불편한 심리 탐구
박선화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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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저녁 황금시간대에 방송되는 뉴스에는 너무 흔히 보이지만 흔해서는 안될 것 같은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늙은(!) 남자 앵커와 젊은 여자 앵커가 진행하는 뉴스를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죠. 요즘 제일 잘 나가고 있는 프로중의 하나인 뉴스룸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초고속압축성장을 거쳐 오면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유례없이 이뤄내고 있는 한국에서 많은 것이 바뀐 듯 하지만 안 바뀌고 있는, 예전부터 계속 느껴왔지만 아직은 잘 안 바뀌고 있는 기이한 장면 중의 하나가 이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도 언급했지만 저도 자주 느꼈던 부분입니다. 왜 한국에서는 21세기에 사는 이 시대에도 로즈메리 처치나 크리스티안 아만포같은 오십중반을 넘어 육십을 바라보는 여성 아나운서가 당당히 활동하는 모습을 아직까지 보기가 힘든 걸까요. 사실 위의 장면은 단순히 바람직하고 나쁜 이분법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문화의 일부로 받아들일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교문화의 영향이든 남성적인 지배문화가 극심해서이든 이 문화가 문화적으로 타당해서인지 아니면 개선되어야 할 폐습에 불과한 지에 대한 성찰의 시간이 없었거나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로 위 장면이 바뀌기 시작하는 시간이 한국에서는 남녀평등으로 가는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간주해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한국은 적지 않은 것이 개선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기준에서 보았을 때 여성인권지수는 세계에서 웬만한 경제 후진국보다 못한 최하위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박선화 저자의 [남자에겐 보이지 않아]는 남성과 여성 모두를 돌아보게 하고 어떤 점이 잘못되었고 어떤 점을 개선해야 할지를 배우고 토론할 계기를 제공해 줍니다.

이 책의 특징은 현학적이지는 않되 지적이며 특별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문장을 통해 남녀의 차이에서 생기는 문제와 현상들 너머 인종문제, 가족문제까지 다양한 토픽을 통해 파노라마처럼 펼치고 있습니다. 이 펼침을 통해 독자들은 개척, 전진, 경쟁 등의 남성성에 가까운 덕목들이 그 빛나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어떤 그늘이 있었는지 되돌아보게 되고 공감, 배려, 조화 등의 여성성에 가까운 덕목들이 그 미덕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많은 이들이 알고 있지만 남성성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고 여성성도 여성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남성을 더 남성답게 보이도록 하는 테스토스테론을 얼마나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여성을 더 여성답게 보이도록 하는 에스트로겐을 얼마나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각기의 성격적 특질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테스토스테론을 많이 보유한 여성이 굳이 남성성을 숨길 필요가 없듯, 에스트로겐을 많이 보유한 남성이 여성성을 굳이 숨길 이유가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몸은 남자로 태어났지만 자신은 여자로 살아야 한다는 본성의 부름(!)에 호르몬 조절을 통해 적극적인 변화를 이루는 이들도 많은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남성들은 세상의 절반인 여성의 삶과 문화에 대해 적어도 한번쯤은 진지하게 성찰해 볼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 성찰의 계기로 이 책은 매우 시의적절한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느끼는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중용과 조화의 가치입니다. 보편적이고 흔하고 쉬워보이는 가치이지만 실제 구현은 쉽지 않은 가치입니다. 저자의 서술방식은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제너럴리스트로서의 방식입니다. 한 우물만 깊게 팠을 때 땅속의 세계는 보이지 않았던 많은 것을 보여줍니다. 그 깊이만큼 문명의 진보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두루두루 넓게 파지 않았을 때 보이지 않았던 많은 것들을 외면하고 깊게 판 부분만 유일한 진리라는 신념을 믿고 나아갔을 때 많은 부작용과 희생이 많이 생겼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21세기는 이런 부분적 깊이를 넘어서서 그런 부분들의 통섭과 융합과 조화의 가치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지식의 스페셜리스트는 많지만 지혜의 제너럴리스트는 태부족인 시대인지도 모릅니다. 제너럴리스트로서의 가치는 0% 없거나 100% 갖추어졌거나 하는 것이 아닌 100%에 가깝게 채워가는 점차적인 지혜에 가까울 겁니다. 그러므로 저자가 이 책에서 제기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우리가 어렸을적 흔히 배워왔던 사지선다형 객관식 문제처럼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렸고의 방식이 아니라 어느 정도로 우리가 오랜 관습에 갇혀 있었는지 혹은 그런 문화를 유지하게끔 만든 원인이 무엇인지 같이 성찰해 보는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가 책에서 적절한 비유를 들어 언급한 대로 파이 하나를 10조각 내었는데 그중 8~9조각을 남성들이 경쟁해서 가져가고 1~2조각을 여성들이 가져간 것이 역사적 사실이었을 겁니다. 이제는 경제적 상황이 조금 나쁘거나 힘드니 그 1~2조각마저도 뺐어오겠다는 유아적 발상이 아니라 모두에게 기회가 부여되는 공정한 가치가 공정한 결과로 이어지도록 하는 문화의 정립을 위해 가부장제와 군대문화로 일컬어지는 한국의 빛과 그늘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조화의 문화를 위한 재구성의 시간이 필요한 때입니다. 한편으로 1~2조각 남은 것을 위해 여성들끼리 경쟁하거나 남성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일부 페미니스트 전사들을 조롱하거나 적대시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까지 된 상황을 만든 책임과 원인을 남성 스스로 살펴볼 때가 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 특히 한국 사회에서 남성이 가족을 먹여살리고 경쟁과 성공으로 가는 과정은 쉽지 않은 험난한 길의 연속이었던 점은 사실이고 아직도 그 양상은 적지 않게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양상이 바람직한 지에 대해 혹은 개선이나 진화의 방법이 있다면 어떤 방법이 좋은지 적극적으로 성찰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런 성찰에는 남성들끼리의 경쟁에 아예 참여를 배제하곤 했던 여성들과 함께 이 책이 제기한 논제를 통해 열린 논의를 함으로써 이런 경쟁의 악순환의 방향을 바꾸는 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여성적 가치를 살리는 것은 역설적으로 남성들끼리의 경쟁의 결과와 왜곡의 희생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남끼리, 남녀끼리 덧붙여 여여끼리 이 책에서 제기된 여러 토픽을 논쟁과 토론의 주제로 삼을 만 합니다.

