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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정용준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평점 :

정용준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를 읽었다. 8월 초에 발표 되기로 예정 되어 있었던 이 작품은 출간이 연장되면서 8월 중순에야 발표 되었다. 예상보다 늦어졌지만 이전 소설들에 비해 훨씬 완성도 높은 작품들로 구성되었고, 서사의 흐름을 고려한 배치가 탁월한 점을 고려해 용서하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정용준 작가의 작품을 좋아한다. 이 사람이 작품 속에서 내는 목소리도 그렇지만 현실 이면에 있는 어둡고 끈적거리는 색채를 자유롭게 끌어내어 이야기하는 용기를 존경한다. 주변에서 쏟아내는 "그런 사람이었어?" 하는 오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텐데도 일일이 해명하는 대신 자신이 그려내고 싶은 모습을 그려내는 그의 실행력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그의 작품을 읽다보면 비릿한 냄새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겠다는 느낌을 받는다. 향수를 뿌려도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짙게 풍겨나오는 비린내 때문이다. 생선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농도와 향취를 가지고 있는 이 냄새는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몸의 냄새다. 작게 벌어진 상처에서 나오는 냄새가 아닌 표피 아래에 자리잡은 혈맥에서 뜨겁게 요동치는 살아 있는 피의 냄새인 것이다. 그는 정신이 아니라 몸으로 발화한다. 육체의 언어를 통해 독자에게 다가간다. 때문에 독자는 정용준의 소설을 읽는 내내 농도 짙은 피(血) 냄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허나 우리는 이 비린내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아름답게 치장된 거짓된 현실이 아닌 우리 주변에 산재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잊혀지고 무시당하는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게 될 것이다. 독자가 불편해하든 말든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게 정용준의 태도다. 독자가 불편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의 소설은 짙은 비린내를 풍기며 완성도 있게 다가온다.
모두가 이 냄새에 취하되 익숙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냄새를 맡고 배부르되 만족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도 쉽게 잊혀져버린 현실의 문제를,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목전에 목격한 이상 만족한 채 넘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용준은 이번 소설집에 깊은 사유가 필요한 작품들을 골라 담았다. (사실은 작가 본인이 아니라 편집자가 골라낸 작품들이지만) 확실히 이전 소설집보다 완성도가 높았는데 서사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몰입력도 높아 앉은 자리에서 책 한 권을 다 읽어버렸다.
책 출간과 함께 모든 이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수록작들의 제목이다. 편집자에 의해 수록작 대부분의 제목이 변경되었다. 편집 기간 내내 별다른 의욕이 생겨나지 않았던 작가가 편집권한을 편집자에게 일임하면서 일어난 일인데 출간 직전까지 정용준은 소설집의 표제와 표지, 작품 제목과 배치 등에 지적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편집자와 작가 사이에 형성된 친밀한 관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출간 당일까지 작가 본인에게 별다른 의욕이 생겨나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수록 된 8편의 작품 중 제목이 완전히 바뀐 작품은 6편이고, 부제목이 달린 작품은 1편, 제목이 바뀌지 않은 작품은 1편이다. 표제작인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는 『제4회 젊은작가상수상작품집』에 수록된 「당신의 피」와 동일한 작품이다. 정용준의 소설을 꼼꼼하게 찾아 읽은 독자라면 이번 소설집에 다소 불만을 품을 수 있을 것 같다. 제목이 전면적으로 수정된 사항에 의문을 품고, 보너스 트랙처럼 끼워진 미발표 소설이 없다는 점에 아쉬워 할 것도 같다. 그렇다고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이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사의 맛이 살아 있어 놀라울 정도다. (작가 본인은 싫어하지만) 책을 장식하고 있는 띠지의 말처럼 '서사의 선두에 정용준이 있다'고 말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는 혈육이라는 이유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혈육에게 유전적으로 계승되어 오는 폭력의 계보, 몸의 의지, 선대에서부터 꾸준히 대물림 된 부채감이 인물들의 어깨를 무겁게 짖누른다. 그들은 희망하지 않았던 해결 불가능 한 문제를 짊어진 채 살아간다. 작가는 다양한 단편을 통해 책임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책임져야 하는 것들에 대해, 그것들을 끌어안은 이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폭력과 증오, 목적지를 잃은 한으로 얼룩진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474번」
15명을 무참히 살해한 사형수와 교도관이 중심 인물로 등장하는 단편이다. 문예지에는 「유령」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살해와 사형제도에 대한 논란을 증식시킬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문제적이다. 작가는 사형수와 교도관의 대화를 중심으로 소설을 구성해 내고 있는데, 작품 내에서 죄수번호 474번을 부여 받은 사형수는 자신의 행위가 최초의 악(惡)에서 시작된 것이라 이야기 한다. 그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하거나 저질러 마땅한 일이라고 합리화 하지도 않는다. 그저 운명이자 숙명처럼 피하고자 했으나 피해지지 않은 것으로 치부한다.
