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에겐 보이지 않아 - 함께하고 싶지만 어쩐지 불편한 심리 탐구
박선화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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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매일 저녁 황금시간대에 방송되는 뉴스에는 너무 흔히 보이지만 흔해서는 안될 것 같은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늙은(!) 남자 앵커와 젊은 여자 앵커가 진행하는 뉴스를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죠. 요즘 제일 잘 나가고 있는 프로중의 하나인 뉴스룸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초고속압축성장을 거쳐 오면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유례없이 이뤄내고 있는 한국에서 많은 것이 바뀐 듯 하지만 안 바뀌고 있는, 예전부터 계속 느껴왔지만 아직은 잘 안 바뀌고 있는 기이한 장면 중의 하나가 이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도 언급했지만 저도 자주 느꼈던 부분입니다. 왜 한국에서는 21세기에 사는 이 시대에도 로즈메리 처치나 크리스티안 아만포같은 오십중반을 넘어 육십을 바라보는 여성 아나운서가 당당히 활동하는 모습을 아직까지 보기가 힘든 걸까요. 사실 위의 장면은 단순히 바람직하고 나쁜 이분법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문화의 일부로 받아들일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교문화의 영향이든 남성적인 지배문화가 극심해서이든 이 문화가 문화적으로 타당해서인지 아니면 개선되어야 할 폐습에 불과한 지에 대한 성찰의 시간이 없었거나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로 위 장면이 바뀌기 시작하는 시간이 한국에서는 남녀평등으로 가는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간주해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한국은 적지 않은 것이 개선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기준에서 보았을 때 여성인권지수는 세계에서 웬만한 경제 후진국보다 못한 최하위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박선화 저자의 [남자에겐 보이지 않아]는 남성과 여성 모두를 돌아보게 하고 어떤 점이 잘못되었고 어떤 점을 개선해야 할지를 배우고 토론할 계기를 제공해 줍니다.

이 책의 특징은 현학적이지는 않되 지적이며 특별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문장을 통해 남녀의 차이에서 생기는 문제와 현상들 너머 인종문제, 가족문제까지 다양한 토픽을 통해 파노라마처럼 펼치고 있습니다. 이 펼침을 통해 독자들은 개척, 전진, 경쟁 등의 남성성에 가까운 덕목들이 그 빛나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어떤 그늘이 있었는지 되돌아보게 되고 공감, 배려, 조화 등의 여성성에 가까운 덕목들이 그 미덕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많은 이들이 알고 있지만 남성성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고 여성성도 여성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남성을 더 남성답게 보이도록 하는 테스토스테론을 얼마나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여성을 더 여성답게 보이도록 하는 에스트로겐을 얼마나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각기의 성격적 특질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테스토스테론을 많이 보유한 여성이 굳이 남성성을 숨길 필요가 없듯, 에스트로겐을 많이 보유한 남성이 여성성을 굳이 숨길 이유가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몸은 남자로 태어났지만 자신은 여자로 살아야 한다는 본성의 부름(!)에 호르몬 조절을 통해 적극적인 변화를 이루는 이들도 많은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남성들은 세상의 절반인 여성의 삶과 문화에 대해 적어도 한번쯤은 진지하게 성찰해 볼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 성찰의 계기로 이 책은 매우 시의적절한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느끼는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중용과 조화의 가치입니다. 보편적이고 흔하고 쉬워보이는 가치이지만 실제 구현은 쉽지 않은 가치입니다. 저자의 서술방식은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제너럴리스트로서의 방식입니다. 한 우물만 깊게 팠을 때 땅속의 세계는 보이지 않았던 많은 것을 보여줍니다. 그 깊이만큼 문명의 진보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두루두루 넓게 파지 않았을 때 보이지 않았던 많은 것들을 외면하고 깊게 판 부분만 유일한 진리라는 신념을 믿고 나아갔을 때 많은 부작용과 희생이 많이 생겼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21세기는 이런 부분적 깊이를 넘어서서 그런 부분들의 통섭과 융합과 조화의 가치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지식의 스페셜리스트는 많지만 지혜의 제너럴리스트는 태부족인 시대인지도 모릅니다. 제너럴리스트로서의 가치는 0% 없거나 100% 갖추어졌거나 하는 것이 아닌 100%에 가깝게 채워가는 점차적인 지혜에 가까울 겁니다. 그러므로 저자가 이 책에서 제기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우리가 어렸을적 흔히 배워왔던 사지선다형 객관식 문제처럼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렸고의 방식이 아니라 어느 정도로 우리가 오랜 관습에 갇혀 있었는지 혹은 그런 문화를 유지하게끔 만든 원인이 무엇인지 같이 성찰해 보는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가 책에서 적절한 비유를 들어 언급한 대로 파이 하나를 10조각 내었는데 그중 8~9조각을 남성들이 경쟁해서 가져가고 1~2조각을 여성들이 가져간 것이 역사적 사실이었을 겁니다. 이제는 경제적 상황이 조금 나쁘거나 힘드니 그 1~2조각마저도 뺐어오겠다는 유아적 발상이 아니라 모두에게 기회가 부여되는 공정한 가치가 공정한 결과로 이어지도록 하는 문화의 정립을 위해 가부장제와 군대문화로 일컬어지는 한국의 빛과 그늘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조화의 문화를 위한 재구성의 시간이 필요한 때입니다. 한편으로 1~2조각 남은 것을 위해 여성들끼리 경쟁하거나 남성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일부 페미니스트 전사들을 조롱하거나 적대시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까지 된 상황을 만든 책임과 원인을 남성 스스로 살펴볼 때가 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 특히 한국 사회에서 남성이 가족을 먹여살리고 경쟁과 성공으로 가는 과정은 쉽지 않은 험난한 길의 연속이었던 점은 사실이고 아직도 그 양상은 적지 않게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양상이 바람직한 지에 대해 혹은 개선이나 진화의 방법이 있다면 어떤 방법이 좋은지 적극적으로 성찰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런 성찰에는 남성들끼리의 경쟁에 아예 참여를 배제하곤 했던 여성들과 함께 이 책이 제기한 논제를 통해 열린 논의를 함으로써 이런 경쟁의 악순환의 방향을 바꾸는 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여성적 가치를 살리는 것은 역설적으로 남성들끼리의 경쟁의 결과와 왜곡의 희생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남끼리, 남녀끼리 덧붙여 여여끼리 이 책에서 제기된 여러 토픽을 논쟁과 토론의 주제로 삼을 만 합니다.