외국에는 글로리아 스타이넘같은 여성의 가치를 남성과 동등하게 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도 있고, 제인 구달같은 자연 생태계의 선순환에 힘을 쏟는 이들도 있고, 반다나 시바같은 국제패권 카르텔과 남성물질주의 경제에 경종을 울리고 공동체와 지구 민주주의를 제창하며 거대담론을 펼치는 훌륭한 여성들이 적지 않습니다. 한국에는 제가 보기에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그러나 그들이 없다면 세상이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를 무수한 여성천사들이 살고 있습니다. 눈에 가시적으로 보이는 제도권에서 드러난 일부 능력으로 사는 남성들에 비해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실제적으로 세상을 바꾸어 가는 많은 여성들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음지에서 많은 역할을 하는 이들이 가시적으로 평가받고 정당한 대접을 받는 문화가 제대로 형성된다면 그때가 남녀평등의 여러 과제 중의 하나를 넘어서는 때라고 봅니다. 모든 곳에서 모든 이들이 온당한 인정을 받는 때가 모두가 바라는 세상일 겁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세계의 통사라고 할만한 역사서의 이름을 <인류와 어머니되는 지구(Mankind and Mother Earth)>라고 지은 바 있습니다. 어쩌면 지구가 신이 보호하는 하나의 공동체라고 가정한다면 그 신은 여신일 겁니다. 괴테가 <파우스트>의 마지막 구절에서 언급했던 ‘영원한 여성성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도다’는 21세기 지구촌의 생존을 위해서 후세들에게 미리 알린 경구와도 같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저자가 남성과 여성에 대해 얘기하고 있지만 여성권을 얘기하면서 더 넓게는 인간권을 얘기한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점은 저자의 언급대로 인간권의 제대로 된 정립이 동물권과 자연권으로 확대 적용될 수 있습니다. 존재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와 공감은 인간권, 동물권, 자연권을 넘어 지구촌의 모든 존재들에 대한 공동체의 가치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습니다.

지적이되 현학적이지 않고, 쉽게 읽히되 성찰할 시간을 주고, 딱 부러지는 유일한 정답을 강용하지 않되 우리에게 처해진 문화에서 더 나아갈 부분을 생각해 보는 사다리의 역할을 해주는 책이라면 안 읽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어머니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친구들에게 권해줄 수 있는 드문 책으로서 박선화 저자의 [남자에겐 보이지 않아]를 모두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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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 레퀴엠 KV626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작곡, 김선아 (Sun-Ah Kim / 벅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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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리스트를 비롯한, 국제적으로도 유명 클래식 아티스트가 많은 한국에서 이렇다 할 모차르트의 레퀴엠 음반이 나오지 않은 것은 다른 의미에서 조금 놀랄 일이다. 그리고 너무 늦었지만 반갑게 나온 김선아 지휘의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 합창단과 콜레기움 무지쿰 서울 연주단의 이 음반은, 말하자면 메마른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은 음반이다.

오디오가이가 기획하고 인천의 갈산동 성당에서 연주,녹음한 이 음반은 여러모로 뜻있고 값지다는 말로도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을 준다. 명징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녹음은 이 음반의 가치를 상당부분 높여주었다.

이 음반은 크게 두가지 미덕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여성미로 상징되는 조화미(Harmony)이고 또 하나는 레퀴엠 자체의 본질적 속성이기도 한 영성미(Spiritual Beauty)이다. 이 두가지 만으로도 이 음반은 타 음반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차별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감정의 여과없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번스타인이나 장중한 우아미를 보여주는 칼 뵘이나 진지한 개성을 전통성과 조화시킨 아르농쿠르같은 명연이 존재해서 실제 공연이 아니라면 더 찰아볼 음반이 있을까 할 정도로 명반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레퀴엠(Requiem, 안식을 주소서)’로 시작되는 첫 구절을 듣자마자 바로 이 음반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특히 투바 미룸(Tuba mirum)의 구절에서 나타나는 소프라노 전수미, 메조 백재은, 테너 김세일, 바리톤 정록기의 소리와 연주단의 소리는 어느 것 하나 튀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 흔히 라크리모사(Lacrimosa)까지가 1부에 해당하고 그 이후 미완성된 이 곡을 쥐스마이어가 주로 작업한 도미네 예수(Domine Jesu) 구절부터 2부로 치는데 2부는 1부에 비해 심심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든 경우가 많았는데 이 음반은 흥미롭게도 곡 전체를 아우르는 조화미가 아름다워 한번에 쭉 감상했다. 특히 2부의 베네딕투스(Benedictus) 구절은 투바 미룸 구절 이상으로 조화가 훌륭해서 이 음반의 가장 빛나는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타 음반들이 개성과 격렬함을 자랑하는 곡도 많지만 이렇게 수려한 조화를 이루는 레퀴엠은 곡 자체의 미덕인 부분이다. 여러번 들어도 질리지 않을 이런 조화미는 독일 가곡과도 같은 매력을 준다. 이 조화미는 솔리스트와 합창단과 연주단이 지휘자의 조율에 의해 하나의 악기처럼 자연스러움마저 보여준다. 그러나 레퀴엠은 죽은 자의 안식을 기원하고 산 자를 위로하지만 이 모든 것의 평안을 신에게 기원하는 곡이므로 피조물로서의 자세에 대한 마음가짐이 어느 것보다 중요한 곡임에 틀림없다. 곡의 멜로디나 솔리스트나 합창단의 매력만을 듣는 것도 즐거움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만을 위해서 이 곡을 듣는다면 코끼리의 일면만을 본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외국 음반들에게서 다양한 시도라는 점에서 이 곡의 탈 영성화, 일종의 세속적, 일반적 해석을 하곤 하지만 이 곡의 본질은 피조물로서의 영성적 해석이 얼마나 감동을 줄 수 있는지를 새삼 증명한 음반이라고 본다.

클래식은 물론이고 팝과 가요 시장에서 음반의 시장화가 의미가 있냐는 의문에도 불구하고 기록을 남기고 자기 객관화를 통해 성장,진화한다는 것이 가치가 크다는 점에서 김선아 지휘의 모차르트 레퀴엠 음반은 그런 점에서 소중한 기록이다. 공공기관 산하나 대규모를 제외한 단체중에서 박치용 선생의 서울모테트 합창단과 더불어 한국의 소중한 단체인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의 진가를 제대로 알리는 음반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레코다레(Recordare) 구절을 비롯한 몇몇 구절에서는 기악의 아슬아슬한 연주부분이 나타나지만 어쩌면 한국 합창단의 최대 과제일지도 모를, 세계적으로 손색없는 합창단에 걸맞는 연주단체의 질적 성숙은 이들 단체의 숙제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숙제이다. 그러므로 애호가들이 던져야 할 질문은 우리의 환경은 고려하지 않은 채 세계일등음반에 어울리는 음반을 따라잡지 못하냐는 근시안적이고 나무나 풀잎만 쳐다보는 시선이 아니라 제대로 된 지원이 없었던 척박한 한국의 클래식 음악 환경에서 이 정도의 감동적인 음반을 낸 이들이 나오는 게 어떻게 가능했냐는 것, 이들을 제대로 지원한다면 후일 또 어떤 역사적 기록들을 낼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을 지닌 숲의 시선이 필요한 때이다.

음악의 신이 이 음반을 듣는다면 외국 음반의 세련됬지만 노련한 조교같은(?), 그러나 탈 영성화된 기록보다는 온전하게 조화롭고 온전하게 영성적인 마음을 중심에 잡고 있으면서 곡의 본질적 의도를, 피조물로서의 겸손함을 지닌 채 들려주는 이 곡에 큰 격려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척박한 환경에서 이 정도의 성과를 낸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모든 것이 풍족해질 어느날 미래의 환경에서 그려낼 그들도 또한 기다려진다. 그렇다 하더라도 영성적 음악을 대하는 그들의 초심이 바뀌지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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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의 정치학 - 왜 진보 언론조차 노무현·문재인을 공격하는가?
조기숙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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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2월은 내가 제주도청에서 행정전산관련 프로젝트로 한참 바쁠 때였다. 그러나 해당월의 18일은 15대 대통령을 뽑기 위한 선거일이었고 그 당시에는 사전투표같은 제도가 없었기에 나는 다소 비장한 각오로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올라와서는 투표를 하고 김대중 대통령이 불과 2%차이로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는 것을 감격적으로 지켜보고는 다음날 아침 첫 비행기로 다시 제주로 내려갔다. 국민의 정부라고 불리는 김대중 정부는 이전 문민정부였던 김영삼 정부의 실정으로 인해 국가부도사태 지경에 이른 나라를 IMF 구제금융으로 홍역을 치뤘지만 구제금융 시기를 빠른 시기에 졸업하고 민주주의의 본격적인 토대를 연 시기였다.

