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정용준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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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준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를 읽었다. 8월 초에 발표 되기로 예정 되어 있었던 이 작품은 출간이 연장되면서 8월 중순에야 발표 되었다. 예상보다 늦어졌지만 이전 소설들에 비해 훨씬 완성도 높은 작품들로 구성되었고, 서사의 흐름을 고려한 배치가 탁월한 점을 고려해 용서하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정용준 작가의 작품을 좋아한다. 이 사람이 작품 속에서 내는 목소리도 그렇지만 현실 이면에 있는 어둡고 끈적거리는 색채를 자유롭게 끌어내어 이야기하는 용기를 존경한다. 주변에서 쏟아내는 "그런 사람이었어?" 하는 오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텐데도 일일이 해명하는 대신 자신이 그려내고 싶은 모습을 그려내는 그의 실행력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그의 작품을 읽다보면 비릿한 냄새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겠다는 느낌을 받는다. 향수를 뿌려도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짙게 풍겨나오는 비린내 때문이다. 생선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농도와 향취를 가지고 있는 이 냄새는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몸의 냄새다. 작게 벌어진 상처에서 나오는 냄새가 아닌 표피 아래에 자리잡은 혈맥에서 뜨겁게 요동치는 살아 있는 피의 냄새인 것이다. 그는 정신이 아니라 몸으로 발화한다. 육체의 언어를 통해 독자에게 다가간다. 때문에 독자는 정용준의 소설을 읽는 내내 농도 짙은 피(血) 냄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허나 우리는 이 비린내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아름답게 치장된 거짓된 현실이 아닌 우리 주변에 산재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잊혀지고 무시당하는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게 될 것이다. 독자가 불편해하든 말든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게 정용준의 태도다. 독자가 불편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의 소설은 짙은 비린내를 풍기며 완성도 있게 다가온다.

모두가 이 냄새에 취하되 익숙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냄새를 맡고 배부르되 만족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도 쉽게 잊혀져버린 현실의 문제를,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목전에 목격한 이상 만족한 채 넘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용준은 이번 소설집에 깊은 사유가 필요한 작품들을 골라 담았다. (사실은 작가 본인이 아니라 편집자가 골라낸 작품들이지만) 확실히 이전 소설집보다 완성도가 높았는데 서사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몰입력도 높아 앉은 자리에서 책 한 권을 다 읽어버렸다.

책 출간과 함께 모든 이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수록작들의 제목이다. 편집자에 의해 수록작 대부분의 제목이 변경되었다. 편집 기간 내내 별다른 의욕이 생겨나지 않았던 작가가 편집권한을 편집자에게 일임하면서 일어난 일인데 출간 직전까지 정용준은 소설집의 표제와 표지, 작품 제목과 배치 등에 지적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편집자와 작가 사이에 형성된 친밀한 관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출간 당일까지 작가 본인에게 별다른 의욕이 생겨나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수록 된 8편의 작품 중 제목이 완전히 바뀐 작품은 6편이고, 부제목이 달린 작품은 1편, 제목이 바뀌지 않은 작품은 1편이다. 표제작인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는 『제4회 젊은작가상수상작품집』에 수록된 「당신의 피」와 동일한 작품이다. 정용준의 소설을 꼼꼼하게 찾아 읽은 독자라면 이번 소설집에 다소 불만을 품을 수 있을 것 같다. 제목이 전면적으로 수정된 사항에 의문을 품고, 보너스 트랙처럼 끼워진 미발표 소설이 없다는 점에 아쉬워 할 것도 같다. 그렇다고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이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사의 맛이 살아 있어 놀라울 정도다. (작가 본인은 싫어하지만) 책을 장식하고 있는 띠지의 말처럼 '서사의 선두에 정용준이 있다'고 말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는 혈육이라는 이유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혈육에게 유전적으로 계승되어 오는 폭력의 계보, 몸의 의지, 선대에서부터 꾸준히 대물림 된 부채감이 인물들의 어깨를 무겁게 짖누른다. 그들은 희망하지 않았던 해결 불가능 한 문제를 짊어진 채 살아간다. 작가는 다양한 단편을 통해 책임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책임져야 하는 것들에 대해, 그것들을 끌어안은 이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폭력과 증오, 목적지를 잃은 한으로 얼룩진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474번」
15명을 무참히 살해한 사형수와 교도관이 중심 인물로 등장하는 단편이다. 문예지에는 「유령」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살해와 사형제도에 대한 논란을 증식시킬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문제적이다. 작가는 사형수와 교도관의 대화를 중심으로 소설을 구성해 내고 있는데, 작품 내에서 죄수번호 474번을 부여 받은 사형수는 자신의 행위가 최초의 악(惡)에서 시작된 것이라 이야기 한다. 그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하거나 저질러 마땅한 일이라고 합리화 하지도 않는다. 그저 운명이자 숙명처럼 피하고자 했으나 피해지지 않은 것으로 치부한다.

어쩌면 일부 독자들은 작가가 살인자의 살해 욕구를 옹호하는 게 아닌가,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작가 역시 그런 오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자신이 의도했던 대로 사람들이 글을 읽어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작품을 살펴보면 작가는 474번을 통해 살해 본능─혹은 습관이라 말할 수 있는 성질─이 부모로부터 유전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다. 의도 없이 행해진 행위들이 사회적으로 형성된 선과 악의 기준에서 판단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 행위가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유전되어질 수 있음을 이야기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기에 '실존 하지만 형체를 확인할 수 없는 아버지의 존재'는 사형수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며 동시에 독자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474번은 자신을 통제하기 위해서 사형을 희망한다. 스스로 멈출 수 있다면 좋겠지만 자신을 통제할 수는 없으니 공권력의 힘을 빌려 통제하고자 한 것이다. 움직이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죽여야 했던 자신의 습성을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던 유년시절부터 그의 살해 행위는 일종의 습관처럼 고착되어 온다. 자신의 곁을 지켜 주었던 누나이면서 동시에 어머니인 여자에게 버림을 받은 이후에도 습관을 버리지 못해 반복적으로 행위한다.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될 수도 없는, 충동이나 욕구를 벗어난 그 행위는 474번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 된 것이다. 즉, 그에게 있어 살해 행위란 평범한 사람들이 밥을 먹고, 사랑을 나누고, 잠드는 것처럼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특별하지 않은 어떤 것'이라 할 수 있다.

외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춰가던 이 작품은 한 여자의 꾸준한 방문을 기점으로 인간적인 층위로 내려앉는다. 그는 자신을 사로잡았던 비릿한 게맛살의 맛에 대해서, 자신이 벗어나지 못한 비린 게 냄새에 대해 고백한다. 474번의 고백은 자신이 행한 행위가 나쁜 것인지 아닌지 판가름하지 못한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것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별난 취미를 고백했던 그 날 밤으로. 그는 자신의 별난 취미를 덤덤하게 고백한 뒤 누나에게 버림 받는다. 게맛살 대신 찐 게를 선물 받고서. 누나와 자신의 동거가 끝났음을 인지한 그 날부터 그는 단단한 사람이 되어갔다.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할 만큼 단단한 사람이.

누나가 아닌 아버지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을 끝내 묻지 못한 채, 듣고 싶었던 대답을 듣지 못한 채, '자신의 피와 심장에 무엇이 숨어있는지', '무엇을 물려 받은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교도관이 면회신청을 하는 여자에 대해 알려준 순간부터 474번은 조금씩 인간적인 층위로 가라앉는다. 모든 것에 무심한 태도를 취했던 그가 당황하고, 고민하고, 갈등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욕망한다. 누나 혹은 어머니인 그녀에게 선물 받았으나 먹지 않았던 불길한 비린 맛을 욕망한다.

