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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읽다 - 누구나 과학을 통찰하는 법
정인경 지음 / 여문책 / 2016년 9월
평점 :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직면한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고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해야 하고, 그래서 철학과 과학을 탐구한다. 우주론이나 진화론, 윤리학과 같은 진리는 철학자나 과학자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처한 상황에서 더 나은 선택과 올바른 결정을 하려고 애쓰는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할 지식이다. 그동안 우리가 진리를 찾았던 이유는 마음속에 올바른 앎과 삶에 대한 갈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과학을 읽다] 2장 철학 - 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 마지막 장
정인경 선생의 [과학을 읽다 - 누구나 과학을 통찰하는 법]이 다루고 있는 주요한 화두는 사실과 가치이다. ‘사실’은 ‘이 세계가 어떻게 되어 있나’ 하는 과학적 접근법이 유효한 방법이고 ‘가치’는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인문적 접근법이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한때 이 사실과 가치를 각기 신봉하는 이들이 서로 만나지 않고 심지어는 서로 배척하기 까지 한 정도의 시대가 있었다. 현대에도 이런 경향은 지역별로 그 차이가 있을지언정 뚜렷이 그 흔적이 남아 있거나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다. 그러나 시대와 상관없이 이 두가지 사안은 절대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이 세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지를 더 제대로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점은 지식인과 일반 수용자의 입장으로 보자면 약간 다른 면이 있다. 일반 수용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사실과 가치는 예나 지금이나 세계와 삶이 분리된 것이 아니므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입장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과학에 복무하는 지식인’과 ‘인문학에 복무하는 지식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본인의 전공이나 지식을 더 파고들기 위해서든 혹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찰스 스노우가 ‘두 문화’로 언급했듯이 일종의 거리두기가 과거부터 존재해 왔다. 그러나 현 시대는 물리학이나 화학, 생물학의 교류같은 인접 과학과의 소통 혹은 사회학, 심리학, 철학같은 인접 인문학의 소통을 넘어서 과학과 인문학의 소통이 요구되고 있는 시대이다. 에드워드 윌슨은 과학과 인문학의 통섭을 제창하고 엣지재단은 지식의 최전선에 있는 두 문화의 학자들을 불러모아서 발표와 토론의 장을 아끼지 않는다. IT 기기 하나에 모든 기능을 담는 것을 디지털 컨버전스(Digital Convergence)라고 한다면 - 이것의 대표격이 스마트폰이다 - 과학과 인문학의 소통 그것에서 더 나아가 융합으로 가는 아카데믹 컨버전스(Academic Convergence)의 시대로 가는 본격적인 길목에 우리는 서 있다.
이런 시점에서 [과학을 읽다]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책이다. 저자는 책의 구성을 크게 역사, 철학, 우주, 인간, 마음이라는 다섯 개의 장 속에서 각기 5권의 책을 이야기함으로써 총 25권의 책을 중심으로 과학과 연계되거나 관련된 이야기들을 풀어나간다.
이 책의 저술의도 중의 한가지는 역사의 장에서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를 언급하는 데서 분명히 드러난다. 환경오염과 인구증가, 지구온난화, 에너지 부족, 야생 동식물 멸종 등의 문제등은 지구가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오다 생긴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문명 특히 현대과학기술문명으로 인한 이 현상들은 이대로 흘러가도록 놔둘 경우에 지속불가능한 상태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문명을 만든 것도 우리이니 현대문명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것도 우리가 하기에 달렸을 것이다. 또한 과거에 어떤 식으로 각 분야가 발전해 왔더라도 더 이상 개별과 고립으로는 현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다이아몬드의 언급대로 ‘세계는 하나의 폴더(네덜란드 해안 간척지)다.’ 세계는 이미 지구 반대편의 사건이 우리에게 실시간으로 정치경제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지구촌으로 바뀐지 오래 되었다.