16대 대통령을 뽑던 2002년 12월 19일도 선명히 기억난다. 이미 이전에 노무현 후보가 정몽준 후보로부터 성공적인 단일화 협상을 이룬 뒤라 이회창 후보와 큰 표차는 아니더라도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봤기에 다소 즐거운 마음의 상태였던 것 같다. 그러나 투표 전날 저녁에 몇몇 친구들과 모텔에 모여 차기 정부에 관한 얘기를 나누며 기분좋게 술을 한잔 기울이면서 티비를 보다가 정몽준의 노무현을 지지철회한다는 방송을 보고는 모여있던 우리는 그야말로 멘붕에 빠졌다. 당시 민주당 내부는 아마 충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 밤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바로 아침에 투표가 시작되는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에 유시민 작가와 조기숙 교수가 유권자들을 독려하는 인상적인 글을 올린 기억이 난다. 또한 역설적이지만 반나절도 안되는 이 시간은 새로운 사회를 열망하는 시민들이 집중하며 깨어나는 사건의 시간이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의 성공적인 실제 업적과는 상관없이 그가 외롭게 물러나고 심지어는 이 세상마저 떠난 뒤로 두 번의 정부를 거치며 9년이 흘렀다. 여러 경제지표를 보거나 남북관계, 사회통합 등 어느 것을 보더라도 상식 이하의 결과를 보여주다가 희대의 국정농단이라는 사태와 탄핵과 파면을 지나 위대한 촛불광장을 거쳐 시민의 정부라고 불리울 만한 문재인 정부가 새로 출범하였다. 새로운 정부의 출범이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많은 비정상이 정상으로 바로 서는 경험을 많은 이들이 느끼고 있다.

국민에 별 관심없는 정부라도 외형상 좋은 결과로 비치는 정부로 일시적으로 비칠 수도 있고 국민을 위한 선의의 정부라도 여러 변수가 있어서 좋은 결과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선의의 정부라면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 결과도 성공적이길 모두가 바라고 있을 것이다. 아마 문재인 정부는 대통령 자신의 외유내강형 스타일이나 여러모로 비추어 봤을 때 역대의 어느 정부보다 성공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러 변수들과 암초들이 앞으로 가는 길마다 놓여있다. 이를 극복하고 성공적인 종착지를 향해 갈 수 있을까.

팟캐스트인 [정봉주의 전국구]에서 시리즈로 대담이 이루어진 내용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부 출범 직전에 나온 조기숙 교수의 [왕따의 정치학]은 새로운 정부가 시민의 정부이길 고대하는 동시에 정부 출범 이후에도 성공적으로 진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책이다. 이 책은 엄정한 중립의 입장에서 정치의 구도를 보여주는 것이라기 보다는 김대중 정부에서 민주주의의 토대를 쌓고 노무현 정부에서 본격화된 시민권의 확장과 문재인 정부에서 기대하는 복지권의 정착을 위한 아낌없는 조언의 책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특정 진영논리에 젖어 프로파간다로서의 역할이 주된 것이라고 한다면 매우 곤란하다. 프로파간다라는 것은 진영논리와 권위주의라는 양자를 가지고 이분법과 선악구도로 몰아가며 내 것은 다 좋고 남의 것은 다 나쁘다는 식의 논리 아닌 논리를 펴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21세기에, 특히 한국에서 어떻게 시민들이 민주적으로 구성되고 있는지의 파노라마를 날카롭고 현실적으로 서술한다.

20세기의 민주주의 형성과정은 거칠게 보자면 정치적으로는 참정권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의 과정이고 경제적으로는 무산자가 유산자로부터 경제력을 더 가져오려는 투쟁의 과정이다. 즉 예전의 ‘왕의 말이 법’인 왕조체제가 무너지고 ‘법에 의해 형성된’ 국가체제에서 계급간에 정치와 경제의 영역을 더 넓히려는 과정으로 거칠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여기에서 자본의 입장이 반영된 쪽을 보수(우파)라 하고 노동자의 입장이 반영된 쪽을 진보(좌파)라고 한다. 그러나 우파와 좌파와는 별개로 보수와 진보는 나라마다 정반대로 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옛 소련 체제나 현재의 중국은 좌파가 보수이다. 아무튼 이 모든 것을 모아서 보더라도 이 우파와 좌파의 구분은 권위주의 더 나아가서는 국가주의의 산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프랑스의 68혁명으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시민들은 탈권위주의와 탈물질주의의 가치를 들고 나오며 새로운 시민영역을 형성한다. 21세기 한국의 새로운 시민들은 바로 이러한 신좌파로 불리어질수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쓴 글에서 나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탄핵국면을 지나면서 과거의 국가주의에 향수를 지닌 이들과 새로운 시민주의로 나아가려는 이들로 크게 구분된다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조기숙 교수는 이 책에서 그 구분을 상세하게 들려준다. 다시 정리하면 자본가 대 노동자에 의한 구분은 권위주의와 물질주의의 패러다임 안에 있는 우파와 (구)좌파인 셈이고 탈권위주의와 탈물질주의로 나아가는 새로운 시민들은 신좌파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신좌파는 권위나 물질경제에 우선가치를 두지 않고 개별성과 창의에 따라 삶의 가치를 각자 다르게 둠으로써 구좌파와 많이 다르다. 미래를 향해 가고 진보적이라는 의미에서 좌파라고 붙일 수 있을지언정 구좌파와는 여러모로 다르다는 것이다. 구좌파는 국가나 권위의 힘을 여전히 놓치지 않은 채로 노동자의 경제적인 평등한 세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 본질은 상당히 단순한 목적을 지니고 있지만 신좌파는 경제양극화를 지양한다는 점에서 구좌파와 조금 비슷하지만 권위를 싫어하고 정신적인 행복이나 문화적인 가치에 중점을 둔다는 점에서 정신적, 개별적, 사안적인 의식을 지닌다.