작가는 희미하면서도 분명한 힘을 가진 인물을 전면에 내세워 목소리를 높인다. 동기 없는 행위가 어떻게 선과 악으로 받아들여지는지에 대해, 의도 없이 저질러진 행위가 어디에서 기인된 것인가에 대해 짐작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무거운 이야기에 유전적인 힘을,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지지 않는 어떤 책임성을 결부시킨다.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당신의 피」로 잘 알려진 작품이다. 작가가 간호조무사로 일하며 제세동기를 돌린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관자놀이에 칼을 꽂아 살해한 아버지가 눈앞에 나타나면서 평온하다고 믿었던 일상에 균열이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았다. 온 몸으로 거부하며 아버지의 존재를 신경쓰지 않겠다 이야기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신경쓰게 되는 '나'의 심리가 제법 치밀하게 그려진다. '나'는 자신의 몸 속에 흐르고 있을, 아버지에게서 물려 받은 피를 남김 없이 뽑아 투석기에 돌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드러낸다. 동시에 아버지의 존재를 거부하며, 자신이 그런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음을 부정하고자 한다.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살고자 버둥거리면 버둥거릴 수록, 그저 고독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인물이 다른 환자들과 간호사들 사이에서 밝게 빛나면 빛날 수록 '나'는 못마땅한 기분을 느낀다. 자신의 기분을 거스르지 말라고, 눈에 띄지 말라고 경고도 해보지만 쉽게 들어 먹히지도 않는다. '나'는 투석기와 아버지를 이어주는 얇은 튜브관을 자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그는 투석기에서 경보음이 울릴 때까지, 아버지의 관자놀이를 바라보며 묘한 흥분을 느낀다. 그러다 마주한 것은 아버지의 불안한 시선이다. 튜브를 쥔 손과 가위를 잡고 있는 손을 번갈아 바라보는 아버지의 불안한 눈빛. 그 두려운 눈빛을 마주한 '나'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고 싶다, 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은밀하고 어두운 충동은 투석기에서 울리는 경보음과 함께 현실 밖으로 내동댕이 쳐진다.

아버지를 마주한 이후 '나'는 다시금 악몽에 시달린다. 어머니를 잃은 직후에 꿨던 꿈 속의 남자는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어나 있다. 바다코끼리의 머리에 창을 꽂는 남자의 곁에 선 또 다른 남자. 얼굴 보기를 망설이게 되는 그 남자가 정말 '나'였는지는 모르겠다. 어머니가 죽어가는 모습을 '나'는 지켜보기만 했던가. '나' 역시 그 부분을 찜찜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해결되지 않는 의심을 남겨둔 채 감정을 갈무리한다.

'나'는 아버지의 관자놀이에서 힘차게 움직이는 혈관을 본 순간 아버지의 심리를 이해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일종의 연민이자 동정으로 표현된다. 아버지의 가방에 치즈 두 박스를 넣어주는 것으로, 환자들을 위해 준비했던 달걀을 반으로 갈라 자신의 입에 집어 넣는 것으로 조용한 유대감을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왜 바다코끼리였을까. 하고 많은 동물들 중에서 바다코끼리의 이미지를 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필요 이상의 이미지, 라고 평가하면서도 그 이미지가 '나'의 어머니를 형상화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필요 이상으로 이야기 하는 버릇은 정용준이 아직까지 버리지 못한 버릇 중 하나다. 굳이 한 마디를 덧붙여 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를 해버리는 것. 하지만 그런 어설픔이 있기에 그의 작품이 사랑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미드윈터─오늘 죽는 사람처럼」
문학과지성사와 아레나옴므의 프로젝트 소설집 『The Closet Nove/7인의 옷장』에 수록 된「미드윈터」와 동일작이다. 프로젝트 소설들 중에서 그나마 괜찮은 소설이었는데 그 작품을 여기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원제에 '─오늘 죽은 사람처럼'이라는 부제만 달린 것 뿐인데 느낌이 달라졌다. 스웨덴 시인과 한국인 인디영화제작자가 <겨울>을 주제로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한다는 설정이었는데 겨울이 아닌 여름에 작업을 해야 한다는 점이 억지스러우면서도 재미있게 다가왔다.

앞서 읽은 두 작품과 달리 「미드윈터」는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부분이 짙은 작품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사의 무게가 결코 가벼운 건 아니다. 누군가를 위해 애도를 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슬픔의 무게를 짊어진다. 닐슨이 짊어지고 있었던 무게를 작가가 함께 짊어지고, 그 무게를 '나'가 짊어짐으로써 슬픔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지고 말았다. 이 작품에는 털모자를 떠주겠다고 약속했던, 입을 열 때마다 죽겠다, 노래를 불렀던 써니를 향한 닐슨의 애도가 담겼다. 작품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번역원에서 주최한 프로젝트 작업의 어려움도 아니고, 닐슨과 '나'가 겪는 의견 충돌도 아니며, 겉치레만 화려한 프로젝트 행사에 대한 비꼼도 아니고, 프로젝트 소설을 프로젝트 소설로 응수한 작가의 재치도 아닌 순수한 애도의 과정이다.

이 말랑하지만 따스한 서사는 비린내 풍기는 음울한 앞의 서사에 지친 독자들을 위한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개들」
이번 소설집에서 유일하게 제목이 바뀌지 않은 작품이다. 가장 강렬한 인상을 안겨 준 작품이자 가장 잔인하고 폭력적인 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폭력을 이야기하고, 폭력을 행사하며, 폭력을 드러내는 작품은 그의 작품에서 이 작품이 거의 유일한 것 같다. 국가도 아니고 개인이 개인을 향해 행하는 폭력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사건의 구성이나 서사의 짜임새가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고 군살 없이 매끈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핏줄은 아니지만 핏줄처럼 관계 맺은 채 살아가는 곰과 '나', 겁 많은 핏줄로 연결 된 이씨와 병구는 약육강식으로 대변되는 세계를 단선적으로 보여준다. 곰과 이씨는 강자와 약자로 대비되어 그려지는데 힘의 우열이 분명한 두 부자의 모습을 통해 개 같은 인간, 개만도 못한 인간을 동시에 그리고 있다. 인간이 행하는 폭력 앞에 맨몸으로 노출 된 채 말 그대로 개죽음을 당하는 농장의 개들과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개처럼 살아가는 모란의 존재는 이 두 부자의 중심을 가로지르고 있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분명하면서도 명쾌한 이 세계에서 승기를 잡아 흔드는 인물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무통의 몸을 가진 '나'다.

모란을 사랑한 병구가 곰의 손에 무자비하게 죽임 당한 이유는 사랑을 지켜낼 수 있을 만큼 자신이 강인하지 않다는 사실을, 논리가 통하지 않는 폭력 앞에서는 그 무엇도 제 모습을 유지하지 못한 채 무력해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순진하다 못해 멍청하고, 그렇기에 무모할 수 있었던 병구가 곰의 폭력에 희생되자 '나'는 고아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친형제는 아니지만 친형제처럼 지내오며 서로를 돌봐 주었던 병구의 죽음이 '나'를 뒤흔든 것이다. 슬픔과 무기력 앞에서 자신을 지켜낼 수 없었던 병구를 잃은 '나'는 자신이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무감하게 병구를 떠나보낸다.

상실이 가져 온 공허와 쓸쓸함을 깊이 사유하지 못한 채 떠나보낸 '나'에게 모란은 "나를 죽여주세요. 부탁합니다." 라고 쓴 쪽지를 건낸다. 제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철장에 갇힌 개와 같은 처지에 놓인 자신의 목숨을 끊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건낸 쪽지다. 하지만 '나'는 모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 철장 안에서 불안하게 우짖는 개들의 울음소리를 닮은 긴박한 부탁을 뒤로한 채 '나'는 어둠으로 숨어든다. '나'는 자신이 곰과 함께 향유해 온 안정적인 폭력의 세계를 자신의 손으로 완성시킨다. 자신을 가르치며 자신의 위에 군림해 있던 곰을 제 손으로 죽임으로써 폭력의 근원에 한 걸음 내딛는다.

