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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 지구를 뒤덮다 -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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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에게 지구별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스스로를 ‘국제 사회주의자’이자 ‘마르크스주의-생태주의자’라고 밝히는 마이크 데이비스 교수는 <슬럼, 지구를 뒤덮다>(이하 <슬럼>)에서 지구는 “PLANET OF SLUMS” 라고 한다. 생명의 근거인 푸른 바다와 숲도 아니고, 문명의 상징인 마천루도 아닌, 슬럼이 지구를 대표한다니 꽤 불길하게 들린다. “한 사람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은 그가 사는 주택의 위상에 따라 형성되는 것 같다”고 저자는 말하는데, 혹 여러분이 슬럼을 범죄와 타락의 온상이 아닌 가난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삶의 터전으로 바라본다면, <슬럼>은 편안한 책이 아닐 것이다. 책 어디를 펴 보아도 “여기가 지옥이다. 견디어라”를 말해주는 통계와 묘사를 확인할 수 있다. 가히 신자유주의 시대 세계 도시 빈곤화의 참담한 실상에 대한 최상의 고발서 중 하나랄 수 있다. 그런데 혹 좋은 취지의 책이지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통계와 구체적인 묘사가 연상되어 지루하겠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슬럼>은 250여 페이지라는 많지 않은 분량으로, 세계 도시빈곤에 대한 다각도의 접근 및 그 원인 분석 등의 각각 고유한 8개 주제들을 독자에게 구체적으로 전달하려는 의도로서만 자료들을 제시함으로써 필요한 만큼의 말만 하는, 마치 유능한 탐정이 쓴 사건보고서 같은 책이다. 그리고 탐정이 범인을 찾아내듯이, 데이비스 교수는 세계 도시 빈곤을 토해내는 괴물로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고발한다. 우리는 이로써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범죄 목록에 세계 도시 빈곤을 추가할 조서를 얻게 된 셈이다. 이것으로 자본주의를 단죄할지 말지는 우리의 몫이다.


지구를 뒤덮는 슬럼 : 전지구적 프롤레타리아화의 짝패

 그럼 <슬럼>의 주요내용 중 몇 가지를 대강 살펴보자.
 먼저 저자는 서두에서 전지구적 도시화의 물결 및 1980년대부터의 새로운 도시화 형태를 밝히고 있다. 현재 인류는 최초로 도시인구가 농촌인구보다 많은 진정한 전지구적 도시화에 들어서고 있으며, 그 동력은 대부분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등 제3세계 개발도상국 도시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에서 나오고 있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의 제3세계 도시화는 공업성장에 따른 농촌 잉여노동력 흡수라는 기존 패턴과는 다르게 전반적인 도시경제 침체 및 쇠퇴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런 역설적인 현상은 농촌경제 붕괴에 따른 급격한 프롤레타리아화(무산자화) 때문이다. 그리고 제3세계 농민의 프롤레타리아화는 한국의 97년 IMF구조조정 같은, 채무위기를 틈탄 국제금융기구의 시장개방 요구와 구조조정 프로그램 강요의 결과였다. 시장개방으로 거침없이 치고 들어오는 선진 기업농과의 경쟁에서 보조금 축소폐지로 무장해제당한 제3세계 소농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생존수단(토지)을 박탈당하고, 이제는 농산물이 아닌 노동력을 팔기 위해 도시로 뛰어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시경제의 침체와 대규모 농촌->도시 이주의 결합은 거대규모의 도시빈곤으로 이어졌다. 일자리는 없는데 잉여노동력은 넘치는 조건에서 당연하게도 실업과 빈곤은 도시 프롤레타리아의 영구적인 특징이 되었다. 그리고 사회적 부로부터의 항상적인 배제에 결박되어 있는 도시 빈민의 주거형태는 슬럼이 될 수밖에 없다(사실 슬럼이라는 단어 자체가 빈민층의 거주지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또한 최악의 주거환경이라는 부가적인 의미도 갖는다). 그런데 슬럼의 인구는 얼마나 될까? 슬럼에 대해 매우 제한적인 기준을 갖고 있는 UN 연구자들조차도 전세계 슬럼의 인구를 10억명 이상으로 추산하고 있다. 낮추어 잡아도 세계 인구의 1/6 정도(!)인 것이다.