기존의 언론들은 신좌파 이전의 구체제의 패러다임으로 볼 때 보수언론과 진보언론으로 구분이 되어 언론의 정도와 진정성의 차이가 다소 있었더라도 진영의 논리에서 활동을 해 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보수언론은 물론이고 진보언론조차도 이런 21세기의 새로운 시민의식은 채 받아들이거나 이해하기 힘든 혹은 관성을 바꾸기 쉽지 않은 새로운 패러다임임에 틀림없다. 그로 인해 이전과는 다른 방식이며 신좌파에 어울리는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의 등장은 보수언론뿐만 아니라 진보언론에게도 어떻게 대해야 될지 모르는 새로운 유형이었던 셈이다. 진보같기는 한데 자신들과는 다른 궤에 있어서 온전히 수용할 수 없었던 셈이다. 그렇기에 일부 진보언론 혹은 일부기사를 통해서 호의성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노무현 정부 내내 진보언론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 진보언론의 관성은 문재인이 대통령을 앞둔 대선시기까지, 급기야는 새로운 정부가 출범한 오늘날까지도 불화를 보이고 있다. 그 이전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호남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고 왕따로 만든 때와는 다른 양상으로 노무현과 문재인은 자신들의 옛날 방식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왕따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주 간략하게나마 책의 내용을 정리하기도 했지만 조기숙 교수의 [왕따의 정치학]은 이렇게 신좌파가 등장하게 된 배경과 한국정치상황에서의 그 구체화가 어떻게 시작되고 형성되어가고 있는지의 현재진행형을 실감나게 들려준다.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홍보수석으로 재직하며 있었던 이야기와 그 전과 후의 에피소드까지 생생하게 들려줌으로써 이 책은 신좌파라는 시민주의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이론적, 실제적으로 들려줌으로써 현재의 깨어있는 시민들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는지 혼란스러워할 시민들에게 나타난 등대같은 책이다. 아마도 [왕따의 정치학]은 강준만 교수의 [김대중 죽이기] 이후로 그것을 넘어서는 시대의 증언이자 살아있는 정치학 교과서라 할 만 하다. 덧붙이자면 신좌파에 대한 이해의 부족 혹은 진영 논리에 갖힌 이유 등에 의해 과거가 아닌 근래의 강준만 교수나 최장집 교수가 고개를 갸우뚱할만한 얘기를 하는 것들도 이 책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혹은 대선토론에서 심상정 후보가 보수인 유승민 후보에게 ‘힘을 내라’는 다소 의아해 보이는 언급의 배경도 이 책을 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번 대선토론회에서는 크게 5자 구도에 의해 다양한 가치와 수준을 지닌 후보자들이 자웅을 겨뤘는데 이는 어쩌면 왕조체제의 향수를 마지막까지 붙들다가 무너져 버린 이후 시대에, 우리가 접해 보는 다양한 시각의 정치토론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바람이자 출발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후보자에게 호감을 가졌든 상관없이 정치와 한국사회에 조금이라도 깨어 있기를 바라는 이들이라면 이 책을 일독하기 바란다. 물론 이 책은 신좌파의 입장에서 그 세력이 더 건강하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썼다는 점에서 5자 구도라는 면에서 볼 때는 한 진영의 입장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좌파는 합리성과 가치성과 미래라는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앞서가는 진영이다. 내가 설령 다른 진영이라 할지라도 왜 그런 입장에 있는지 이 책을 통해 스스로 돌아볼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진영이 그저 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포용할 마음도 가질 가능성도 더 커질 것이다. 갈수록 다양성과 개성이 존중되는 사회에서 하나의 대한민국이라는 개념이 적절할런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상대방을 모르면 영원히 적이 되어 싸울 수도 있지만 상대방을 이해하거나 진영의 전환을 경험할 수도 있고 상대방이 영원한 적이 아니라 같이 가는 선의의 경쟁자이거나 동반자가 되어 공동체로서의 대한민국이라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을 정리해보고 이 책이 미처 언급하지 않았거나 혹은 취약한 부분을 잠깐 얘기해 보자. 이 책에도 언급되고 있고 유시민 작가도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언급했듯이 대한민국은 이제 산업화, 민주화를 완벽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성공적으로 건너가고 있고 이제 경제 양극화 문제와 모든 국민들이 최소한으로 먹고살 만한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복지국가로 가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이 책에도 언급되고 있고 훨씬 과거에 김구 선생의 바램대로 문화국가로 가는 길이 미래에 놓여져 있다. 지금의 ‘참여민주파’에서 이미 그런 경향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지만 탈권위주의와 탈물질주의로 인해 개인의 가치는 다양한 삶의 방식과 행복이라는 정신적인 측면이 점점 커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문화화’는 복지국가가 그 토대가 됨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신좌파의 정체성 정립 뿐만 아니라 김구 선생 이래로 그저 아름다운 구절로만 기억하고 있던 문화국가로 본격적으로 가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는 점도 이 책의 또다른 미덕이다.

이 책의 구성상 꼭 필요한 것인데도 이 책이 언급하지 못했거나 안했던 부분을 살펴보자. 이 책이 팟캐스트의 내용을 재구성하긴 했지만 팟캐스트의 기능과 영향력에 대해선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는 아쉬움은 있다. 20세기였다면 여전히 보수언론과 진보언론은 예의 우파와 좌파의 정당성을 위해서 글로 싸웠지만 신좌파의 등장으로 진보언론과 신좌파는 예기치 못한 갈등을 겪고 있다. 그러나 신좌파는 진보언론이 새로운 물결과 패러다임을 인식하고 바뀌어 간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너무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 그점은 ‘나꼼수’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팟캐스트가 있기 때문이다. 즉 우파에겐 보수언론이 뒤에 있고 좌파에겐 진보언론이 있다면 신좌파에겐 팟캐스트라는 뉴 미디어가 있다. 팟캐스트는 보수언론의 자본과 조직력에는 도저히 비교하는 것이 우스울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팟캐스트의 힘은 하드웨어에 있지 않고 소프트웨어 즉 화자와 그 내용에 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정치뿐만 아니라 주제와 다양성이라는 면에서 어마어마한 속도로 펴져가고 있다. 예전의 총선 시기에 자본과 인력에서 비교할 수 없는 거대언론이 불과 서너명이 자산의 전부라고 할만한 ‘나꼼수’를 지면으로 공격해서 한명을 총선에서 떨어뜨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한명을 감옥으로 보내고 나머지 두사람을 기소 상태로 두도록 역할을 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팟캐스트라는 뉴 미디어의 역할이 얼마만큼 두렵고 커질 수 있나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일 것이다. 앞으로 갈수록 정치인이든 시민이든 뉴 미디어에 대한 이해가 넓으면 넓을수록 그는 이니셔티브를 더 주도할 수 있을 것이다. ‘썰전’이나 ‘외부자들’처럼 팟캐스트의 영향으로 오히려 기존 시사방송과 대담프로의 상당 부분이 그와 비슷한 포맷으로 변한 것이 많다는 것을 방송사 내부에서는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팟캐스트의 자본력은 기존언론에 비교할 수 없으므로 대등하게 경쟁한다는 것이 우스울 지경이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만큼은 서로가 비하하지 않으면서 자기 주장을 펼쳐 간다면 합리적인 논리를 지닌 진영 간의 공정경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그 콘텐츠와 내용이 더 합리적일수록 그 진영의 시민영역은 넓혀질 것이다.