폭력의 주체였던 곰이 사라졌다고 해서 폭력의 세계가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의 인생은 작품 초반에 등장한 떠돌이 개와 별다를 바 없는 인생인 것이다. 자유롭게 떠돌며 살아갈 수 있으나 굶주리고 병든 채 폭력의 틀로 기어 들어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나중에는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으며 혼자만의 힘으로는 벗어나기 힘든 굴레에 갇히고 마는 안타까운 생 말이다. 이들이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폭력으로 맞서는 것이라는 점이 가장 안타까웠다. 곰이 사라졌으니 '나'는 곰의 자리에 서거나 곰보다 더 높은 자리에 서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갈 것이다. 지금껏 외면해 왔던 고통에 찬 개들의 목소리를 이제 와 들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곰이 차지했던 모란을 차지할 수도 있고, 갖다 버릴 수도 있지만 '나'가 어느 쪽을 택한들 그 세계에 큰 이변은 없으리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이국의 소년」 「위대한 용사에게」
유령화자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가독성도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점은 우리나라에서 쉬쉬하며 덮으려고 하는 과오의 역사를 과감하게 드러낸다는 점이었다. 베트남전쟁 참전용사의 아들이 군대에서 자살을 시도한 시점부터 이야기는 진행된다. 참전용사인 아버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언젠가 일어날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는 것에 있다. 남들은 보지 못하지만 자신은 볼 수 있는, 자신에게서 배출된 존재가 자신의 아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는 어렴풋하게 짐작한 것이다.

베트남 전쟁 이후 만날 일이 없어 보였던 아버지와 아들이 인간과 영혼의 구도로 시선을 맞추는 대목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안부」
원제는 「6년」이다. 우리 주변에서 너무도 빈번하게 발생되지만 빈번한 탓에 쉽게 잊혀지고 마는 이들의 이야기가 압축적으로 담겨 있는 소설이었다. 우리가 애써 외면해 왔던 남아있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슬픔에 대해,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바라보는 날 선 시선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군대 내 폭행 사고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감히 '이해한다'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밝혀내겠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사건이 발생 될 때마다 언론을 통해 발표되는 내용이지만 국민 중 누구도 그 발언을 진실하다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한 마디에 기대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도 우리는 안다. 알지만 쉽게 잊어버리고 마는, 내 일이 아니기에 "아직도 저 난리야?"라고 투덜거리게 되는 사람들의 무심함을 작가는 날카롭게 잡아낸다.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난할 의도도, 잊지 못한 채 울음을 삼키며 살아가는 이들을 위로할 의도도 묻어 나오지 않는 소설이지만 날 선 비판보다는 축축하고 무거운 슬픔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먼저 아픔을 경험 한 사람이 이제 막 아픔을 겪은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무엇일까. 힘내라는 말도, 많이 슬프냐는 말도 그저 말 뿐인 위로임을 알기에 그녀는 조용히 손길을 건낼 따름이다. 그저 끌어안아 함께 울며 등을 쓸어주는 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음을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지난 6년의 세월 동안 자신의 아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누가 아들을 죽게 만들었는지, 그 당시 군부대에서는 누구를 중심으로 폭력이 자행되고 있었는지 그녀는 알아내지 못했다.

같은 슬픔을 가진 이들이 모여 한 일은 마음 놓고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아들을 자랑하고, 서로의 아들을 칭찬하며 그들을 잊혀지지 않은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슬픔을 먼저 경험한 이는 슬픔을 경험하기 시작한 이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주지 않기 위해 말을 골라내는데 그 마음 씀씀이에 일종의 체념이 묻어 나와 지독한 슬픔이 느껴졌다.

앞으로 가장 힘든 게 뭘까요.
나는 말했다.
곧 사람들은 다 잊을 거예요. 그것에 대해 서운해하거나 화내면 힘들어져요.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아들을 믿으세요.(p.182)


「내려」
「이면의 독백」이라는 제목이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 중에서 두 번째로 희미한 느낌을 안겨주는 작품인데 가정 내 폭력이 사건의 시발점이 된다는 것 말고는 특별한 인상이 남지 않는 작품이었다.


「새들에게 물어보는 사람이 있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 중에서 유독 바뀐 제목보다 이전 제목이 더 좋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원제는 「재인」으로 죽은 누나가 남기고 간 어린아이 '재인'을 남동생인 '나'가 대신 양육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유방암 수술로 가슴이 한 쪽만 남은 엄마와 함께 살며 어린 재인을 양육해야 하는 '나'는 자신의 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부성애가 생기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부성애나 모성애 같은 것은 아이가 생겼다고 해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게 아닌지 잠시 고민한다. 재인은 사랑스러운 아이지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온전치 않은 엄마가 어린 재인을 키우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나'는 판단한다. 그렇다고 자신이 키우고 싶은 것은 아니여서 자꾸만 "애는 누가 키워?" 라고 묻는다.

누나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불러 온 반향이 생각보다 커서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휘청댄다. 평온하다고 믿고 싶었던 일상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며 아파트가 기울듯 '나'의 일상도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허나 이제 막 중심을 잃고 휘청거린다고 해서 자비가 주어지는 건 아닌 모양이다. '나'와 재인, 마디나와 두 아이가 육아라는 공통주제를 놓고 친밀함을 쌓아갈 때에도 먹구름은 꾸준하고 부지런하게 다가온다. '나'의 가족에게 주어진 잠깐의 평화는 화창한 태풍의 눈을 닮아 있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하나만 남은 가슴께를 눌러보며 눈썹을 찡그리던 엄마는 "가슴이 자꾸 아프네" 라고 말하며 힘없이 웃고, 천둥 소리에 놀란 재인은 자지러지게 울고, 마디나는 베란다에 서서 '나'를 향해 뭐라고 외치지만 '나'의 귀에는 재인의 울음소리와 빗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외벽에 크고 깊은 균열이 생긴 채 옆으로 기울기 시작한 아파트는 '나'의 가족이 처한 삶의 모습 같다. 자살을 했든 사고를 당했든 분명한 이유도, 아이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남기지 않은 채 죽어버린 누나의 빈자리가 이 가족의 일상에 거대한 균열로 자리한 것이다. '나'는 누나의 죽음에 의심을 품지만 그 의심을 풀만한 어떠한 단서도 나오지 않아 답답함을 느낀다. 해소되지 않은 답답함을 더욱 무겁게 만드는 것은 바로 재인의 존재다. 누나가 남기고 간, 남아 있는 사람이 오롯이 책임져야 하는 부채감 말이다. 원해서 떠맡게 된 것도 아니고, 직접적으로 부탁을 받은 것도 아닌데 희망하지 않았어도 주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책임져야 하는 존재를 '나'는 결국 체념하듯 받아들이고 만다.