 슬럼은 기본적으로 인구과밀, 열악한 비공식 주택, 안전한 식수와 위생설비의 부재, 주택보유의 불안정 등의 특징을 갖는다. 뉴욕, 서울 같은 선진국형 도시에서는 상류층, 중산층이 교외로 주거지를 옮기는 도심공동화가 진행됨에 따라 도심 주변에 슬럼이 형성되었다가 재개발로 다시 사라지는 패턴을 보였다면, 현재 제3세계의 슬럼화는 도시 주변부의 팽창, 거대화라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남아있는 유일한 재산인 자기 몸과 가족을 이끌고 도시에 당도한 농촌이주자들이 애초에 공식적인 주택을 구입하거나 빌릴 가능성은 없다. 따라서 도시 외곽의 미개발된 공유지나 사유지, 버려진 땅을 무단 점유해서 스스로 집을 짓는다. 이 때문에 제3세계 도시의 슬럼확장은 곧 도시확장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도로, 수도, 전기 같은 공공설비는 애초에 있지도 않는 미개발지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슬럼주민들은 기본적인 공공서비스를 거의 누릴 수 없는 조건에서 엄청난 인구과밀이 초래하는 물부족, 오물 쓰레기의 집적, 오염, 소음, 사생활 노출 등의 비인간적 환경을 견뎌내야 한다. 이로 인한 잦은 병치레, 유아의 때이른 죽음, 전염병의 창궐, 대형화재 등은 슬럼주민의 일상사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위험은 주거의 불안정한 법적 지위에서 온다. 무단 점유라는 원죄가 슬럼주민을 언제든 내쫓길 수 있는 상태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지주들과 개발업자들은 미개발지가 택지로 바뀌는 마술적 효과를 노리고서 처음에는 무단 점유를 용인했다가 추수의 계절이 다가오면 인정사정없이 슬럼을 소탕한다. 이렇게 쫓겨난 주민들은 점점 더 습지, 범람지대, 화산 기슭, 불안정한 경사면, 쓰레기장, 화학폐기물 처리장, 철도변, 사막 가장자리 등의 대형재난의 위험과 상존해야 하는 곳에 새 둥지를 틀어야 한다. 사례를 하나 들어본다면, 카라카스(베네수엘라의 수도)의 불안정한 경사면에 위치에 있던 슬럼에 1999년 폭우로 인한 산사태가 닥쳐 약 3만 2,000명이 사망하고, 14만명이 집을 잃었던 대참사가 있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이처럼 비참한 도시의 빈곤화, 슬럼화가 전지구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3세계 국가들은 도시 빈곤의 새로운 급증에 직면해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만약 이들이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민중의 국가라면 먼저는 서둘러 슬럼지구에 공공시설을 구축하고, 다음으로는 공공주택을 제공하여 주택문제를 해결하고, 근본적으로는 도시빈곤의 해결을 위해 일자리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제3세계 국가들은 정확히 이에 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다. IMF, 세계은행 같은 국제금융기구가 제시하는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종속되어 정부지출, 공공부문을 획기적으로 줄인 것이다. 덕분에 공공부문의 축소로 일자리는 더욱 줄어 공무원들이 도시빈민의 대열에 새로이 동참하게 되었고, 공공주택사업이나 빈민을 위한 인프라 구축은 오직 추억으로만 말해지고 있다. 더욱이 국가와 상류층이 야합하여 그나마 벌어지는 공공사업은 상류층의 편익을 위한 도시환경 재구성에 집중되고 있다. 즉 고위공무원, 군장성, 전문직,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쇼핑엔터테인먼트 시설, 슬럼을 우회하여 도심과 교외 주택단지를 연결하는 도로 등의 건설과 도시미화 사업, 재개발을 위한 슬럼 소탕 등이 빈민을 위한 인프라 구축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국가의 배신과 짝패를 이루는 것이 제3세계 탈식민 엘리트의 배신이다. 제3세계 엘리트는 더럽고 위험한 슬럼을 피해서 사설경비에 의해 지켜지는 폐쇄형 주택단지와 뉴욕과 파리를 본뜬 쇼핑엔터테인먼트 시설을 오가며 과시적 소비와 향락을 누리고 있다. 이들에게 도시는 ‘멋진 신세계’이다. 그러나 슬럼주민들은 이들이 버리는 찌꺼기로 자신들의 밥상을 차려야 한다.


제3세계 도시빈곤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슬럼>의 주요내용 몇 가지를 대강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1980년대 이후의 제3세계 도시빈곤이 기존 제3세계 빈곤의 주요형태였던 저개발의 빈곤(농촌빈곤)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난한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저개발의 빈곤은 낮은 농업생산력과 인구증가 및 자연재해에의 취약성 등을 특징으로 하며, 따라서 전-자본주의적 빈곤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제3세계 빈곤의 새 주요형태로서 도시빈곤은 일단 도시를 무대로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실업과 불평등의 빈곤이라는 점 때문에 자본주의적 빈곤이다. 저개발의 빈곤, 소농의 빈곤이 낮은 농업생산성 때문이었더라면, 도시빈곤은 도시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지 못하는 상태, 즉 실업에 기인한다. 그리고 불평등의 빈곤이란 폐쇄형 고급 주택단지와 슬럼의 확연한 대비가 보여주듯이, 불평등한 부의 분배와 이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이 도시빈곤에 수반된다는 것이다. 실업과 상대적 박탈감이 낳는 빈곤의 고통은 자본주의의 고유한 현상이다.