어쩌면 일부 독자들은 작가가 살인자의 살해 욕구를 옹호하는 게 아닌가,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작가 역시 그런 오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자신이 의도했던 대로 사람들이 글을 읽어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작품을 살펴보면 작가는 474번을 통해 살해 본능─혹은 습관이라 말할 수 있는 성질─이 부모로부터 유전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다. 의도 없이 행해진 행위들이 사회적으로 형성된 선과 악의 기준에서 판단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 행위가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유전되어질 수 있음을 이야기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기에 '실존 하지만 형체를 확인할 수 없는 아버지의 존재'는 사형수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며 동시에 독자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474번은 자신을 통제하기 위해서 사형을 희망한다. 스스로 멈출 수 있다면 좋겠지만 자신을 통제할 수는 없으니 공권력의 힘을 빌려 통제하고자 한 것이다. 움직이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죽여야 했던 자신의 습성을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던 유년시절부터 그의 살해 행위는 일종의 습관처럼 고착되어 온다. 자신의 곁을 지켜 주었던 누나이면서 동시에 어머니인 여자에게 버림을 받은 이후에도 습관을 버리지 못해 반복적으로 행위한다.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될 수도 없는, 충동이나 욕구를 벗어난 그 행위는 474번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 된 것이다. 즉, 그에게 있어 살해 행위란 평범한 사람들이 밥을 먹고, 사랑을 나누고, 잠드는 것처럼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특별하지 않은 어떤 것'이라 할 수 있다.
외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춰가던 이 작품은 한 여자의 꾸준한 방문을 기점으로 인간적인 층위로 내려앉는다. 그는 자신을 사로잡았던 비릿한 게맛살의 맛에 대해서, 자신이 벗어나지 못한 비린 게 냄새에 대해 고백한다. 474번의 고백은 자신이 행한 행위가 나쁜 것인지 아닌지 판가름하지 못한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것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별난 취미를 고백했던 그 날 밤으로. 그는 자신의 별난 취미를 덤덤하게 고백한 뒤 누나에게 버림 받는다. 게맛살 대신 찐 게를 선물 받고서. 누나와 자신의 동거가 끝났음을 인지한 그 날부터 그는 단단한 사람이 되어갔다.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할 만큼 단단한 사람이.
누나가 아닌 아버지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을 끝내 묻지 못한 채, 듣고 싶었던 대답을 듣지 못한 채, '자신의 피와 심장에 무엇이 숨어있는지', '무엇을 물려 받은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교도관이 면회신청을 하는 여자에 대해 알려준 순간부터 474번은 조금씩 인간적인 층위로 가라앉는다. 모든 것에 무심한 태도를 취했던 그가 당황하고, 고민하고, 갈등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욕망한다. 누나 혹은 어머니인 그녀에게 선물 받았으나 먹지 않았던 불길한 비린 맛을 욕망한다.