따지고보면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에 담긴 소설 모두가 모종의 부채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운명과도 같은 책임감이 혈육으로 맺어진(혹은 혈육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관계가 형성된) 이들에게 전가되는 이야기 말이다. 인물들은 자신들에게 떠넘겨진 문제 앞에서 체념하거나 포기한다. 어쩔 수 없이 문제를 받아들이고 끌어안는데, 인물들이 취하는 체념의 태도는 정용준의 간결하면서도 단호한 문체와 맞물려 내제적인 불안과 증오, 혐오의 감정들과 함께 소극적으로 표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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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함께 공유해 읽어도 좋을만큼 깊은 사고를 유도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누구에게 읽혀도 단순한 사고에서 그칠 수밖에 없는 아쉬운 작품도 있다. 최근 한국 문단을 향해 있는 날 선 비판 중 하나는 '문학에 서사가 부족하다'는 것인데 한국 소설뿐 아니라 한국 아동문학에도 두루 해당된다는 점에서 서사 부족 문제의 심각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서사(Narrative)란 하나의 사건이나 일련의 사건들을 표현해 낸 것으로 단일한 에피소드 형식을 취하는 이야기(Story)와는 다른 구조를 갖는다. 이야기와 이야기가 긴밀하게 연결되고 하나의 인과관계를 형성해 구조적으로 결합할 때 나름대로의 굴곡을 가진 서사구조가 탄생된다. 다시말해 공통된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하나 둘씩 모여든 에피소드의 이유 있는 나열이 서사 구조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사의 부족, 서사의 부재는 어떻게 발생한 것일까. 이는 문제의식을 다루는 작가의 태도에 있다. 작가 자신이 중요하다 여기는 문제의식을 한 가운데에 놓고 그와 관련된 다양한 에피소드를 곁가지를 치며 펼쳐 나가는 식의 글쓰기 태도가 서사 부족 문제를 야기한 것이다. 에피소드를 나열한다고 서사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공통된 문제를 떠안은 에피소드들이 그럴듯한 이유를 공유하며 긴밀하게 연결되었을 때, 그 중 하나의 문제라도 생략되거나 다른 것으로 변경되면 인과가 성립되지 않는 유기적인 관계가 되었을 때 에피소드들의 묶음은 서사구조 중 한 단계를 획득한다. 에피소드들의 유기적 묶음이 서사의 구조를 이루고, 다양한 서사의 단위가 하나의 흐름을 형성할 때 독자는 단일해 보이는 서사적 흐름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가지를 치며 뻗어 나가는 단일한 에피소드들을 하나로 엮어내지 못하는 미완의 글쓰기는 독자로 하여금 '불완전하다', '서사가 없다', '서사가 부족하다'는 불평을 쏟아내게 만든다.

실감하지 못해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던 이 문제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 것은 이나영 작가의 『시간 가게』를 만난 이후다. 하루를 24시간으로 쪼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거래할 수 있는 가게를 들이밀었던 작가는 눈에 보이는 뻔한 에피소드를 단순하게 나열하며 이야기를 진행해 나간다. 시간을 살 수 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에피소드들의 집합은 작가가 나름대로 제시한 문제의식과 제대로 결부되지 못한 채 각자의 가지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가지는 뻔함과 단순함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이해 가능의 범주 안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독자로 하여금 친근감을 느끼게 하고, 다양하게 응용하고자 하는 상상적 욕구를 자극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를 더하거나 빼도 이상하지 않은 에피소드의 집합에 있다. 문학이 유기체적인 상태를 획득하지 못했다는 것, 단일한 서사의 흐름이 포착되지 않는다는 것이 『시간 가게』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 할 수 있겠다.






시간을 거래할 수 있다는 것


작가는 시간을 살 수 있는 상점을 에피소드의 중앙에 배치함으로써 인물을 둘러싼 다양한 문제적 상황에 해답을 제시한다. 일종의 판타지 소재를 끌어와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를 환상적인 힘에 의존해 해결해 보자, 는 태도인데 충분히 재치 있게 해결해 낼 수 있는 문제를 피상적이고 표면적으로 접근해 해결했다는 점은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눈에 띄었던 점은 10분을 사기 위해 거리낌 없이 온전한 행복이 느껴지는 기억을 팔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내 몸이 기억하는 행복, 머리로 느껴지는 행복이 아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행복을 팔아야만 10분의 시간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고작 10분을 사기 위해 행복한 기억을 파는 게 합당한 거래인지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시간을 파는 상점』에서는 시간이 부족해 남의 손을 빌려 문제를 해결하길 원하는 이들에게 금전적 대가를 받고 의뢰 받은 일을 대신한다. 구체적인 금액은 제시되지 않았지만 위험부담이 큰 일인 경우 받아야 하는 대가도 비례한다. 하지만 『시간 가게』에서는 거래 가능한 시간은 하루 한 번, 10분에 고정되어 있을 뿐이며 거래 가능한 대가 역시 행복한 기억에 고정되어 있다.

윤아는 온전하지 않은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고 10분을 사려다 실패한다. 재방문한 시간 가게에서 "앞으로 시간을 사려면 행복한 기억을 2개 떠올려야 한다."는 말을 듣고 거래에 응한다. 부당한 거래다. 기억 1개에 10분을 취하는 것이 합당한 거래라 이야기 할 수 있다면 기억 2개에 10분은 균형이 맞지 않는다. 하루 한 번, 이라는 제한적 거래가 하루 두 번으로 풀리는 것도 아니며 10분의 시간이 15분이나 20분으로 늘어난 것도 아니지 않나. 부당한 거래에 응하면서도 우리의 주인공은 한 번도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주인공의 입을 빌어 작가가 말한 것처럼 '다시 시간을 거래할 수만 있다면 행복한 기억 두 개를 파는 것 쯤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식의 합리화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도 아닌데 작가는 꽤 여러 번에 걸쳐 비슷한 방식으로 합리화를 주장한다. 윤아가 공부를 싫어하면서도 강박적으로 좋은 성적을 받으려 노력하는 것은 '좋은 성적을 받아오면 엄마가 행복해하기 때문'이라고 합리화 하고, 엄친아 영훈을 싫어하는 것은 '이유 없이 너스레를 떨기 때문'이라고 합리화 하며, 윤아가 수영이네 패거리와 가까워 질 수 없는 것은 '공부만 잘하지 아무 매력도 없는 아이인 윤아를 싫어하는 미영 때문'이라고 합리화 한다. 허나 이런 것들은 참 된 이유가 되지 못한다. 현실 세계에서는 "그냥"이라는 범주에 숨어 어물쩍 넘어갈 수 있을지라도 문학에서는 표면적이고 피상적인 합리화가 대답이 되서는 안 된다. 구체적이고 설득 가능한 대답이 아니면 개연성이 충분한 사건이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왜Why?


결국 중요한 문제는 "왜 그래야만 했느냐?"하는 질문 뒤에 이어지는 답이 설득력을 갖추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문학은 "왜?"라는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창작자의 입장에서 풀리지 않은 질문을 그냥 넘어가는 것은 작품의 단점을 남겨 놓는 일과 마찬가지이며, 독자의 입장에서 풀리지 않는 질문을 그냥 넘기는 것은 해결 불가능하거나 이해 불가능한 문제를 무시한 채 다음 질문을 받아 들이는 것과 같다. 질문의 제시와 합당한 답변의 등장은 필연적이되 설득 가능한 것이어야 하며 동시에 이해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시간 가게』는 다양한 질문이 제시될 여지가 충분한 작품이지만 동시에 합당한 답변이 나오지 않는 작품이기도 하다.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할 수는 있지만 그 답변 모두가 설득 가능한 것인가? 하는 질문에는 그렇다, 고 대답하기 어렵다.

1.윤아 엄마는 왜 윤아에게 1등만을 요구하는가?
2.윤아는 왜 엄마의 '행복'에만 집중하는가?
3.윤아는 왜 영훈을 껄끄러운 존재로 받아 들이는가?
4.윤아는 왜 돈의 가치를 기억의 가치보다 우위에 두는가?
5.윤아는 왜 엄마의 요구에 한 번도 반항하지 못하는가?
6.왜 하필 시간을 사야만 했는가?
7.왜 시간 가게 할아버지는 시간 거래에 필요한 거래물로 행복한 기억을 요구했는가?
8.거래 가능한 기억 중 온전한 행복을 담은 기억을 요구한 이유는 무엇일까?
9.시간 가게 할아버지의 눈이 초승달 모양에서 보름달 보양으로 변한 이유는 무엇인가?
10.윤아가 시간 가게를 방문하며 본질적으로 획득하고자 했던 가치는 무엇이엇을까?