순수고립에 가까운 학문 특히 엄청나게 세분화된 분과학문의 깊이있는 발전이란 선택과 집중이라는 면에서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갈수록 이 세계와의 연계성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점이 학자 스스로 혹은 지식사회적으로 종합적으로 검토되지 못한다면 그 한계는 자명할 것이다. 철학의 장인 [순수이성비판]의 언급에서도 나오지만 저자의 언급대로 ‘임마누엘 칸트조차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서 뉴턴의 고전역학에 이르는 과학이 일궈낸 학문의 성과에 감탄하고 자극을 받으면서 답보상태로 보였던 철학사 전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철학의 학문적 지위를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과학혁명과 계몽주의 시대에도 이러할진대 지구촌의 세계에서 온갖 복잡다단한 문제를 안고 있는 현대는 이 문제의 한 가운데에 놓여 있는 셈이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으로 크게 구분되는 현대물리학의 두 이론을 통합적으로 모으기 위해 마지막 인생을 불사르고 있는 스티븐 호킹은 [위대한 설계]에서 우주가 무에서 자발적으로 창조되었다고 단언한다.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자발적 창조이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우주의 운행을 시작하기 위해서 신에게 호소할 필요는 없다.’라고 호킹은 얘기한다. 나 스스로도 이 세계가 저절로 만들어졌는지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는지 여전히 의문이고 그것이 풀릴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궁금하지만 적어도 신에 의존하지 않고 과학적으로 이 세계의 많은 부분들을 서술할 수 있다는 점이 현대과학의 큰 성과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에서도 얘기하듯이 이 세계는 지적설계인가 무에서 저절로 된 것인가를 성급하게 단정하기 이전에 과학적으로도 아직 미지의 세계인 보이지 않는 물질과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차지하는 영역이 무려 95%가 넘으므로 이에 대한 규명부터 차근하게 풀어 나가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신적 도그마나 불합리의 미신에 휘둘리지 않되 과학적으로 발견된 일부의 것으로 모든 것을 규정하지는 않는 겸손과 전진이 여전히 필요하다. 그렇기에 과학을 바깥에서 내려다 볼수 있는 객관화와 통섭의 필요성은 더욱 중요하게 느껴진다.
인간의 장에서 저자는 찰스 다윈이 소소한 생물들(?)이나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속좁은 생물학자가 아니라 누구보다 인류애를 지닌 큰 그릇의 인물이었다고 얘기한다. 저자의 언급대로 그가 지은 [인류의 유래]는 [종의 기원] 못지 않게 훌륭한 책이어서 누구에게나 추천할 만 책이지만 한국에서는 절판이 되어 구하기도 힘든 책이다. 우리의 고전을 바라보는 인식과 수준의 단면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 책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거리가 많지만 역시 가장 논쟁적이라고 할만한 부분은 5장 마음, 뇌의 활동이다. DNA 이중나선 구조의 규명으로 생물학의 새로운 획을 그은 프랜시스 크릭은 인생 후반을 유전자 연구에서 신경생물학으로 옮겨 가서 영혼에 관한 과학적 탐구를 보여준다. 그는 [놀라운 가설]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바로 여러분, 당신의 즐거움, 슬픔, 소중한 기억, 야망, 자존감, 자유의지 이 모든 것들이 실제로는 신경세포의 거대한 집합 또는 그 신경세포들과 연관된 분자들의 작용에 불과하다.’ 영혼은 없다는 것이다. 뇌과학으로 통칭되는 마음과 뇌의 작용에 관한 과학적 연구는 현재진행형으로 많은 성과가 매일 이루어지고 있는 분야이고 현재도 논쟁적이지만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가 94년도이니 지금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고 논쟁적이었을 것이다. 마음 중심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의 마음으로 인해 우리가 움직이고 행동한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뇌과학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의 육신의 변화 특히 뇌의 전기적 작용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움직인다고 볼수도 있다. 이럴 경우 뇌는 마음을 좌지우지하는 주체변수이고 마음은 그에 따르는 종속변수이다. 나는 물론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마음이 종속변수이고 뇌가 주체변수일 경우 인간의 삶에서 설명되기 힘든 부분들이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완전히 이분법으로 볼 부분은 아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선천적인 면을 유전자에 지니고 나오지만 후천적으로 문화와 환경의 영향을 받아 성장하여 자아를 이루듯이 마음과 뇌란 것도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인이라고 손을 들어주기는 아직까지는 힘들다. 다만 뇌과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많은 부분에서 뇌와 그 신경세포에 의해 우리의 마음이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때 과학이 능력상(?) 건드릴 수 없거나 가치나 제도와 습관들로 인해 건드리지 않은 분야가 있었다. 그 하나가 영혼이고 또 하나가 신이다. 이제 영혼은 뇌과학이라는 접근을 통해서 그 신비를 하나씩 벗겨가고 있다. 현재의 뇌과학이 보여주는 영혼의 그림은 현재의식, 잠재의식, 무의식의 영역을 고려해 본다면 전체의 극히 일부분이다. 그러나 현재 뇌과학의 발전 속도를 본다면 의외로 빠른 시간 내에 적지 않은 것들이 규명될 것 같다. 그것이 전체 그림까지 규명되려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겠지만. 또한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과학에서도 신을 본격적으로 얘기할 때가 올 것이다. 이때의 신은 아마 두가지로 나뉘지 않을까? 미신으로 인해 존재조차 없었던 신, 즉 사라져야만 하는 신과 이 세계의 섭리를 위해 애써 왔던 진짜 신, 어쩌면 다른 말로 이 세계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숨어서 움직였던 섭리일 수도 있겠다. 건강한 영혼과 건강한 신(섭리)을 양지로 불러내기 위해서라도 과학의 발전은 필요하다. 그리고 다른 학문과의 적극적인 대화가 더욱 필요하다. 특히 이 시대에 있어서는.