[왕따의 정치학]에서 언급한 대로 복지국가를 넘어서 문화국가를 향해 가는 것은 시대의 과제이자 가야할 길이다. 그리고 이 사이의 언제인가 혹은 이 이후에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통일국가를 위해서는 그때그때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듯 하다. 문화국가를 바탕으로 통일국가의 과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해 프랑스나 미국의 민주주의처럼 수입된 민주주의가 아니라 비로소 한국에서 이룬 민주주의가 수입과 학습의 과정을 넘어 새로운 민주주의의 모델로서 세계에 기여하는 때가 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오래 살 수 있기를, 혹은 가능하다면 가급적 그 시기를 앞당길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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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읽다 - 누구나 과학을 통찰하는 법
정인경 지음 / 여문책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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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이 순간 직면한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고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해야 하고, 그래서 철학과 과학을 탐구한다. 우주론이나 진화론, 윤리학과 같은 진리는 철학자나 과학자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처한 상황에서 더 나은 선택과 올바른 결정을 하려고 애쓰는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할 지식이다. 그동안 우리가 진리를 찾았던 이유는 마음속에 올바른 앎과 삶에 대한 갈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과학을 읽다] 2장 철학 - 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 마지막 장


정인경 선생의 [과학을 읽다  - 누구나 과학을 통찰하는 법]이 다루고 있는 주요한 화두는 사실과 가치이다. ‘사실’은 ‘이 세계가 어떻게 되어 있나’ 하는 과학적 접근법이 유효한 방법이고 ‘가치’는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인문적 접근법이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한때 이 사실과 가치를 각기 신봉하는 이들이 서로 만나지 않고 심지어는 서로 배척하기 까지 한 정도의 시대가 있었다. 현대에도 이런 경향은 지역별로 그 차이가 있을지언정 뚜렷이 그 흔적이 남아 있거나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다. 그러나 시대와 상관없이 이 두가지 사안은 절대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이 세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지를 더 제대로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점은 지식인과 일반 수용자의 입장으로 보자면 약간 다른 면이 있다. 일반 수용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사실과 가치는 예나 지금이나 세계와 삶이 분리된 것이 아니므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입장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과학에 복무하는 지식인’과 ‘인문학에 복무하는 지식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본인의 전공이나 지식을 더 파고들기 위해서든 혹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찰스 스노우가 ‘두 문화’로 언급했듯이 일종의 거리두기가 과거부터 존재해 왔다. 그러나 현 시대는 물리학이나 화학, 생물학의 교류같은 인접 과학과의 소통 혹은 사회학, 심리학, 철학같은 인접 인문학의 소통을 넘어서 과학과 인문학의 소통이 요구되고 있는 시대이다. 에드워드 윌슨은 과학과 인문학의 통섭을 제창하고 엣지재단은 지식의 최전선에 있는 두 문화의 학자들을 불러모아서 발표와 토론의 장을 아끼지 않는다. IT 기기 하나에 모든 기능을 담는 것을 디지털 컨버전스(Digital Convergence)라고 한다면 - 이것의 대표격이 스마트폰이다 - 과학과 인문학의 소통 그것에서 더 나아가 융합으로 가는 아카데믹 컨버전스(Academic Convergence)의 시대로 가는 본격적인 길목에 우리는 서 있다. 


이런 시점에서 [과학을 읽다]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책이다. 저자는 책의 구성을 크게 역사, 철학, 우주, 인간, 마음이라는 다섯 개의 장 속에서 각기 5권의 책을 이야기함으로써 총 25권의 책을 중심으로 과학과 연계되거나 관련된 이야기들을 풀어나간다. 


이 책의 저술의도 중의 한가지는 역사의 장에서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를 언급하는 데서 분명히 드러난다. 환경오염과 인구증가, 지구온난화, 에너지 부족, 야생 동식물 멸종 등의 문제등은 지구가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오다 생긴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문명 특히 현대과학기술문명으로 인한 이 현상들은 이대로 흘러가도록 놔둘 경우에 지속불가능한 상태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문명을 만든 것도 우리이니 현대문명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것도 우리가 하기에 달렸을 것이다. 또한 과거에 어떤 식으로 각 분야가 발전해 왔더라도 더 이상 개별과 고립으로는 현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다이아몬드의 언급대로 ‘세계는 하나의 폴더(네덜란드 해안 간척지)다.’ 세계는 이미 지구 반대편의 사건이 우리에게 실시간으로 정치경제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지구촌으로 바뀐지 오래 되었다. 


순수고립에 가까운 학문 특히 엄청나게 세분화된 분과학문의 깊이있는 발전이란 선택과 집중이라는 면에서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갈수록 이 세계와의 연계성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점이 학자 스스로 혹은 지식사회적으로 종합적으로 검토되지 못한다면 그 한계는 자명할 것이다. 철학의 장인 [순수이성비판]의 언급에서도 나오지만 저자의 언급대로 ‘임마누엘 칸트조차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서 뉴턴의 고전역학에 이르는 과학이 일궈낸 학문의 성과에 감탄하고 자극을 받으면서 답보상태로 보였던 철학사 전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철학의 학문적 지위를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과학혁명과 계몽주의 시대에도 이러할진대 지구촌의 세계에서 온갖 복잡다단한 문제를 안고 있는 현대는 이 문제의 한 가운데에 놓여 있는 셈이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으로 크게 구분되는 현대물리학의 두 이론을 통합적으로 모으기 위해 마지막 인생을 불사르고 있는 스티븐 호킹은 [위대한 설계]에서 우주가 무에서 자발적으로 창조되었다고 단언한다.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자발적 창조이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우주의 운행을 시작하기 위해서 신에게 호소할 필요는 없다.’라고 호킹은 얘기한다. 나 스스로도 이 세계가 저절로 만들어졌는지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는지 여전히 의문이고 그것이 풀릴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궁금하지만 적어도 신에 의존하지 않고 과학적으로 이 세계의 많은 부분들을 서술할 수 있다는 점이 현대과학의 큰 성과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에서도 얘기하듯이 이 세계는 지적설계인가 무에서 저절로 된 것인가를 성급하게 단정하기 이전에 과학적으로도 아직 미지의 세계인 보이지 않는 물질과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차지하는 영역이 무려 95%가 넘으므로 이에 대한 규명부터 차근하게 풀어 나가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신적 도그마나 불합리의 미신에 휘둘리지 않되 과학적으로 발견된 일부의 것으로 모든 것을 규정하지는 않는 겸손과 전진이 여전히 필요하다. 그렇기에 과학을 바깥에서 내려다 볼수 있는 객관화와 통섭의 필요성은 더욱 중요하게 느껴진다.