외국에는 글로리아 스타이넘같은 여성의 가치를 남성과 동등하게 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도 있고, 제인 구달같은 자연 생태계의 선순환에 힘을 쏟는 이들도 있고, 반다나 시바같은 국제패권 카르텔과 남성물질주의 경제에 경종을 울리고 공동체와 지구 민주주의를 제창하며 거대담론을 펼치는 훌륭한 여성들이 적지 않습니다. 한국에는 제가 보기에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그러나 그들이 없다면 세상이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를 무수한 여성천사들이 살고 있습니다. 눈에 가시적으로 보이는 제도권에서 드러난 일부 능력으로 사는 남성들에 비해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실제적으로 세상을 바꾸어 가는 많은 여성들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음지에서 많은 역할을 하는 이들이 가시적으로 평가받고 정당한 대접을 받는 문화가 제대로 형성된다면 그때가 남녀평등의 여러 과제 중의 하나를 넘어서는 때라고 봅니다. 모든 곳에서 모든 이들이 온당한 인정을 받는 때가 모두가 바라는 세상일 겁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세계의 통사라고 할만한 역사서의 이름을 <인류와 어머니되는 지구(Mankind and Mother Earth)>라고 지은 바 있습니다. 어쩌면 지구가 신이 보호하는 하나의 공동체라고 가정한다면 그 신은 여신일 겁니다. 괴테가 <파우스트>의 마지막 구절에서 언급했던 ‘영원한 여성성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도다’는 21세기 지구촌의 생존을 위해서 후세들에게 미리 알린 경구와도 같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저자가 남성과 여성에 대해 얘기하고 있지만 여성권을 얘기하면서 더 넓게는 인간권을 얘기한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점은 저자의 언급대로 인간권의 제대로 된 정립이 동물권과 자연권으로 확대 적용될 수 있습니다. 존재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와 공감은 인간권, 동물권, 자연권을 넘어 지구촌의 모든 존재들에 대한 공동체의 가치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습니다.

지적이되 현학적이지 않고, 쉽게 읽히되 성찰할 시간을 주고, 딱 부러지는 유일한 정답을 강용하지 않되 우리에게 처해진 문화에서 더 나아갈 부분을 생각해 보는 사다리의 역할을 해주는 책이라면 안 읽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어머니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친구들에게 권해줄 수 있는 드문 책으로서 박선화 저자의 [남자에겐 보이지 않아]를 모두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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