이 책을 덮은 후 가장 먼저 권해주고 싶은 대상은 대한민국 청소년 그 중에서 특히 대학입학을 고민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제일 먼저 추천하고 싶었다. 이 점은 이 책이 청소년에게 읽히기 쉽다거나 시대에 편승하는 만만한 책이라고 생각해서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그 반대에 서 있다. 인생의 방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를 정해야 하는 시기에 한국 청소년의 대부분은 주체적 사고와 자의식을 숨겨두거나 혹은 잃어버린 채 쳇바퀴의 다람쥐처럼 기계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수많은 학생들이 이런 책을 만난다면 망망대해의 어둠 속을 헤매다 등대를 발견한 것처럼 기뻐할지도 모르겠다.
과학을 좋아하는 일반인이나 과학을 좀 더 알고 싶은 이들에게도 이 책은 매우 적절하다. 특히 과학이나 이 세계의 여러 문제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는 이들이라면 이 책의 사다리를 통해서 더 넓은 시야를 지니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25권의 책뿐만 아니라 그 밖의 많은 인물들과 책들에 대한 저자의 언급과 영감으로 인해 생각보다 페이지를 빨리 넘기지 못했다. 그리고 미처 접하지 못했던 그 책들 위시리스트를 저장하고 소스를 기록하느라 시간을 더 보냈다.
또한 과학계에 종사하는 이들 뿐만 아니라 인문쪽에 관여하는 지식인들에게도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이 책에서도 언급되지만 리처드 파인만이 브라질 리우에서 시내를 바라보는 얘기가 나온다. 한쪽은 고급아파트가 줄지어 서있고 바로 한쪽은 판자촌이 줄지어 서 있다. 과학기술이 모자라서 이런 문제가 현존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사례는 바로 서울의 강남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대형고층아파트 여러개가 위용을 자랑하는 바로 양재천의 건너편으로는 하루한끼를 걱정하는 판자촌 주민들이 살고 있다. 극소세계의 탐구로 원자의 구조를 밝히고 극대세계의 탐구로 별과 은하를 얘기하는 시절에 정작 우리의 터전은 불균형의 심화가 더해지고 있다. 이 문제를 개인적 능력으로 넘겨버린다면 IMF구제금융이 닥쳐서 파산지경에 이르렀는데 그것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 만큼이나 난감한 일이다. 개인적 능력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정책과 제도로 인해 사회와 경제의 불균형이 심화된다면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층은 경제 상류층과 지성인들일 것이다.
과학적인 ‘사실’과 인문적인 ‘가치’를 주요 화두로 하여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대적으로 주요 인문들의 저서를 통해 과학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삶의 방향을 잡는데에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누구에게나 권하고 싶다. 또한 이 세부적인 장에서 독자들은 저자와 혹은 저자가 언급한 인물과 책을 통해 대화와 반론의 세계를 마음 속에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내가 가장 감동받은 부분은 이 책의 말미에 나오지만 여기에서 언급된 책들을 통해서 토론하고 대화하고 에세이를 남기는 과학기술학 협동과정이었다. 이런 토론과 대화의 방식은 최상급의 교육방식의 하나이다. 일방적이고 주입식인 교육방식은 이제 그 시효를 다했다. 이 방식은 빨리 과거의 유물로 보내버려야 한다. 완벽하든 그렇지 않든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발표하고 토론하고 반론하고 대화하고 그 의견의 느낌을 스스로 정리하여 에세이를 남기는 방식은 주체적인 사고에 머물지 않고 자아실현(Self Realization)으로 가는 훌륭한 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저자인 정인경 선생의 건필과 독자들의 건강한 사고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