 이러한 제3세계 저개발 빈곤의 자본주의적 빈곤으로의 전환과 제3세계의 전지구적 자본주의로의 편입은 동전의 양면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채무위기를 틈탄 IMF와 세계은행의 시장개방 강요로 제3세계는 세계시장으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편입은 생계형 농업을 경영하며 잉여농산물을 인근 도시에 팔아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던 제3세계 소농들을 전지구적 농업생산의 잉여 농업노동력으로 탈바꿈시켜 버렸다. 이제 제3세계 도시주민들은 인근 농촌의 것이 아닌 선진 기업농의 과잉생산된 농산물을 소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제3세계에서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광범위한 프롤레타리아화가 발생했고, 이들 잉여노동력들은 도시로의 엑서더스를 감행했다.

 그러나 도시경제는 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지 못했다. 국가주도 수입대체공업화 프로젝트가 채무위기로 중단되면서, 도시경제는 이미 성장을 멈춘 상태였다. 새로운 성장 프로젝트로 국제금융기구는 외국인투자에 대한 규제를 풀고 자본시장을 전면 개방하여,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치하라고 했다. 그러나 초국적 자본은 투자지역을 선별했고, 이로부터 배제된 지역은 낙후된 지역으로 고착되었다. 그리고 제3세계 경제엘리트는 세계화를 제1세계의 수익성 높은 자산을 더 많이 획득하는 기회로 여길 뿐이었다. 더 이상 제3세계에는 누구도 투자하지 않는다. 상품과 자본의 장벽없는 자유로운 이동이 이뤄지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에서 자본축적은 보다 많은 수익을 보장하는 곳에서만 이뤄질 뿐이다. 이제 실업은 더 이상 국민경제 차원에서 결정되는 문제가 아니다. 세계 어디든 투자할 수 있는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한 나라의 프롤레타리아는 전지구적인 산업예비군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이 때문에 제3세계 도시 실업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일부인 것이다.

 이처럼 제3세계 도시빈곤은 자본주의적 빈곤이며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따라서 제3세계 도시빈민의 가난을 끝장내기 위한 싸움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투쟁일 수밖에 없다. <슬럼>의 저자 또한 “인간 연대의 미래는 도시 빈민이 전지구적 자본주의 내에서의 최악의 주변성을 전투적으로 거부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밝힌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도시 빈민에게서 전복적 역량을 기대해도 좋은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데이비스 교수는 <슬럼>의 속편에서 답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금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슬럼 기반 투쟁의 역사와 미래”에 관한 책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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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READ 마르크스 How To Read 시리즈
피터 오스본 지음, 조원광 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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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 유발 마르크스주의자들 

 지금 이 글을 읽기 시작한 여러분들은 마르크스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가? 아마도 무관심한 대다수와 이보다는 적은 수의 불편해하는 이들, 그리고 호감을 보이는 소수가 이 글을 읽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쩌면 관심이 없고 불편해하는 독자들은 읽지 않고 지나쳤다고 보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마르크스가 인기없고 볼품없는 아이템으로 전락한 것은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진보라는 가치를 고민하는 학생, 지식인들도 최장집 교수의 민주주의론이나 홍세하 교수로 인해 유명해진 똘레랑스, 반핵평화, NGO 등을 선호한다. 그리고 하버마스, 푸코, 들뢰즈, 데리다 등의 현대사상가들이 마르크스를 대신한다.

 대화와 관용, 합리적 절차, 비폭력 평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치장한 세련되고 현대적인 ‘진보’에 반해 마르크스주의는 상당히 부정적인 이미지-가령 편협, 교조, 반사회성, 거리를 혼잡케하는 집회, 무엇보다 실패한 사회주의-와 맞닿아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이들이 마르크스를 멀리한다. 또한 마르크스가 유발하는 불편 혹은 짜증은 이른바 운동권 특유의 계몽적, 실천적 성격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너는 잘못된 허위의식에 빠져 있어”, “특권을 버리고 실천과 활동에 나서야 해”라는 ‘나’의 과거로부터 계속된 의식과 일상을 깨버리라는 요구만큼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은 없다.