인간의 장에서 저자는 찰스 다윈이 소소한 생물들(?)이나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속좁은 생물학자가 아니라 누구보다 인류애를 지닌 큰 그릇의 인물이었다고 얘기한다. 저자의 언급대로 그가 지은 [인류의 유래]는 [종의 기원] 못지 않게 훌륭한 책이어서 누구에게나 추천할 만 책이지만 한국에서는 절판이 되어 구하기도 힘든 책이다. 우리의 고전을 바라보는 인식과 수준의 단면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 책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거리가 많지만 역시 가장 논쟁적이라고 할만한 부분은 5장 마음, 뇌의 활동이다. DNA 이중나선 구조의 규명으로 생물학의 새로운 획을 그은 프랜시스 크릭은 인생 후반을 유전자 연구에서 신경생물학으로 옮겨 가서 영혼에 관한 과학적 탐구를 보여준다. 그는 [놀라운 가설]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바로 여러분, 당신의 즐거움, 슬픔, 소중한 기억, 야망, 자존감, 자유의지 이 모든 것들이 실제로는 신경세포의 거대한 집합 또는 그 신경세포들과 연관된 분자들의 작용에 불과하다.’ 영혼은 없다는 것이다. 뇌과학으로 통칭되는 마음과 뇌의 작용에 관한 과학적 연구는 현재진행형으로 많은 성과가 매일 이루어지고 있는 분야이고 현재도 논쟁적이지만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가 94년도이니 지금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고 논쟁적이었을 것이다. 마음 중심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의 마음으로 인해 우리가 움직이고 행동한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뇌과학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의 육신의 변화 특히 뇌의 전기적 작용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움직인다고 볼수도 있다. 이럴 경우 뇌는 마음을 좌지우지하는 주체변수이고 마음은 그에 따르는 종속변수이다. 나는 물론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마음이 종속변수이고 뇌가 주체변수일 경우 인간의 삶에서 설명되기 힘든 부분들이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완전히 이분법으로 볼 부분은 아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선천적인 면을 유전자에 지니고 나오지만 후천적으로 문화와 환경의 영향을 받아 성장하여 자아를 이루듯이 마음과 뇌란 것도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인이라고 손을 들어주기는 아직까지는 힘들다. 다만 뇌과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많은 부분에서 뇌와 그 신경세포에 의해 우리의 마음이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때 과학이 능력상(?) 건드릴 수 없거나 가치나 제도와 습관들로 인해 건드리지 않은 분야가 있었다. 그 하나가 영혼이고 또 하나가 신이다. 이제 영혼은 뇌과학이라는 접근을 통해서 그 신비를 하나씩 벗겨가고 있다. 현재의 뇌과학이 보여주는 영혼의 그림은 현재의식, 잠재의식, 무의식의 영역을 고려해 본다면 전체의 극히 일부분이다. 그러나 현재 뇌과학의 발전 속도를 본다면 의외로 빠른 시간 내에 적지 않은 것들이 규명될 것 같다. 그것이 전체 그림까지 규명되려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겠지만. 또한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과학에서도 신을 본격적으로 얘기할 때가 올 것이다. 이때의 신은 아마 두가지로 나뉘지 않을까? 미신으로 인해 존재조차 없었던 신, 즉 사라져야만 하는 신과 이 세계의 섭리를 위해 애써 왔던 진짜 신, 어쩌면 다른 말로 이 세계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숨어서 움직였던 섭리일 수도 있겠다. 건강한 영혼과 건강한 신(섭리)을 양지로 불러내기 위해서라도 과학의 발전은 필요하다. 그리고 다른 학문과의 적극적인 대화가 더욱 필요하다. 특히 이 시대에 있어서는.


이 책을 덮은 후 가장 먼저 권해주고 싶은 대상은 대한민국 청소년 그 중에서 특히 대학입학을 고민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제일 먼저 추천하고 싶었다. 이 점은 이 책이 청소년에게 읽히기 쉽다거나 시대에 편승하는 만만한 책이라고 생각해서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그 반대에 서 있다. 인생의 방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를 정해야 하는 시기에 한국 청소년의 대부분은 주체적 사고와 자의식을 숨겨두거나 혹은 잃어버린 채 쳇바퀴의 다람쥐처럼 기계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수많은 학생들이 이런 책을 만난다면 망망대해의 어둠 속을 헤매다 등대를 발견한 것처럼 기뻐할지도 모르겠다. 


과학을 좋아하는 일반인이나 과학을 좀 더 알고 싶은 이들에게도 이 책은 매우 적절하다. 특히 과학이나 이 세계의 여러 문제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는 이들이라면 이 책의 사다리를 통해서 더 넓은 시야를 지니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25권의 책뿐만 아니라 그 밖의 많은 인물들과 책들에 대한 저자의 언급과 영감으로 인해 생각보다 페이지를 빨리 넘기지 못했다. 그리고 미처 접하지 못했던 그 책들 위시리스트를 저장하고 소스를 기록하느라 시간을 더 보냈다.


또한 과학계에 종사하는 이들 뿐만 아니라 인문쪽에 관여하는 지식인들에게도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이 책에서도 언급되지만 리처드 파인만이 브라질 리우에서 시내를 바라보는 얘기가 나온다. 한쪽은 고급아파트가 줄지어 서있고 바로 한쪽은 판자촌이 줄지어 서 있다. 과학기술이 모자라서 이런 문제가 현존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사례는 바로 서울의 강남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대형고층아파트 여러개가 위용을 자랑하는 바로 양재천의 건너편으로는 하루한끼를 걱정하는 판자촌 주민들이 살고 있다. 극소세계의 탐구로 원자의 구조를 밝히고 극대세계의 탐구로 별과 은하를 얘기하는 시절에 정작 우리의 터전은 불균형의 심화가 더해지고 있다. 이 문제를 개인적 능력으로 넘겨버린다면 IMF구제금융이 닥쳐서 파산지경에 이르렀는데 그것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 만큼이나 난감한 일이다. 개인적 능력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정책과 제도로 인해 사회와 경제의 불균형이 심화된다면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층은 경제 상류층과 지성인들일 것이다.


과학적인 ‘사실’과 인문적인 ‘가치’를 주요 화두로 하여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대적으로 주요 인문들의 저서를 통해 과학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삶의 방향을 잡는데에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누구에게나 권하고 싶다. 또한 이 세부적인 장에서 독자들은 저자와 혹은 저자가 언급한 인물과 책을 통해 대화와 반론의 세계를 마음 속에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내가 가장 감동받은 부분은 이 책의 말미에 나오지만 여기에서 언급된 책들을 통해서 토론하고 대화하고 에세이를 남기는 과학기술학 협동과정이었다. 이런 토론과 대화의 방식은 최상급의 교육방식의 하나이다. 일방적이고 주입식인 교육방식은 이제 그 시효를 다했다. 이 방식은 빨리 과거의 유물로 보내버려야 한다. 완벽하든 그렇지 않든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발표하고 토론하고 반론하고 대화하고 그 의견의 느낌을 스스로 정리하여 에세이를 남기는 방식은 주체적인 사고에 머물지 않고 자아실현(Self Realization)으로 가는 훌륭한 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저자인 정인경 선생의 건필과 독자들의 건강한 사고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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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지하공간 - 인간은 어떻게 공간과 어둠을 확장해왔는가
김재성 지음 / 글항아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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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지하공간] 김재성 著

- 지하공간의 철학과 기술 그리고 통섭에 관한 고찰


“ 일체의 무상한 것은

한낱 비유일 따름이다.

완전치 못한 일들도,

여기서는 실제 사건이 된다.