등등 『시간 가게』를 읽고 던질 수 있는 질문은 다양하다. 하지만 이 질문에 답변 가능한 상황이나 에피소드들이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부재해 있는 상황에서 윤아 엄마가 느낀 경제적인 어려움과 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결심한 직업적 선택, 직업적 특성이 자녀의 육아에 반영됨으로써 빚어지는 상황의 아이러니함과 자녀가 느낄 수 있는 소외감과 외로움의 상관관계 등은 제법 설득 가능해 보이면서도 허술한 면을 드러낸다. 작가는 보편적인 사회문제를 끌어와 문제 상황을 제시하고 있지만 윤아네와 비슷한 꼴을 갖추는 가족집단이 모두 같은 문제를 겪고 있지 않다는 점이나, 모든 아이들이 부모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듯하다. 윤아는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 "행복하지."라고 답하는 엄마의 대답에 의존해 '엄마가 바라는 삶'을 살아가는데 그런 삶을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와 동기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시간 가게』의 커다란 맹점이다.


헬리콥터맘들을 향한 화살


아동문학이 가장 빛을 발하는 순간은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이 함께 읽어도 부족함이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이다. 대부분의 아동문학 이론들이 아동문학을 "아동이나 동심을 가진 아동다운 성인에게 읽히기 위해 쓴 모든 저작"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문학적 대상이 되는 어린이를 현실의 어린이로만 국한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동심을 다만 어린이의 마음으로만 보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결국 동심이란 현실의 어린이를 포함한 인간의 본성에 관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1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나영의 『시간 가게』는 어른들을 향한 화살은 될 수 있어도 아이들을 향한 화살은 될 수 없을 것 같다. 좋은 학교를 졸업한 이력이나 성적이 세상을 사는 가장 가치 있는 방법을 제시해주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아이들을 과도하게 커버하는 헬리콥터맘들에게 『시간 가게』는 제법 날카로운 촉을 지닌 화살이 될 수는 있겠다. 에피소드 별로 녹아 있는 '추억을 많이 만들어 주세요.', '초인종을 쓸모 없는 물건으로 만들지 말아주세요.', '아이들에게 공부가 제일이라고 주장하지 마세요', '밥이라도 한 끼 함께 먹어주세요.' 등등의 메시지들은 엄마들에게 비수처럼 날아가 꽂힐 것이다. 허나 입시 경쟁에 내몰려 독립된 자기 결정권이나 자기 시간을 향유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윤아의 이야기가 큰 공감을 불러 일으키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윤아보다 더 한 생활을 지속해 나가는 아이들도 있을 거고, 윤아와 같은 생활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며, 윤아와 같은 생활이 왜 이루어져야 하는지 이해가 불가능한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보편적으로 수용 불가능한 윤아의 에피소드들은 아이들의 마음 속에서 충돌하다 그대로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그저 소비되는 것이다.



되묻고 싶은 것


이나영 작가가 독자들을 향해 질문하고자 했던 것은 단 한 가지다. "너희들은 행복하니?" 이 한 마디의 질문을 위해 소비된 에피소드가 너무 많아서 아쉽다. 에피소드들마다 인물의 입을 빌어 직접적으로 발화된 행복의 의미나 행복 유무에 대한 질문이 작품 전체에 반복되고 있는 점도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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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9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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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하게 써내려간 것 같지만 그 안에서 절박한 고민을 껴안고 있었을 작가의 모습을 쉽게 지울 수 없다. 도쿄 변두리에서 20세기 초를 살아가는 노나카 부부의 일상을 그린 『문』은 나쓰메 소세키 <전기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자 <후기 3부작>을 이어주는 매개체 같은 작품이다. 『산시로』에서 『그 후』를 거쳐 『문』으로 마무리되는 <전기 3부작>은 각기 다른 인물들을 내세우고 있지만 인물들이 경험하는 삶의 형태가 작가 본인이 경험한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산시로, 다이스케, 소스케는 나쓰메 소세키와 동일선상에 놓인다. 20대 청춘의 방황(『산시로』) 이후에 성숙해진 인물(『그 후』)의 뒷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문』은 주어진 현실에 어떻게든 만족하고 마는 소시민 노나카 소스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시정 셀러리맨으로 일하고 있지만 그는 유복한 생활을 하고 있진 않다. 일자리도 결국 친구의 알선으로 얻어낸 것에 불과하며 자신이 직접 해낸 일이라고는 게다를 신고 휘청거리며 산책을 하거나, 전철을 타고 종점으로 갔다가 다시 집으로 되돌아오는 정도에 그친다. 해가 바뀌면 봉급의 25퍼센트를 올려 준다던 회사에서 고작 5엔을 올려도 소스케는 만족한다. 5엔이나 올랐다고 기뻐하지도 않고 5엔밖에 올려주지 않았다고 분개하지도 않는다. 그저 5엔이 올랐네, 하고 마는 것인데 이런 식의 반응과 태도는 『문』의 책장을 덮을 때까지 유지된다.

소스케는 그런 사람이다. 전면에 나서려고도 하지 않고 뒤로 내빼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 겉으로는 태연자약해보이는 이런 태도는 소설의 첫 장부터 예견되어 있었던 것이기에 노나카 부부의 태도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변화하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태평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태평한 것이나, 외면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외면하는 태도 같은 것들이 소시민적인 소스케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 '소스케답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사실 소스케는 소설의 첫 장에서부터 희미한 존재처럼 그려진다. 그가 마루에 누워 오요네에게 근래(近來)의 근()자를 어떻게 쓰는지 물어보는 장면에 이어, 금일(今日)을 종이에 제대로 써넣고 금 자가 제대로 쓴 게 맞는지 알 수 없어져 헤맸다는 이야기를 털어 놓는 장면은 이들이 가까운 시대, '지금'이라 말할 수 있는 현재의 시간에서 조금 벗어나 있음을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들은 다른이들과 함께 20세기 초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지만 동시에 그 시대와는 전혀 무관한 곳에서 자신들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기도 하다. 현재를 살고 있음에도 현재를 바라보지 않는, 그렇다고 과거를 돌아보는 것도 아니며 미래를 내다보는 것도 아닌 붕 떠있는 상태로 그려지는 노나카 부부의 일상은 『문』의 분위기를 지배한다.

 









 

열리지 않는 문

소스케는 문과 문 사이에 갇혀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인간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풀어보려 했지만 풀어볼 힘도, 의지도 쉽게 생겨나지 않았던 고로쿠의 학비 문제는 불현듯 소스케의 등 뒤에 떨어진다. 걸쇠가 단단히 걸려서 문의 안쪽에서는 바깥쪽에 걸린 걸쇠를 풀어낼 수 없는 것이다. 작은집을 찾아가 자초지정을 설명해 그간 받지 못했던 제 몫의 재산을 받아 올까도 생각해봤지만 숙부의 연이은 사업으로 소스케는 마땅히 받아가도 좋았을 제 몫의 돈마저 잃어버렸다. 해결 될 여지가 충분했으나 스스로 움직이려 하지 않아 그 기회를 놓쳐버린 인간은 소스케와 같은 모습을 하고 살아가고 있을 것 같다. 주어진 기회에 충분히 응답하지 못하는 것. 기회를 붙잡지 않은 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탓하는 것. 그런 우매하고 안타까운 인간의 모습이 소스케를 통해 그려지고 있다.

소스케의 앞을 가로막은 문도 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괴롭혀 왔던 어둠의 부채감으로 나서서 해결할 이유는 없지만, 해결되지 않는 이상 노나카 부부 사이에 아이를 갖는 일도, 보란 듯이 자신들에게 투자를 아끼지 않으며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것도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소스케를 찾아온다. 우연이라면 우연이고, 필연이라면 필연이라 말할 수 있는 이 인연은 사카이의 집을 매개로 하여 서서히 소스케의 숨통을 조여온다. 만날 것이냐, 피할 것이냐. 그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는 자신과 같은 어둠을 가진 오요네에게 문제상황을 고백할 수도 없는 처지에 놓인다. 어떻게든 고민을 털어놓아 마음의 짐을 덜고 싶은 마음은 불쑥불쑥 드는데 마음 편하자고 오요네에게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하는 건 옳지 않다는 생각에 그는 스스로 고민 속에 갇힌다.