 이러한 규범적, 일방적 성격은 마르크스주의가 가치중립성이라는 학문의 절대조건과 가치의 상대성이라는 현대의 도덕률을 위반하고 있는 증거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마르크스주의는 객관성을 상실한 비-학문이자 낡은 도덕이다. 마르크스가 휴머니스트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는 노동자의 불쌍한 처지를 동정한 나머지 균형을 잃고 자본주의가 갖는 역동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는 이를 부당한 판결이라고 항변한다. 여기까지 읽었으니 인내심을 내서 항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잠시 샛길로 빠져보자 

 우리는 흔히 세계 그 자체를 순수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이것이 착각인 까닭은 우리가 보고 만지는 경험은 모두 감각기관에 의해 매개되기 때문이다. 인식된 사물과 사물 그 자체가 일치한다고 누구도 보증하지 못한다. 감각기관을 초월해서 사물을 직접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나아가 인간의 경험은 동물과는 달리 감각기관과 더불어 언어에 의해서도 중계된다. 우리가 다리가 서너 개 달린 평평한 판자를 탁자라고 인지하는 것은 이런 모습을 한 사물들을 탁자라고 지시하는 언어적 질서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그것을 탁자라고 여기는 이상, 우리는 직접 그것에 앉기보다는 무언가를 올려놓는 용도로 사용한다.

 한편 언어는 단순히 대상과 음성 사이의 지시관계가 아니다. 언어에는 가치와 규범, 세계관이 기입돼 있다. 가령 광인이라는 말은 특정한 문화적 실천을 보편적 기준으로 전제하고 이를 정상이라는 말로 버무리면서, 보편적 기준에서 벗어나있는 이들에 대한 배타성과 공격성을 함축한다.

 다소 엉뚱하게도 우리의 경험이 감각기관, 언어, 세계관 등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을 언급한 것은 인식에서의 주체의 ‘능동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실체를 바라보기에 앞서 실체를 바라보는 방법을 먼저 배운다. 또한 우리는 실체를 충분히 알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알기 이전에 먼저 판단한다. 이런 측면에서 실체를 바라보는 방법과 판단은 선험적(경험 이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선험적 인식방법과 판단은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 아닌 역사적 생산물이다. 다만 누구나 특정 방향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기에 자연적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인류가 자연력 앞에서 스스로를 지켜내기에도 벅차던 시대에 자연은 공포와 외경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이런 공포와 외경이 자연현상은 신적 권능의 산물이라는 자연에 대한 앎을 결정했다. 인류가 점차 자연력을 자신의 의도와 목적에 맞게 조절할 수 있게 됨으로써만 비로소 자연은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세계를 보기 이전에 보는 방법을 먼저 배우고, 이런저런 보는 방법에는 세계에 대한 어떤 판단들이 전제되어 있다. 사실과 가치는 엄격히 분리되지 않는다. 가치는 사실을 구성한다. 가치중립적이라는 선언은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일반적인 사회적 가치를 전제한다는 말에 불과하다. 마르크스는 “한 시대의 지배적인 이념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이다”라고 했다. 일반적인 사회적 가치라는 가면을 벗겨내면 그 곳에는 기득권을 쥐고 있는 이들의 꿈틀대는 욕망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이른바 상식과 통념을 거부하고, 세계를 다른 방법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기득권을 쥐고 있는 자들의 욕망에 의해 고통받는 이들의 절규에서부터 출발하자고 한다. 


왜 오늘날 여전히 마르크스인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하에서의 비인간적 삶으로 인해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절규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절규를 낳는 힘들을 분석한다. 마르크스의 분석이 과학적일 수 있는 것은 그의 출발점으로서의 절규가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의 외침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로 배따신 이들과는 반대로 절규에 이른 자들은 변화를 요구한다. 자신들의 의도와 목적에 맞게 사회를 개조하고자 한다. 자연이 인간의 목적에 조응하는 변형의 대상이 됨으로써 그 내적구조가 밝혀졌듯이, 사회 변혁을 통해서만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할 수 있는 노동자계급의 관점에 설 때만이 사회구조를 낱낱이 밝혀낼 수 있다. 이는 가치에서 중립적일 때만이 객관적일 수 있다는 통념과는 달리 사회과학은 노동자계급의 당파성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모순적으로 보이는 입장이다. 그러나 모순은 오히려 이른바 주류적 시각에 있다.