작가는 희미하면서도 분명한 힘을 가진 인물을 전면에 내세워 목소리를 높인다. 동기 없는 행위가 어떻게 선과 악으로 받아들여지는지에 대해, 의도 없이 저질러진 행위가 어디에서 기인된 것인가에 대해 짐작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무거운 이야기에 유전적인 힘을,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지지 않는 어떤 책임성을 결부시킨다.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당신의 피」로 잘 알려진 작품이다. 작가가 간호조무사로 일하며 제세동기를 돌린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관자놀이에 칼을 꽂아 살해한 아버지가 눈앞에 나타나면서 평온하다고 믿었던 일상에 균열이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았다. 온 몸으로 거부하며 아버지의 존재를 신경쓰지 않겠다 이야기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신경쓰게 되는 '나'의 심리가 제법 치밀하게 그려진다. '나'는 자신의 몸 속에 흐르고 있을, 아버지에게서 물려 받은 피를 남김 없이 뽑아 투석기에 돌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드러낸다. 동시에 아버지의 존재를 거부하며, 자신이 그런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음을 부정하고자 한다.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살고자 버둥거리면 버둥거릴 수록, 그저 고독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인물이 다른 환자들과 간호사들 사이에서 밝게 빛나면 빛날 수록 '나'는 못마땅한 기분을 느낀다. 자신의 기분을 거스르지 말라고, 눈에 띄지 말라고 경고도 해보지만 쉽게 들어 먹히지도 않는다. '나'는 투석기와 아버지를 이어주는 얇은 튜브관을 자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그는 투석기에서 경보음이 울릴 때까지, 아버지의 관자놀이를 바라보며 묘한 흥분을 느낀다. 그러다 마주한 것은 아버지의 불안한 시선이다. 튜브를 쥔 손과 가위를 잡고 있는 손을 번갈아 바라보는 아버지의 불안한 눈빛. 그 두려운 눈빛을 마주한 '나'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고 싶다, 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은밀하고 어두운 충동은 투석기에서 울리는 경보음과 함께 현실 밖으로 내동댕이 쳐진다.
아버지를 마주한 이후 '나'는 다시금 악몽에 시달린다. 어머니를 잃은 직후에 꿨던 꿈 속의 남자는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어나 있다. 바다코끼리의 머리에 창을 꽂는 남자의 곁에 선 또 다른 남자. 얼굴 보기를 망설이게 되는 그 남자가 정말 '나'였는지는 모르겠다. 어머니가 죽어가는 모습을 '나'는 지켜보기만 했던가. '나' 역시 그 부분을 찜찜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해결되지 않는 의심을 남겨둔 채 감정을 갈무리한다.
'나'는 아버지의 관자놀이에서 힘차게 움직이는 혈관을 본 순간 아버지의 심리를 이해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일종의 연민이자 동정으로 표현된다. 아버지의 가방에 치즈 두 박스를 넣어주는 것으로, 환자들을 위해 준비했던 달걀을 반으로 갈라 자신의 입에 집어 넣는 것으로 조용한 유대감을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왜 바다코끼리였을까. 하고 많은 동물들 중에서 바다코끼리의 이미지를 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필요 이상의 이미지, 라고 평가하면서도 그 이미지가 '나'의 어머니를 형상화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필요 이상으로 이야기 하는 버릇은 정용준이 아직까지 버리지 못한 버릇 중 하나다. 굳이 한 마디를 덧붙여 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를 해버리는 것. 하지만 그런 어설픔이 있기에 그의 작품이 사랑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미드윈터─오늘 죽는 사람처럼」
문학과지성사와 아레나옴므의 프로젝트 소설집 『The Closet Nove/7인의 옷장』에 수록 된「미드윈터」와 동일작이다. 프로젝트 소설들 중에서 그나마 괜찮은 소설이었는데 그 작품을 여기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원제에 '─오늘 죽은 사람처럼'이라는 부제만 달린 것 뿐인데 느낌이 달라졌다. 스웨덴 시인과 한국인 인디영화제작자가 <겨울>을 주제로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한다는 설정이었는데 겨울이 아닌 여름에 작업을 해야 한다는 점이 억지스러우면서도 재미있게 다가왔다.