문을 열기 위해 열쇠가 필요하듯 소스케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답을 찾기 시작한다. 자기 자신 안에서 해답을 찾고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제 안에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의지할 수 있는 거대한 존재를 찾아 길을 떠난다.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한 겨울, 차가운 겨울 바람 만큼이나 매서운 문제를 끌어안고 찾아간 절에서 소스케는 깨달음을 통해 해답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소스케는 이렇다 할 해답을 구하지 못한다. 구하려 했다기 보다는 알아서 구해지기를 기다리는 쪽에 가까웠다. 누군가를 통해 구해지거나, 우연히 구해진 답이 자신 앞에 주어지기를 소스케는 바랐다. 하지만 이런 식의 바람은 이루어진 적이 없었으므로 그는 또다시 빈손으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도, 문을 부숴버릴 수 있는 도구도 얻지 못한채 빈 손으로 터덜터덜 아내와 동생이 기다리는 집으로 되돌아 온다.


문제를 맞닥뜨린 소스케의 태도는 지극히 소극적이다. 야스이를 찾아가 사과를 하지도 못하고, 야스이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조차 내지 못한 채 '해답을 구해야 한다,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이유를 내걸고 절간으로 숨어 들어간다. 기도 스님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그가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이유는 바로 번뇌 때문이다. 이미 답은 구해져 있으며, 구해진 답대로 행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음을 아는데도 조금 더 편하고 부담이 덜한 답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과 누군가 대신 행해주었으면, 만나기 전에 야스이가 조용히 떠나가 주었으면 하는 번뇌가 소용돌이 쳐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소스케의 이런 방황을 욕하지 못할 것이다. 1900년대에 행해진 소스케의 번뇌는 바다 건너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먹먹하면서도 아픈 소설이다. 중요한 순간에서의 주저함이 불러 오는 비극은 잘 벼려진 칼끝과 같아서 선연한 날카로움을 간직한 채 폐부 깊숙한 곳까지 찌르고 들어온다. 이 아픔을 껴안은 채 『문』을 읽다 보면 문 사이에 갇힌 게 소스케인지 나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우매하고 황망한 기분에 사로잡히는데 바로 이런 어수선한 느낌 때문에 문 너머에 있는 문지기가 문을 열어주기만을 간절히 원하고 바랐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중요한 때에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하더라도 소스케에게 닥쳐온 비극과 후회가 영영 오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기에 그저 닥쳐야 할 일이 닥쳐 왔던 거겠거니,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의 태평한 생활이, 그리고 이 가난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답답함이 몰려 오다가도 이렇게 살아도 나쁘지 않겠다,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아마 삶을 영위하는 노나카 부부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노나카 부부의 생활 위에 뿌리 깊게 자리한 평화로움과 태평함은 때론 권태를 몰고 다가오지만, 이들의 생활이 변함없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그 권태마저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들 부부의 태도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고로쿠가 노나카 부부와 함께 신년을 맞이할 즈음에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넉넉하고 태연한 포즈(그렇게 보이기 위한 단순한 포즈였다 하더라도)를 취한 점만 미루어 봐도 애써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려는 태연자약한 태도의 전염성을 무시할 수 없다. 소스케의 앞과 뒤에 떨어져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은 문들은 책을 덮는 순간까지 닫힌 상태로 고정되어 있었지만 <후기 3부작> 중 어느 한 권에서는 이 중 하나의 문이라도 열리거나 부서지는 건 아닐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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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문학동네 청소년 27
유은실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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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실은 자신에게서 비롯된 씨앗을 놓치지 않고 손 안에서 굴리다 싹을 틔운 작가다. 당신 삶의 중심이 된, 변두리에게 이 작품을 바친 것으로 짐작해 볼 때 작가는 동화를 써오던 지난 시간 내내 마음 한켠에 변두리의 씨앗을 심고 보살펴 온 것이 틀림 없다. 유은실의 작품 『변두리』에는 중심에 나가 살고 싶지만 중심으로 나가지 못하는 열 세 살 여자아이 수원이 등장한다. 중심에서 한참 밀려난 것으로 모자라 서울 변두리에서도 가장 바깥에 살고 있는 아이다. 인간적인 삶과 인간적이지 못한 삶 사이의 경계, 가난과 가난의 경계, 테두리 안쪽과 테두리 바깥쪽의 경계 같은 것들. 그러한 경계들 사이에 위태롭게 걸쳐 사는 것 같지만 결국은 그보다 더 바깥에 밀려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책 속에 담겼다. 유은실 역시 변두리에 살았고, 살아왔을 것이라 추정된다. 절대로 타협되지 않는 이해와 폭력이 맞부딪히는 삶의 경계, 편리와 불편이 갈등하는 경계 등 작가가 글을 쓸 수 있도록 쥐고 흔드는 삶의 경계 속에서 그녀는 흔들리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경계들의 맞부딪힘을 그려내기 시작한다. 동심원의 중심으로 서서히 들어가지 않고, 동심원의 바깥에서 동일한 크기와 세기로 부딪혀 오는 또다른 동심원을 바라보며 끝없이 경계선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다.수원이 그랬던 것처럼 유은실 역시 변두리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그녀는 스물 다섯에 쓴 변두리의 씨앗을 여지껏 굴려온 게 아닐까. 손 안에서 굴리고 굴리다 심어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 때 즈음 부드럽고 양분 많은 토양에 씨앗을 심고 다독여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독이고, 보살피며 지켜보다 가다듬고, 사랑하고, 미워하다 끌어안으며 지금에 이르게 된 게 아닐까. 그런 느낌이다. 『변두리』는 결코 떠나보낼 수 없었던 씨앗을 오랜 시간 동안 손바닥 위에 놓고 굴려온 테가 나는 작품이다.


유은실의 글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만국기 소년』때도 그랬고 『멀쩡한 이유정』때도 마찬가지였다. 아픔을 성장으로 포장하려 하지도 않고, 더러움을 깨끗함으로 포장하려 애쓰지 않으며, 잔인성을 순수함으로 포장하려 들지도 않는다. 세상을 끝없이 밀려 나가며 잔인함을 입고 포악함을 입고 위악적임을 배우는 아이들의 학습력을, 부모가 세상에게 취하는 포즈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포즈를 취하며 더 나쁜 쪽으로 변주되는 아이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낼 뿐이다. 동화는 아이들에게 교훈을 줘야 한다던가, 어른들이 바라는 어린이상을 담아내야 한다는 허울뿐인 규칙에 얽매이지 않으며 오히려 솔직하고 담담하게, 때론 잔인할 정도로 사실적인 현실을 그려낸다. 하지만 그런 잔인한 사실 앞에서 우리는 위로 받는다. 세상과의 불화를 경험하며 자라온 모든 이들이, 자신만의 아픔이라 생각해 곪아 터질 때까지 속에 끌어 안고 자라왔던 어른들이 자신과 비슷한 유년의 아픔을 드러내보이는 어린 인물들을 통해 위로 받고, 자신과 같거나 비슷한 혹은 그보다 더한 상처를 끌어안기 시작한 주변의 아이들을 돌아보는 것이다. 『변두리』는 변두리에 지나지 않는다. '국도와 만나는 8차선 도로가 도시를 가로지'른 탓에 수원이 사는 황룡동이 더욱 고립되어 버린 것처럼 중심을 중심으로 있게 만들어주는 변두리는 그저 변두리로 남는다. 중심이 아닌 변두리가 아름다울 수 있을까. 아니, 당장은 아름답지 않더라도 오래 생각하고 추억하다보면 아름다워질 수는 있겠다. 하지만 유은실은 처음부터 변두리를 아름답다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게 만들어 아무도 깊게 들여다보려 하지 않은 변두리의 심해를 직시하게 만든다.