 주류적 시각의 모순은 존재하는 것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태도이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취급을 받는 것은 바로 노동자들의 억압과 고통이다. 가령 주류 경제학은 임금을 노동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의 균형에 의해 결정되는, 동등한 고용인과 피고용인 사이의 자유로운 계약의 결과로 바라본다. 그리고 노동조합과 파업은 노동의 공급을 통제하여 노동시장에서의 균형가격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아내려는, 시장을 교란하는 집단이기주의적 행태이다. 이러한 관점대로라면 동일노동을 하고도 기존 임금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임금을 받는 비정규직이나 최저생계비도 안되는 임금도 조화로운 시장의 결과이다. 구조조정으로 심각한 생활수준의 하락을 막아보고자 하는 노동자의 파업이나 노동자 집회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는 인간적인 삶에 대한 진실한 외침도 집단이기주의적 행태에 불과하다. 이외에 주류적 시각이 결코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 있다. 살아있는 노동자가 자본의 이윤창출 시스템 속에서 죽어있는 부품이 되어야만 하는 극심한 소외. 그리고 이로 인해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심지어는 스스로 목숨까지 끊는 자본에 의한 ‘타살’이다.

 마르크스는 그저 이처럼 생생한 현실로부터 시작하자고 할 뿐이다. 존재하는 불의를 인정하자고 한다. 그리고 노동자의 절규가 단지 사회 하층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절규임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즉 노동자의 절규를 낳는 자본의 파괴적 힘은 사회 전체로 구석구석 퍼져나가 인간과 자연에 질곡을 가한다. 자본주의는 우리를 화폐에의 극심한 의존으로 몰고 가 맹목적인 화폐추구와 무한경쟁에 우리를 결박한다. 인간적 가치에 대한 인간 고유의 욕구는 마모되고 소진되어, 종국에는 자본의 이윤에 대한 비합리적 충동이 우리의 영혼을 대신한다. 자연과의 조화마저 산산조각낸다. 이러한 인간적, 생태적 가치에 대한 위협으로서 자본주의는 우리 모두의 해방을 위한 극복의 대상인 것이다.

 노동자의 절규가 끊임없이 터져 나오고 자본주의가 여전히-어느 때보다도- 인간과 자연에 질곡을 가하는 오늘날,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해 자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던, 따라서 지배계급의 욕망에 의해 구조화된 이데올로기를 들춰내어 그 내적구조를 생생하게 밝혀낼 수 있었던 마르크스의 가치는 그의 시대보다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더욱 읽혀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마르크스로 가는 뛰어난 징검다리 책이 있다. 바로 <HOW TO READ 마르크스>(피터 오스본, 웅진지식하우스)이다(독자들은 이 글의 형식이 서평임에도 이제야 책이 소개된 것을 너그럽게 용서하시라). 


<HOW TO READ 마르크스>는 왜 읽을만 한가? 

 마르크스에 관한 숱한 입문서 중에서 이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약 200여 쪽)의 책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두 가지이다.

 먼저는 책의 형식이다. 이 책은 <HOW TO READ 시리즈>의 하나인데, 사상가의 간단한 이력이나 대표작을 요약하여 알려주는 대개의 안내서들이 갖는 ‘원서의 깊이와 풍부함을 전달하지 못하는 간편한 요약’의 한계를 횡단하기 위해, 이 시리즈는 “독자들이 뛰어난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위대한 작가, 사상가들의 저술 자체를 직접 만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들이 정말로 사용한 말들에 독자를 데려가고, 또한 이런 말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보여준다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책의 구성을 보면, 마르크스가 창안한-혹은 새롭게 변형한- 핵심 개념을 잘 담고 있는 저작의 문구를 앞에 배치하고 뒤따르는 저자의 해설을 한 묶음으로 한 10개의 챕터가 있다. 즉 열개의 마르크스의 개념들을 설명하는 셈인데, 상품 물신주의, 실천, 생산양식, 소외, 공산주의, 자본, 본원적 축적 등이다.1)