앞서 읽은 두 작품과 달리 「미드윈터」는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부분이 짙은 작품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사의 무게가 결코 가벼운 건 아니다. 누군가를 위해 애도를 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슬픔의 무게를 짊어진다. 닐슨이 짊어지고 있었던 무게를 작가가 함께 짊어지고, 그 무게를 '나'가 짊어짐으로써 슬픔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지고 말았다. 이 작품에는 털모자를 떠주겠다고 약속했던, 입을 열 때마다 죽겠다, 노래를 불렀던 써니를 향한 닐슨의 애도가 담겼다. 작품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번역원에서 주최한 프로젝트 작업의 어려움도 아니고, 닐슨과 '나'가 겪는 의견 충돌도 아니며, 겉치레만 화려한 프로젝트 행사에 대한 비꼼도 아니고, 프로젝트 소설을 프로젝트 소설로 응수한 작가의 재치도 아닌 순수한 애도의 과정이다.
이 말랑하지만 따스한 서사는 비린내 풍기는 음울한 앞의 서사에 지친 독자들을 위한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개들」
이번 소설집에서 유일하게 제목이 바뀌지 않은 작품이다. 가장 강렬한 인상을 안겨 준 작품이자 가장 잔인하고 폭력적인 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폭력을 이야기하고, 폭력을 행사하며, 폭력을 드러내는 작품은 그의 작품에서 이 작품이 거의 유일한 것 같다. 국가도 아니고 개인이 개인을 향해 행하는 폭력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사건의 구성이나 서사의 짜임새가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고 군살 없이 매끈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핏줄은 아니지만 핏줄처럼 관계 맺은 채 살아가는 곰과 '나', 겁 많은 핏줄로 연결 된 이씨와 병구는 약육강식으로 대변되는 세계를 단선적으로 보여준다. 곰과 이씨는 강자와 약자로 대비되어 그려지는데 힘의 우열이 분명한 두 부자의 모습을 통해 개 같은 인간, 개만도 못한 인간을 동시에 그리고 있다. 인간이 행하는 폭력 앞에 맨몸으로 노출 된 채 말 그대로 개죽음을 당하는 농장의 개들과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개처럼 살아가는 모란의 존재는 이 두 부자의 중심을 가로지르고 있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분명하면서도 명쾌한 이 세계에서 승기를 잡아 흔드는 인물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무통의 몸을 가진 '나'다.
모란을 사랑한 병구가 곰의 손에 무자비하게 죽임 당한 이유는 사랑을 지켜낼 수 있을 만큼 자신이 강인하지 않다는 사실을, 논리가 통하지 않는 폭력 앞에서는 그 무엇도 제 모습을 유지하지 못한 채 무력해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순진하다 못해 멍청하고, 그렇기에 무모할 수 있었던 병구가 곰의 폭력에 희생되자 '나'는 고아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친형제는 아니지만 친형제처럼 지내오며 서로를 돌봐 주었던 병구의 죽음이 '나'를 뒤흔든 것이다. 슬픔과 무기력 앞에서 자신을 지켜낼 수 없었던 병구를 잃은 '나'는 자신이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무감하게 병구를 떠나보낸다.
상실이 가져 온 공허와 쓸쓸함을 깊이 사유하지 못한 채 떠나보낸 '나'에게 모란은 "나를 죽여주세요. 부탁합니다." 라고 쓴 쪽지를 건낸다. 제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철장에 갇힌 개와 같은 처지에 놓인 자신의 목숨을 끊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건낸 쪽지다. 하지만 '나'는 모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 철장 안에서 불안하게 우짖는 개들의 울음소리를 닮은 긴박한 부탁을 뒤로한 채 '나'는 어둠으로 숨어든다. '나'는 자신이 곰과 함께 향유해 온 안정적인 폭력의 세계를 자신의 손으로 완성시킨다. 자신을 가르치며 자신의 위에 군림해 있던 곰을 제 손으로 죽임으로써 폭력의 근원에 한 걸음 내딛는다.