형언할 수 없는 것들도,

여기에서는 이루어진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가는도다. ”


- 괴테의 <파우스트> 중에서 마지막 구절인 신비의 합창



핀란드에는 그 성격으로만 보자면 선도적인 지하공간인 온카로(Onkalo)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지하 직경으로는 400m 정도되는 길이지만 지그재그형으로 굴을 판, 총 5km 연장의 공간이다. 이 장소에는 핀란드에서 발생되는 사용후 핵연료인 고준위 핵폐기물, 즉 냄새도 없고 육안으로 봐서는 알수도 없는 그러나 생명체에게는 너무나도 치명적인 방사능물질이 영구 보관된다. 이 공간은 2100년까지 순차적으로 핀란드에서 발생하는 핵폐기물의 용량인 12,000톤이 영구보관된다(현재 전세계의 고준위 핵폐기물의 용량은 총 25만톤 정도로 추정된다.) 이것은 그저 핀란드에서 처리하는 용량일 뿐이다. 고준위 핵폐기물의 방사능은 생명체에게 해가 전혀 없을 정도로 그 영향력이 완전히 감소하려면 10만년 가까운 기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2100년까지는 안전하게 묻고 입구를 완전히 막아 버린 후에는 10만년동안 그곳을 다시 파내지도 말고 관심조차 갖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온카로가 고준위 핵폐기물을 완전 소멸시킬 수 있는 완전한 해답일 수 있을까? 과학적으로 137억년으로 추정되는 우주의 나이로 볼 때 10만년은 매우 짧은 시간이지만 문명의 시간으로 볼 때는 여러번 시작과 종말을 맞이할 수 있는 매우 긴 기간이다.(과학적으로 우리 문명 스스로가 전쟁이나 혜성충돌 등 다른 문제로 지구종말을 맞이하지 않는 한 지금부터 6만년 이후에는 빙하기가 도래할 것이라는 과학적 예측을 하기도 한다. 그 시점에서 지금의 문명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생명체가 이후를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즉 10만년간 문명이 지속된다면 온카로는 그 온전성을 유지하겠지만 문명이 몇 번이나 중지되고 새로 시작된다면 온카로는 그 새로운 문명인들에게 발견되어서는 매우 곤란한 공간이다. 마추피추나 피라미드는 옛 문명의 영광과 위대함을 보여주는 공간이지만 온카로는 향후 10만년동안 인류 혹은 후세의 존재들에게 무조건 쳐다보지 말아야 할 공간이다. 사실 더 큰 문제는 핵폐기물 용량의 랭킹으로 핀란드 위에 존재하는 나라들은 아직 이런 공간의 설계준비조차 제대로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고(한국의 경주방폐장같은 경우는 고준위가 아닌 원자력발전에 사용된 작업복,장갑 등의 중저준위 페기물처리장이다.) 타 국가들의 24만톤의 고준위 핵폐기물은 아직 임시보관이나 재처리 정도에 머물뿐 영구보관될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온카로는 핀란드의 국민들이 여러 토론과 절차를 거쳐 만들어낸 곳이다. 그 공간이 영구 해결책인지에 대해서는 아주 작은 의문은 있더라도 그곳을 만들어내고 있는 핀란드의 국민수준을 짐작할 수는 있다. 핀란드의 핵폐기물 용량수준은 세계에서는 불과 20위권(!) 내외이고 미국이나 일본 등 다른 나라들도 아직 제대로 된 영구처분장을 만들지 못한 상태에서 선도적으로 이루어낸 사례에 속한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의 핵폐기물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전세계에서 원자력은 에너지 발전용량으로 14%나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아직 고준위 폐기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기술적, 철학적으로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온카로라는 지하공간은 말하자면 현대문명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곳이다. 현대인들이 에너지를 활용하면서도 그 뒤처리에 대한 문제, 지속가능한 성장의 입장에서 순환에 관한 문제, 직선적인 발전에서 순환적인 발전으로 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여러 기술적이고 철학적이면서도 인간 삶의 실제적인 화두와 그 해결의 수준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온카로로 대표되는 혹은 각국의 핵폐기물을 처리하는 지하공간은 우리 현대문명이 어디까지 와 있나를 살펴보는 시금석으로 보기에 가장 적절하고 흥미진진한 지하공간의 하나일 것이다.


온카로라는 지하공간의 역할은 이제까지 우리가 누려왔던 에너지원으로서의 결과를 반성하고 그 수습을 지금의 역량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고 믿는 방식으로 수습하고 처리하는 공간이다. 여기에는 ‘반성’과 ‘은폐’와 ‘망각’이라는 철학과 기술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 이는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갔다가 다시 모계사회로 넘어가는 상징적이고 실질적인 신호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


인문적 토목공학자인 김재성의 역작인 [문명과 지하공간]은 흥미롭게도 서두에서 여신의 몰락과 재생을 언급하면서 문명 속에서 지하공간의 역할과 역사에 대해 서술하기 시작한다. 50만년에 가까운 인류사에서 대부분은 재생과 순환을 바탕으로 하는 모계사회였는데 길어야 수천년, 더 많아야 1만년의 세월동안 부계사회 즉 남성성의 역할과 가치가 부각되면서 이 순환의 법칙이 무시되거나 거부되면서 직선적이고 종말론적인 발전개념이 우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물질문명의 발전은 극대화를 이루어 현재에 다다르고 있는데 이제 다시 인류는 재생과 순환을 무시한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서서히 깨닫고 지속가능한 성장과 순환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의 국면에 서 있다. 


인류와 지구의 미래를 깊이 생각지 않거나 직선적이고 순환적이지 않은 발전만을 위주로 이루어 온 현대문명은 여러 곳에서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러 문제들이 당도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해결되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이라도 문제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진단한다면 지구가 허무하게 끝을 맞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자는 서두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하와 겨울과 어둠이 없다면 지상과 봄과 밝음 역시 의미가 없어진다. 죽음이 없다면 삶도 의미를 잃는 것이다. 죽음과 삶, 지하와 지상, 겨울과 봄을 연결하는 순환의 고리가 끊어질 때 인간은 물질적 차원 이상의 상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환경오염이나 생태계 교란같은 눈에 보이는 피해뿐만 아니라 인류 문명을 지탱해온 재생과 포용의 신화마저 잃게 되는 것이다.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물질문명의 환상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자연의 자정 능력을 존중하고 여성적 관용과 순환적 세계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평화로운 삶은 지속될 수 없다 (p.26)”

그러므로 저자는 그동안 어둡고 위험하며 불결한 곳으로 치부해온 지하공간에 대한 인식 역시 그러한 차원에서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역설한다. “무의식에 각인된 부정적 인식을 떨쳐버리고 지하공간을 삶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한다면 그곳은 다시 따뜻하고 안락한 공간이 될 것이다 (p.27)” 저자는 이를 위해 마르셀 푸르스트가 사색하고 몽상하던, 개인적이고 은밀한 공간이었던 다락방을 언급하면서 지하공간의 역사를 살펴보기 시작한다.


동굴은 인류가 거친 자연환경 속에서 삶의 유지를 위한 피신처이자 거주처였을 것이다. 최초에는 자연동굴에서 생활했겠지만 동굴 내부를 손을 봐서 인공적인 형태를 조금 더 띨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생활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수로나 지하 통로를 뚫기도 했다. 저자는 책의 1부에서 ‘인간과 지하공간’이라는 주제로 동굴로부터 시작된 인류의 삶으로부터 시작해서 통로로서의 지하공간, 도시철도로 대표되는 통로공간, 해저터널 등을 일별하고 있다. 그리고 지하공간의 미래에 대해서도 예측해 보고 있는데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저자의 착안으로부터 시작된 ‘상상 설계대전’이라는 기획이다. 지금 당장의 기술력으로는 무리이지만 가까운 시기에 혹은 수십년내에 실현가능할수도 있는 미래의 문명공간을 제안,기획,설계하는 프로젝트 제안은 현대문명의 한계와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다양한 아이디어의 한 허브 역할을 맡는다는 점에서 매우 높이 살만한 부분일 것이다.