 개념은 현상을 파악하는 인식 도구로써, 한 사상의 요체랄 수 있다. 개념은 마치 프리즘과 같다.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수많은 색으로 분절되듯이, 개념들을 통과한 뭇 현상은 이면에서 현상을 주조해내는 힘, 규정력들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에 관한 직접적인 설명보다는 그가 무엇으로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설명했는지를 앎으로써, 우리는 마르크스를 따라 스스로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체험을 즐길 수 있다. 가령, 소외라는 개념을 통해서 자본주의 하에서의 인간성의 왜곡을 사고할 수 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인간의 본질은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노동을 통해 자기를 스스로 산출해낸다는 점에 있다. 즉 자연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고 스스로를 결정하고 변형해가는 것이 인간 본질이다. 그리고 노동은 그 성질상 사회적이기-개별적으로 노동한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분업이라는 틀 내에서의 노동이기- 때문에 인간 또한 사회적으로 결정된다. 이 말은 인간이 스스로를 산출해낸다고 해서, 개체가 자유롭게 그러한다는 것이 아니라, 집합적 행동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의 노동의 소외는 인간에게서 집합적 자기 창조력을 앗아갔다. 노동이 오로지 자본의 이윤증식에만 종속됨으로써 인간 또한 맹목적으로 화폐를 추구하는 경제적 인간화되었다. 이제는 이러한 인간상이 마치 태곳적부터 이어져온 본성인양 여겨진다. 획일화된 대중소비문화로 인해 문화창조의 기반이 되는 자율성과 다양성이 압살당하면서 지루하기 짝이 없는 단조로운 미래를 예고한다. 이에 반해 마르크스는 노동의 소외가 지양되는 공산주의 사회를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전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로 그린다. 그리고 노동의 소외는 자본이 아닌 노동자가 사회적 필요의 충족을 위해 스스로 생산을 구상하고 조직함으로써 지양되며, 이러한 노동자의 직접통제는 개인의 자유로운 발달과 인간의 자기 창조력을 재생해 낼 것이다. 

 <HOW TO READ 마르크스>의 두 번째 장점은 저자인 피터 오스본이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마르크스에 관한 해석으로서의 독해, 즉 정통주의(orthodoxy)에 대항하는 독해를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피터 오스본이 비판하는 정통주의는 현실 사회주의에서 정당의 정치적 목적에 맞게 만들어진 교육 체계로 코드화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의미한다.

 사실 정통주의에 대한 비판은 구소련 몰락 이후 스탈린주의 비판이라는 명목으로 꾸준히 계속되어온 온 작업 중의 하나라 새로울 것도 없다. 그러나 이 책은 제대로 된 정통주의 비판이 무엇인지, 즉 기존의 스탈린주의 비판이 명목상이었지 여전히 스탈린주의에 부분적으로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철학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피터 오스본은 런던 미들섹스대학교 현대유럽철학과 교수이며 잡지 <래디컬 필로소피>의 편집자이기도 한데, 자신이 분명 뛰어난 철학자임을 이 책에서 정통주의에 대한 근본적 전복을 통해 보여준다.

 가령 이 책의 3장에서는 마르크스의 생산력 개념에 관한 정통주의의 모순을 뛰어넘을 수 있는 해석을 제공한다. 정통주의는 생산력 발전을 단순히 물질적 생산능력의 확대로 바라보아, 사회혁명의 시기로서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생산관계로 인한 물질적 생산능력의 정체로 여겼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언제고 생산력의 정체로 몰락할 것이라고 예언을 했지만, 역사는 반대로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을 보여주었다. 한편 피터 오스본은 생산력의 발전을 동시에 새로운 욕구가 창출되는 과정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해석에 근거하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물질적 생산능력과 사회적 욕구가 확대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생산관계의 질곡으로 인해 노동자계급의 욕구 충족의 가능성은 줄어드는 시기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오늘날 매해 계속되는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양극화와 빈곤은 확대되어가는 신자유주의의 특징이다. 

 <HOW TO READ 마르크스>에 피터 오스본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관한 최초 · 최고의 비판적 분석가라고 한다. 어떻게 해서 최초가 최고가 될 수 있었는지 궁금한 이들은 이 책을 펼쳐라!

1) 역자인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고병권, 조원광은 communism을 공산주의로 번역하기보다 원어 그대로 사용하는데, 이는 이들 연구집단이 소련 등의 역사적 공산주의와 대립하는 독자적인 코뮤니즘 개념을 내세우는데 그 이유가 있다. 이 글의 필자는 일반적 관례에 따라 공산주의라는 번역어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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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히끄 2007-08-09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이 책이 출판계의 재벌인 웅진에서 나왔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역시 웅진이 만들면 다릅니다.
 