폭력의 주체였던 곰이 사라졌다고 해서 폭력의 세계가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의 인생은 작품 초반에 등장한 떠돌이 개와 별다를 바 없는 인생인 것이다. 자유롭게 떠돌며 살아갈 수 있으나 굶주리고 병든 채 폭력의 틀로 기어 들어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나중에는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으며 혼자만의 힘으로는 벗어나기 힘든 굴레에 갇히고 마는 안타까운 생 말이다. 이들이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폭력으로 맞서는 것이라는 점이 가장 안타까웠다. 곰이 사라졌으니 '나'는 곰의 자리에 서거나 곰보다 더 높은 자리에 서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갈 것이다. 지금껏 외면해 왔던 고통에 찬 개들의 목소리를 이제 와 들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곰이 차지했던 모란을 차지할 수도 있고, 갖다 버릴 수도 있지만 '나'가 어느 쪽을 택한들 그 세계에 큰 이변은 없으리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이국의 소년」 「위대한 용사에게」
유령화자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가독성도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점은 우리나라에서 쉬쉬하며 덮으려고 하는 과오의 역사를 과감하게 드러낸다는 점이었다. 베트남전쟁 참전용사의 아들이 군대에서 자살을 시도한 시점부터 이야기는 진행된다. 참전용사인 아버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언젠가 일어날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는 것에 있다. 남들은 보지 못하지만 자신은 볼 수 있는, 자신에게서 배출된 존재가 자신의 아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는 어렴풋하게 짐작한 것이다.
베트남 전쟁 이후 만날 일이 없어 보였던 아버지와 아들이 인간과 영혼의 구도로 시선을 맞추는 대목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안부」
원제는 「6년」이다. 우리 주변에서 너무도 빈번하게 발생되지만 빈번한 탓에 쉽게 잊혀지고 마는 이들의 이야기가 압축적으로 담겨 있는 소설이었다. 우리가 애써 외면해 왔던 남아있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슬픔에 대해,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바라보는 날 선 시선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군대 내 폭행 사고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감히 '이해한다'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밝혀내겠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사건이 발생 될 때마다 언론을 통해 발표되는 내용이지만 국민 중 누구도 그 발언을 진실하다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한 마디에 기대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도 우리는 안다. 알지만 쉽게 잊어버리고 마는, 내 일이 아니기에 "아직도 저 난리야?"라고 투덜거리게 되는 사람들의 무심함을 작가는 날카롭게 잡아낸다.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난할 의도도, 잊지 못한 채 울음을 삼키며 살아가는 이들을 위로할 의도도 묻어 나오지 않는 소설이지만 날 선 비판보다는 축축하고 무거운 슬픔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먼저 아픔을 경험 한 사람이 이제 막 아픔을 겪은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무엇일까. 힘내라는 말도, 많이 슬프냐는 말도 그저 말 뿐인 위로임을 알기에 그녀는 조용히 손길을 건낼 따름이다. 그저 끌어안아 함께 울며 등을 쓸어주는 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음을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지난 6년의 세월 동안 자신의 아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누가 아들을 죽게 만들었는지, 그 당시 군부대에서는 누구를 중심으로 폭력이 자행되고 있었는지 그녀는 알아내지 못했다.
같은 슬픔을 가진 이들이 모여 한 일은 마음 놓고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아들을 자랑하고, 서로의 아들을 칭찬하며 그들을 잊혀지지 않은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슬픔을 먼저 경험한 이는 슬픔을 경험하기 시작한 이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주지 않기 위해 말을 골라내는데 그 마음 씀씀이에 일종의 체념이 묻어 나와 지독한 슬픔이 느껴졌다.