2부에서 저자는 ‘쉼’이라는 주제로 생활문화공간이라는 측면에서 지하공간의 사례를 역사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이 장에서 가장 관심깊게 봤던 부분은 로마시대의 종교 박해를 피해 지하로 들어가 하나의 도시수준을 형성했던 터키의 ‘데린쿠유’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으로 지하 20층 정도에 달하는 55미터의 깊이에서 2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주거용 방과 부엌, 학교, 교회, 가축을 기르는 공간 이외에도 다양한 시설을 만들고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는 것은 믿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사례일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흔한 지하공간의 역할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지상의 권세와 박해를 피해 살아가던 그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짐작하기 쉽지 않다.


3부에서는 ‘길’이라는 주제로 소통을 위한 터널로서의 지하공간을 역사적으로 가장 빠른 바빌론에서부터 한중 해저터널과 한일해저터널의 미래까지 살펴보고 있다. 지하공간을 특정한 곳에서의 공동공간이 아니라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길이 지하를 통해 터널로 연결된다는 것은 의외로 아주 오랜 과거부터 시작된 역사가 존재한다. 이 장에서 가장 흥미롭게 본 부분은 문헌으로만 존재하는 바빌론의 터널과 공사과정 자체가 미스터리한 측면이 강한 히스기야 터널 이외에도 한때 유럽전역을 호령했던, 기세당당했던 로마제국이 멸망당한 이유에 대한 저자의 언급이다. 흔히 로마 멸망의 원인을 도덕적 타락으로 꼽기도 하고 넓은 제국이라는 거대한 몸집을 유지하기 힘들었다는 점에서 원인을 찾기도 하지만 저자는 고트족의 침입으로부터 시작되어 로마를 수호하기 위해 철옹성을 만든 이후 수로와 물자 공급망을 차단당한 것에 주요한 원인이 있다고 언급한다. 이로 인한 전염병과 굶주림은 따라오는 결과였을 것이다. 거대한 제국이 멸망하는 데에는 그에 걸맞는 거대한 이유가 있겠지만 이처럼 실용적인 것에 주요한 원인이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4부에서는 ‘씀’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용도의 지하공간을 살펴보고 있다.

소금동굴에서부터 곳간으로서의 역할, 포도주 저장고 등과 석빙고와 석굴암 등의 한국의 지하공간도 살펴보고 있다. 과학에 관심있는 이들이라면 눈여겨볼만한 곳은 지하 100미터에 직경 2킬로미터의 거대한 입자가속기가 설치되어 있는 유럽원자핵연구소일 것이다. 이 장에서 가장 관심있게 본 부분은 이 책의 표지그림으로도 사용된 파리의 음향연구소(IRCAM)이다. 우리에게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잘 알려진 피에르 불레즈의 의해 설립된 이 음향연구소는 소리와 음향을 기술적, 학구적으로 실험하고 연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외부의 소음을 최대한 막고자 지하에 만들었지만 지상과 지하로 연결하는 동선과 공간의 느낌에서 지상과 지하의 경계를 무너뜨린 설계로 유명하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지하공간 더 넓게는 폐쇄공간에서의 사례들을 역사적이고 실제적인 문헌과 현장을 통해 기록하고 설명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런 공간들에 관심이 많거나 여행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오랜시간동안 가이드의 한 역할을 할수도 있을 것이다. 올초에 이 책이 출간될 당시에 여러 언론과 방송에서 이 책이 화제가 되고 기사화되기도 했지만 이책은 단연코 반짝 하는 베스트셀러로서의 측면보다는 꾸준히 참조되고 연구될만한 스테디셀러로서의 역할이 더 어울리는 책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인문적인 시선으로 이 공간들의 실용적인 측면들을 넘어서서 공간 자체의 실용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혹은 고대 혹은 오래된 지하공간들이 지녔던 숨은 가치들과 노력을 발굴하고자 하는 것에도 열정을 보인다. 이는 저자의 공학적인 역량 외에도 저자 내면의 성실함과 순수성과 인문성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많은 부분의 지하공간의 서술에서 저자는 저자 특유의 공학적이고 실제적인 기술로 인해 인문적인 측면과는 다른 면의 실용성을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기존 인문위주의 문화저술에서 실제 사례에 대한 언급에서의 막연함과 모호성이라는 면에서의 아쉬움이라는 면에서 볼 때 이를 상쇄할 만한 구체성의 언급이라는 점에서 속시원한 부분이 있다. 다만, 독자와 더 나아가 저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학적인 면과 인문적인 면의 혼재된 양상에서 비롯된 전체적인 일관성의 톤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그리하더라도 책의 매력과 특이성이 살아있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은 숙제로 남겨두기로 하자. 이런 점에서 추후에 저자의 건투를 빌고 싶다.


또한 중요한 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 책의 서두에서 페르세포네 신화를 언급하면서 시작된 문명의 여성성이 지하공간을 통해서 많이 그 사례를 띠고 있는 바, 물질문명의 정점 혹은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고 판단되는 이 시기에서, 종착점이 뻔히 보이고 있는 재생불가능하고 직선적인 발전양상을 지나서, 재생가능하고 순환론적인 진화를 보이는 문명과 공간의 사례를 발굴하고 알리고 응원하는 일이 더욱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온카로는 가장 단적인 예일 것이고 이 책에서 언급된 광산의 역할이 다한 쓸모없어진 공간을 문화공간으로 바꾼 광명 케이번 월드라든지 시베리아의 미르니 광산을 에코시티로 만드는 계획은 명백히 기존 문명의 성찰과 여성성의 측면이 반영되어 가는 과정일 것이다. 기존의 공간사례가 이미 만들어진 직선적 가치들의 결과를 뒤처리하거나 개조하는 것이 당분간의 이슈라면 이후 혹은 미래에는 순환과 재생 그 자체가 직접 반영된 문명 혹은 지하공간의 사례가 더욱 늘어나길 바래본다.


집 하나 만드는 것이나 건축을 하는 데 있어서도 철학과 미학이 깃든 반면 사회적으로나 문명적으로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토목이나 사회간접자본은 오히려 철학이 배제되거나 무시된 채 실용성을 빙자한 명분으로 정치성은 지나치게 개입되어 사회 부조화와 갈등의 원인이 되는 사례가 무수히 많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거대한 예산과 거대한 물량이 투입되는 사회간접자본이나 지하공간은 특히 그 양적인 측면에 걸맞는 가치와 철학의 정당성과 미래성을 담보해야 할 것이다. 서구의 역사에 비해 지리토대적인 측면에서도 지하공간의 개발이나 필요성이나 사례가 많지 않았던 한국의 경우는 경제적인 고속성장과 맞물려 저자도 언급하듯이 세계적인 수준의 토목공사 기술을 지니고 있다. 세계적인 애니메이션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좋은 작화기술을 갖고 있다고 해서 세계적인 명작이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그 기술에 함몰되어 있다 보면 기껏해야 다른 나라의 협력업체나 하청에 머물러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인류의 미래와 조화를 생각하는 큰 그림과 설계를 이 땅에서 직접 이루어 가는 일일 것이다. 저자의 기획으로 이루어진 ‘상상 설계대전’처럼 제한없는 인류의 미래를 위한 문명공간의 그림을 그리는 마당의 장이 아낌없이 펼쳐질수록 그 시기는 앞당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를 포함한 통섭이 필요하다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인지하는 이 시대의 모든 선각자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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