개발주의를 비판한다 - 박정희 체계를 넘어 생태적 복지사회로 당대총서 21
홍성태 지음 / 당대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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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처럼 화석원료에 의존할 경우 금세기 말 지구 평균기온이 4도 올라가고, 해수면은 60cm 상승할 것이다. 북극의 빙하는 전부 녹아 없어지고, 뉴욕 맨하탄과 상하이 등 저지대 도시는 침수한다. 그리고 홍수, 폭염 등 기상이변과 전염병이 빈번해진다. 아시아에서는 1억 명 이상이 식량난에 시달리고, 세계인구의 절반은 물 부족 사태를 겪을 것이다. 금세기가 지나면 기상이변과 전염병 속에서 인류의 10분의 1만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지난 2월 130여국 2천5백여 명의 전문가들이 모인 UN IPCC(기후변동에 관한 정부간 패널)가 발표한 제4차 기후변화보고서의 내용이다. 그리고 IPCC는 지구온난화가 화석연료의 사용에 의해 초래됐을 가능성이 90% 이상, 즉 인류가 부른 재앙임을 분명히 밝혔다. 충격적인 것은 10년 안에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지 못하면 파국은 불가피하다는, 이미 사선에 다가섰다는 경고였다.
정말 두 눈을 번쩍 뜨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얼마나 지구를 지지고 볶았기에 10년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단 말인가. 사실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오존층파괴, 환경호르몬, 스모그, 미세먼지 등의 생태위기에 대한 경고는 끊임없이 울려왔었다. 그러나 경고음을 무시하고 부나비처럼 대재앙을 향하여 알면서도 달러온 것이다. 임박한 파국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생태주의가 울리는 경고에 진지하게 따라야 할 시간이 왔다.
 
 
생태위기의 근본적이고 유일한 대안은 ‘오래된 미래’로의 귀향이다
 
참여연대 정책위원장인 홍성태 교수도 계속 생태위기의 심각성에 대해 지적해온 생태주의자 중의 한 명이다. 그가 지난 2003년부터 2006년 사이 여러 학술지와 단행본에 발표한 논문들을 묶어서 <개발주의를 비판한다>를 펴냈다.
 저자가 느끼는 생태위기의 심각성은 IPCC의 기부변화보고서가 던져주는 충격과 다르지 않다. “현대문명은 이미 지구의 생태적 한계를 넘어섰고, 따라서 현재의 상태로는 그렇게 머지않은 시간 안에 파국이 닥치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생태계에 대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원흉으로 공업문명을 지목한다. “공업은 본질적으로 반자연적”이다. 그러므로 파국을 피할 유일한 대안은 생태사회로의 ‘생태적 전환’이며, “생태적 전환을 통해 우리가 결국 이르게 될 곳은 농업이라는 ‘오래된 미래’의 시공간”이다.
이처럼 현대공업문명은 생태적 한계로 인해 결국은 지속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는 농업문명이라는 ‘오래된 미래’로의 귀향에 달려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홍성태는 공업문명에 대한 양보 없는 생태적 반성을 촉구하는 근본적 생태주의자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는 한편으로 농업사회는 “사실 양적인 면에서 생산력의 급격한 퇴보를 뜻하며, 따라서 이런 변화가 급격히 이루어진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고통을 받게” 되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공업의 성과를 최대한 활용해서 비교적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형 농업의 시대로 점차적인 전환과 이행을 추진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대안은 근본적이면서도, 그 이행에 대해서는 현실적인 것이다.
 
 
지금도 계속되는 박정희 체계가 생태위기를 낳고 있다
 
 저자의 현실적인 면모는 한국의 생태위기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에서도 드러난다. 이는 책의 장점이기도 한데, 서구의 생태주의 이론의 되풀이가 아닌, 한국의 현실에 근거한 구체적인 분석의 시도가 돋보인다. 즉 한국 생태위기의 근원을 쫓아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책임을 밝혀, ‘조국 근대화’에 대한 생태적 반성을 물었다는 점이 책의 핵심이랄 수 있다.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란 곧 개발주의이다. 저자에 따르면, “근대적 개발은 공업문명을 확산하는 행위이며, 개발주의란 이런 근대적 개발을 사회의 핵심적 목표로 삼는 태도를 뜻한다.” 박정희는 경제성장을 최고목표로 추구하는 성장주의에 따라, 민중과 자연의 착취라는 ‘이중의 착취’를 통해 고도성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중의 착취’에 따른 저항을 극악한 폭력으로 짓눌렀다. 따라서 박정희의 개발주의는 압축적이면서도 폭력적인 것이다.
 박정희의 자연에 대한 착취는 특히 공업화를 위한 공간의 급격한 변형이라는 형태로 드러났다. 공업화는 공업단지, 도로, 발전소 등의 사회간접자본을 요구한다. 공업단지 조성을 위해 대규모의 토지 수용이 이루어지고, 공업인력의 생활공간을 위해 도시가 형성된다. 그리고 공산품을 운송하기 위한 도로와 철도가 국토를 가로지른다. 특히 전기를 값싸게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한 대형 댐과 원자력 발전소는 자연을 극심하게 훼손시킨다. 이런 개발의 과정에서 금수강산의 산이 깎여나가고, 하천은 메워지는 자연에 대한 파괴가 아무런 제재없이 폭력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더욱이 박정희는 국토개발을 경제성장의 주요계기로 여겨 끊임없는 난개발을 부채질하여 한국을 ‘토건국가’화 했다. 토건국가란 “토건업과 정치권이 유착하여 세금을 탕진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국가”를 의미한다. 그리고 박정희는 이런 난개발뿐만 아니라, 공장의 폐수와 매연 방출도 경제성장의 논리로 합리화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박정희의 반생태적 개발주의는 민주화와 함께 극복된 것일까? 그러나 지금도 참여정부는 신행정수도, 부안 핵폐기장, 새만금 간척 등의 형태로 개발을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이에 대해 저자는 “박정희의 반생태적 근대화는 결국 반생태적 사회체계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더욱이 박정희가 구축한 반생태적 사회체계, 곧 ‘박정희 체계’는 아직도 맹렬히 작동하고 있다. 박정희 체계는 쉽게 말해서 심각한 성장중독증에 걸린 사회이다. 경제성장을 최고목표로 추구함으로써 민주주의와 분배정의와 생태보존의 가치를 무시한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한국에서 생태적 전환의 첫 번째 과제는 ‘박정희 체계’를 극복하는 것이다.
 