 

독자를 가라앉게 만드는 일에 유은실은 열심이다. 한결 같은 태도로 인물도 독자도 바닥으로 끌어내린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떠올리게 만드는 첫 장에서는 아주 모질고 처참한 방식으로 수원을 세상 표면으로 밀어낸다. 그토록 외면하고 싶었던, 도망치고 싶었던 밝은 세상 앞에 수원이 속해 있는 어두운 변두리의 생활을 그대로 내비치게 만들어 수원이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세기로 세상과 충돌시킨다. 횡단보도 위로 쏟아진 소와 돼지의 부산물을 손으로 주워 담고, 세상과 충돌시킨 원인의 머리채를 휘어 잡은 채 피칠갑한 손으로 뺨을 후려치는 수원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다. 하지만 유은실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도살장의 냄새와 도살장 부산물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수원을 끝없이 도살장 가까이 끌어오며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린다. 누군가는 쉽게 눈 돌리며 외면하는 깊은 어둠 속으로 어린 수원과 수길을 밀어 넣는다. 사춘기에 접어든 수원에게 도살장이 있는 황룡동에서의 삶은 '벗어나고 싶고, 벗어나야만 하는 삶'이다. 도살장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먹고 자랐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 도살장의 냄새가 자신의 몸에서도 나면 어떡하나 싶은 걱정스러움, 도살장에는 초원이 있고 그곳을 지키는 카우보이가 소 젖을 짜듯 선지를 짜낸다는 아버지의 거짓말을 찰떡같이 믿고 있는 동생이 도살꾼이 될 것 같은 두려움을 이용해 수원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린다. 이건 아닌데,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 하는 순간 독자들은 어린 수원과 함께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잔혹하다 싶을 정도로 내몰았으면서 어느새 작가는 따스하게 인물들을 끌어와 품에 안는다. 그들이 주변의 세계와 자신의 삶을 인정하고 포용할 수 있게 돕는다. 황룡동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수원을 황룡동에 붙들어 놓는 것도, 동화 속 이야기처럼 꾸며진 도살장의 살풍경을 목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변태로 각인되어 있던 아버지의 이미지를 다른 이의 부끄러움으로 뒤덮게 만들어 주는 것도 용비봉 첫꽃 따먹기 행사에서 비롯된다. 이 소설에서 가장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며 묘사되고 있는 것도 아까시 나무의 첫꽃을 따먹는 행사 부분이다. 동이 터오기 전부터 용비봉을 올라가는 아이들의 모습과 기대심리, 산 능성을 타고 떠오른 햇살을 바라보던 수원이 내지른 외침과 그에 화답하듯 각자가 아는 구호를 외쳐대는 아이들의 함성, 꽃을 따 입 안에 넣어 꿀만 빨아 들였을 때 느끼는 달큼한 맛과 혀끝에 남는 쌉싸름함에 대한 묘사 같은 것들이 꽤 농밀하게 그려진다. 왜 이 행사가 비중있게 다뤄지는 걸까. 바로 세상을 수용하는 방식 때문일 거다. 그토록 밀어내고자 했던 황룡동의 꼬리표가 수원과 수길에게 어떤 식으로 자리하게 되는지, 황룡동의 아이들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아카시아 꽃 향기처럼 도살장의 그림자가 어떤 식으로 아이들에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이 행사로 보여준다. 아카시아처럼 아이들을 강인하게 만드는 힘이 첫꽃 안에 깃들어 있다고 믿은 어른들이 만들어낸 행사에 동참함으로써 아이들은 용비봉의 아이들, 황룡동의 아이들로 자리매김한다. 수원은 용비봉을 올라 칼집이 나지 않는 아까시 나무의 꽃을 따먹고, 수길은 칼집이 난 아까시 나무의 큰 꽃을 따먹는다. 몽정을 하지 않은 사내아이와 초경을 치루지 않은 여자아이만이 첫꽃 따먹기 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 유은실이 세상과의 충돌을 이겨내는 방식은 꽤나 순박하고 다정한 구석이 있는 듯하다.


그리고보면 『변두리』 빙 돌아가는 구석 없이 순조롭게 흘러간다. 절대로 맞물려 돌아갈 것 같지 않았던 주민들 개개인의 삶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맞춤하게 맞물리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가장 노릇을 해준 적이 없었던 아버지는 도살장 청소부로 취직해 가계에 보탬이 되기 시작했고, 내장 허드렛일을 도맡던 어머니는 빵 공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수길은 병원 옥상에서 도살장의 모습을 목격한 뒤 충격에 빠져 한동안 부산물은 입에도 대지 않았지만, 소설의 마지막 즈음에는 조금씩 부산물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피 먹는 사람들이 많아 교회 들어올 곳이 못 된다는 황룡동에 교회를 세운 전도사는 부산물을 먹기 위해 노력한 끝에 선지국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허풍을 치며 자존심을 지켜오던 밤벌레 할머니는 자신이 떠벌린 허풍 때문에 설레발을 치는 정수네를 달래기 위해 수원의 어머니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한다. 외따로 떨어져 살아가는 것 같아도 결국 이들은 소와 돼지의 부산물을 먹고 살아온 변두리 주민들인 것이다. 한 때는 자신들의 생활방식과 가난, 식자재를 부끄러워하며 안타까워했지만 그것들이 자신의 억척스러움과 진득함, 강함을 이룩하게 해주었음을 인정하고 관계를 결속하고 유대하며 새로이 힘을 다진다. 국도와 만나는 8차선 도로 저편의 주택가 주민들의 삶을 동경했을지라도 언제까지나 동경만 하고 살아갈 수 없음을, 지독할 정도로 부끄러웠던 도살장 냄새에 질식하듯 사라진 아카시아 냄새를 기억하며 발돋움 한다. 힘의 원천이 되어준 아카시아 꽃이 자라던 용비봉을 향해, 무너지지 않은 상숙의 집을 향해 걸어가며 수원은 비로소 구심점을 지닌 강수원이 된다.


거짓말 같은 힘이 있는 작품이다. 첫 번째 장편소설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유은실은 자신의 원형을 깊이 파고든다. 속된 말로 떡밥이라 일러지는 복선을 말끔하게 처리해내며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작품을 완성해 냈다. 유은실은 어린 화자를 내세워 아픈 상처를 말끔하게 도려낸 뒤 새살이 돋아날 수 있도록 돕는다. 흉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돋아난 새살을 독자가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돕는다. 독자를 몰입시키고 아프게 만드는 작가의 괴물같은 힘은 그대로 변두리의 힘이 되어 1985년의 서울 변두리, 황룡동으로 인물과 독자 모두를 끌고 들어간다. 수원은 결국 수원으로 가지 않는다. 그토록 가고 싶었던 대한민국의 중심, '수원'이 아닌 '황룡동'에 남아 모든 관계, 모든 사태, 모든 감정의 중심에 오롯하게 자리한다. 작가가 떠밀었던 심연에서 제 스스로 발광하며 성숙해진 것이다. 수원의 성숙이 작가의 떠밀림에서 비롯된 것인지, 용비봉 위로 해가 솟아올랐을 때 따먹은 아카시아 첫꽃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소설의 첫 장에 등장하는 수원보다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수원이 훨씬 성숙해진 개체라는 점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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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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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이 간결할 수 있는 문장들이 좋았다. 질척거리거나 끈적거리지 않고 간결하게 마침표를 찍어낼 수 있는 문장들 사이의 짧은 호흡이나, 문단에서 문단으로 넘어가는 사이에 숨을 고르게 내쉬고 들이마실 수 있는 잠깐의 여유 같은 것들이 좋았다. 애자가 애자인 이유, 소라가 미나리의 뜻을 담게 된 이유, 나나가 나나를 나나라 칭하는 이유와 언니를 언니라고 부르지 않고 소라라고 부르게 된 이유, 나기가 너에게 집착하는 이유와 소라와 나나의 곁에 꾸준히 머무는 이유 같은 것들이 각자의 언어와 느낌, 시선을 통해 담백하게 그려지고 있다. 인물들은 본인에게 맞는 어투와 뉘앙스를 구사하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치 자신들의 곁에 독자가 있다고 의식이라도 하는 것처럼 증명하고 진술하듯 덤덤하게 이야기한다. 계속해보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쪽은 나나다. 이들이 어떻게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지게 되었는지는 작가만이 알고 있다. 작가는 인물들에게 본인의 목소리를 선물한다. 본인의 말투, 본인의 느낌, 본인의 이야기를 선물해주었다. 책의 전반에서 느낄 수 있는 문체의 느낌은 하나로 유지하면서도 인물 개개의 어투와 톤은 달리 설정한 뒤 어색하지 않게 구사해냈다. 해내기 힘든 일이라 뭉뚱그리며 넘어가려 하는 대신 어렵더라도 눈앞에 문제를 놓고 직시한 채 함께 나아간 느낌이었다.