앞으로 가장 힘든 게 뭘까요.
나는 말했다.
곧 사람들은 다 잊을 거예요. 그것에 대해 서운해하거나 화내면 힘들어져요.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아들을 믿으세요.(p.182)
「내려」
「이면의 독백」이라는 제목이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 중에서 두 번째로 희미한 느낌을 안겨주는 작품인데 가정 내 폭력이 사건의 시발점이 된다는 것 말고는 특별한 인상이 남지 않는 작품이었다.
「새들에게 물어보는 사람이 있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 중에서 유독 바뀐 제목보다 이전 제목이 더 좋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원제는 「재인」으로 죽은 누나가 남기고 간 어린아이 '재인'을 남동생인 '나'가 대신 양육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유방암 수술로 가슴이 한 쪽만 남은 엄마와 함께 살며 어린 재인을 양육해야 하는 '나'는 자신의 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부성애가 생기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부성애나 모성애 같은 것은 아이가 생겼다고 해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게 아닌지 잠시 고민한다. 재인은 사랑스러운 아이지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온전치 않은 엄마가 어린 재인을 키우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나'는 판단한다. 그렇다고 자신이 키우고 싶은 것은 아니여서 자꾸만 "애는 누가 키워?" 라고 묻는다.
누나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불러 온 반향이 생각보다 커서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휘청댄다. 평온하다고 믿고 싶었던 일상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며 아파트가 기울듯 '나'의 일상도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허나 이제 막 중심을 잃고 휘청거린다고 해서 자비가 주어지는 건 아닌 모양이다. '나'와 재인, 마디나와 두 아이가 육아라는 공통주제를 놓고 친밀함을 쌓아갈 때에도 먹구름은 꾸준하고 부지런하게 다가온다. '나'의 가족에게 주어진 잠깐의 평화는 화창한 태풍의 눈을 닮아 있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하나만 남은 가슴께를 눌러보며 눈썹을 찡그리던 엄마는 "가슴이 자꾸 아프네" 라고 말하며 힘없이 웃고, 천둥 소리에 놀란 재인은 자지러지게 울고, 마디나는 베란다에 서서 '나'를 향해 뭐라고 외치지만 '나'의 귀에는 재인의 울음소리와 빗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외벽에 크고 깊은 균열이 생긴 채 옆으로 기울기 시작한 아파트는 '나'의 가족이 처한 삶의 모습 같다. 자살을 했든 사고를 당했든 분명한 이유도, 아이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남기지 않은 채 죽어버린 누나의 빈자리가 이 가족의 일상에 거대한 균열로 자리한 것이다. '나'는 누나의 죽음에 의심을 품지만 그 의심을 풀만한 어떠한 단서도 나오지 않아 답답함을 느낀다. 해소되지 않은 답답함을 더욱 무겁게 만드는 것은 바로 재인의 존재다. 누나가 남기고 간, 남아 있는 사람이 오롯이 책임져야 하는 부채감 말이다. 원해서 떠맡게 된 것도 아니고, 직접적으로 부탁을 받은 것도 아닌데 희망하지 않았어도 주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책임져야 하는 존재를 '나'는 결국 체념하듯 받아들이고 만다.
따지고보면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에 담긴 소설 모두가 모종의 부채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운명과도 같은 책임감이 혈육으로 맺어진(혹은 혈육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관계가 형성된) 이들에게 전가되는 이야기 말이다. 인물들은 자신들에게 떠넘겨진 문제 앞에서 체념하거나 포기한다. 어쩔 수 없이 문제를 받아들이고 끌어안는데, 인물들이 취하는 체념의 태도는 정용준의 간결하면서도 단호한 문체와 맞물려 내제적인 불안과 증오, 혐오의 감정들과 함께 소극적으로 표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