 
박정희 체계를 넘어 생태적 복지사회로
 
 박정희 체계의 극복은 작게는 먼저 토건국가의 한 축인 대한주택공사, 한국수자원공사 등 6대 개발공사를 개혁하는 것이고, 크게는 박정희 체계가 그동안 무시해 온 분배정의의 확대와 생태보존의 강화를 이루는 것이다. “생태적 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복지사회의 구현이 요청된다. 모든 사람이 하루하루의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결국 생태적 전환에 대한 논의가 깊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민주화는 다시 생태적 민주화, 즉 생태민주주의의 확대로 이어져야 한다. 홍성태는 생태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복지사회, 즉 생태적 복지사회를 박정희 체계의 대안으로 제시하며 그의 개발주의 비판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비판은 요란하고 실천을 위한 고민은 없다
 
 홍성태의 개발주의 비판은 열심이지만 실천의 무기가 되기에는 부족한 듯하다. 이는 그의 비판이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대안과 이행경로, 이행의 주체, 이행주체의 형성에 관한 고민이 구체적이지 않거나 아예 없다. 즉 공업문명 이후의 대안으로서의 생태사회에 대해 농업경제, 생태적 가치가 우선하는 사회여야 한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구체적인 상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농업경제로의 전환에 따른 생산력의 저하가 낳을 문제, 즉 전근대 농업사회가 지녔던 열악한 영양, 의료, 보건 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 대략적인 상조차 그리지 않고 있다. 그리고 생태사회로의 긴 이행의 경로는 물론이고 당장 박정희 체계에서 생태적 복지사회로의 생태적 전환에 대한 전략이 부재한다. 개혁, 생태적 민주화, 생태민주주의 등을 말하지만 생태적 패러다임의 내면화, 시민의 참여 같은 원칙의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생태관리기구의 구성, 시민의 생태적 권리 인정 등의 생태적 가치의 법제화에 관한 내용도, 이를 강제하기 위한 녹색당, 대중동원 등에 대한 전략이 책 어디에도 없다. 무엇보다 누가 생태적 전환을 이끌 것인지, 그리고 이러한 주체를 어떻게 형성할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희박하다. 최대의 조직적 사회운동세력인 노동운동의 생태적 전환을 언급하지만, 생태주의가 어떻게 조직 노동자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질문조차 던지지 않는다. 결국 원칙만 요란하고 정치는 없는 셈이다. 이러한 홍성태의 정치의 부재는 그의 개발주의 비판이 일면적이고 보다 근본적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책 이곳저곳에서 생태위기에 대한 개발국가의 책임을 요란하게 묻지만, 정작 누구나 인정하는 기업의 책임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일면성과 편향은 저자가 자본주의 비판을 피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무엇을 위한 개발인지를 생각해보면 개발국가란 자본의 논리에 포섭된 국가와 다름 아니다. 그리고 생산의 자본주의적 성격이 초래하는 대량소비, 환경비용 억압이 생태위기의 주요원인인 것이다. 이러한 생태위기의 사회적 원인에 대한 성찰없는 공업문명 비판은 현재의 삶에 대한 대책없는 포기를 종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책임한 비판에 누가 귀 기울이겠는가? 또한 생태주의가 단지 생태 패러다임의 내면화를 주장하는 계몽주의적 기획에 머문다면, 자본의 사회경제적 압력 앞에서 결코 그 자신을 온전히 실현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무능력은 반자본주의를 분명히 하면서, 유일하게 혁명적인 노동자계급 속으로 생태주의가 파고들 때만이 극복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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