 

『계속해보겠습니다』는 각 인물들의 인생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장 주축이 되는 것은 애자와 그녀의 딸들(소라와 나나)이 발화하는 모든 이야기들이다.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나나의 이야기로 '애자와 같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라고 되뇌고 고민하며 질문하는 인물이다. 나나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법이 없다. 그렇다고 애써가며 애둘러 표현하는 쪽도 아니다.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을 3인칭으로 칭하며 말할 때, 자신만이 자신의 이름을 오롯이 불러줄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일 때 나나는 나나다움을 인증한다. 정확히는 애자처럼 자식을 사랑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예비엄마의 마음 같은 것.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그 상태에서 자녀를 낳고, 헌신적으로 애정을 쏟으며 자녀를 부양하는 것이 엄마로써의 도리이며 책임이라고 말한다면 나나는 그렇게 해내지는 못할 것이다. 나나만의 방식과 사랑으로 자녀를 보살필 수는 있겠지만 소라와 나나를 길러준 애자처럼 사랑으로 가득 찬 언어와 태도로 자식을 길러내지는 못할 것이다. 나나는 선천적 모성애가 부재할지도 모를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성애의 부재가 그리 기괴한 문제가 아님에도 뾰족하게 다가오는 것은 '여자라면 누구나 모성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세상의 시선과 강압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나의 고민과 생활은 여성 독자인 내게 더욱 날카롭고 선연하게 다가온다.

 

『계속해보겠습니다』를 여성적인 소설이라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여성 작가가 전형적이지 않은 여성상의 인물을 내세워 여성적 어조로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기 때문이다. 여성의 문제를 여성의 시선으로 힘들이지 않고 말 하는 것, 피해자인 척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힘없는 나약한 대상인 척 이야기하는 것도 아닌 그저 한 사람의 사람이자 여성이며 고민을 가진 주체로 대하며 이야기하는 그 과정과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모성애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며, 아기를 가졌다고 해서 생기는 후천적인 것도 아니며, 열달을 품어 세상 밖으로 내보낸 자신의 자식을 눈으로 확인한 다음 자식의 어여쁨을 지켜보며 생겨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먼저 말해주고 싶다. 모성애라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발생되거나 만들어지는 감정 혹은 요인같은 것도 아니며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나 필수 성격 같은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나나의 고민은 '엄마가 될 수 있는 모든 여성'이 가질 수 있는 고민이라는 점에 있어 가치가 높다. 타고나지 않은 모성애에 대해 깊게 고민하고 두려워하며 헌신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질문하는 인물로서의 나나는 모든 여성이 의심해 볼 수 있는 사안을 대신 고민해주는 행자이자,'모성애는 생겨나는 것'이라 말하는 뭇 남성들에게 내면의 고민과 여성적 다양성을 발화해주는 대상적 화자이다.


여자라고 모두 모성애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야, 라는 고백과 함께 잘 키워보려 애쓰는 거지,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애쓰는 거야, 말하는 목소리가 좋았다. 자신들의 처지나 상황을 구구절절하게 늘어 놓으며 이해해달라고 때쓰거나 강요하지 않고 내 상황은 이렇고 너의 상황은 이러하니 우리는 어쩌면 서로를 보듬어 줄 수도 있고 부듬어주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이야기하는 그 덤덤한 태도가 좋았다. 소라는 소라대로 이모가 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아이를 싫어하는데, 좋은 엄마가 될 자신도 좋은 이모가 될 자신도 없는데 심지어 그런 준비를 할 시간도 마땅치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응, 나 임신했어."라고 인정해버리는 나나의 태도에 두려워졌을 것이다. 나나는 나나대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애자와 같은 엄마가 되어줄 수 없다는 것을 본인이 잘 아는데 그렇게 헌신적이며 사랑으로 가득 찬 부모가 되어줄 수 없음을 알아버렸는데 남편을 잃은 애자가 사랑을 모두 잃고 껍질만 남은 채 아이들을 가엽게 방치하던 순간에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아는데 기꺼이 부모가 될 수 있다고 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역시 나나의 이야기. 나나가 남자친구의 부모님을 만난 뒤에 생각하는 것들이었다. 이해 받지 못할 거라는 것. "엄마를 애자라고 부르는 거. 그만 하면 안 돼?"라고 말하는 남자친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나는 남자친구와 결혼을 하며 살게 되어도 시댁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것 같다. 그저 물끄러미, 저 사람들은 자신들을 절대 이해하지도, 이해 할 수도,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통감하며 살게 될지도 모른다. 이해 받지 못할 관계라면 끝내는 게 맞겠지, 라는 생각을 했다. 나나의 선택이 틀린 선택이 아니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소라는 아이를 좋아하지 않지만 거짓으로 좋아한다고 위선을 떨지는 않는다. 나나가 예민한 시선으로 자신의 자매를 평가하고 바라볼 뿐이다. 위선적인, 나약한, 맹랑한 소라. 그런 이미지를 만들어 원망하고 미워하다가도 연민하고 동정하며 때론 동경한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새로운 이름의 병이 되어 소라와 나나를 잠식하지만 그것은 때론 백신이 되어 그들을 낫게 해준다. 나기도 마찬가지의 존재. 소라와 나나에게 위안을 주고 위안을 받는 존재다.

 
그래, 이 소설은 연약해 보이지만 결코 연약하지 않은 강인한 여성들의 이야기다. 엄마, 라고 소리내어 부를 수 있는 존재임과 동시에 소라 혹은 나나 혹은 애자라고 소리 내어 부를 수 있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 작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목소리는 소라-나나-나기 순이지만 그들이 내는 목소리 안에는 애자의 이야기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때론 강인하고 때론 아름다워보이는 애자라는 인물을 생각하다가 소라와 나나가 말하는 애자 씨의 인생은 애자 씨만의 인생과 동일할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애자 씨의 입을 통해 들었던 그들의 연애시절 이야기를 나나는 담담하게 전한다. 하지만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가 오롯한 애자 씨의 이야기일까, 의심하게 되는 건 인간이 모든 것을 오롯하게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는 것, 어머니라는 가족적 호칭이나 지칭대명사를 버리고 '애자'라 이름하는 것은 자신들이 말하는 대상이 한 사람의 인간이자 하나의 주체, 또는 객체화 될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을 '거리두기'라고 표현해서는 안 된다. 직계 관계를 가진 인물이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이름으로 호칭하는 것이 얼마나 예의 없는 행위인지를 따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나나엄마, 소라엄마라고 부르며 대상의 주체성을 무력하게 만들고 존재의 힘을 무시하는 것이 더 폭력적인 행위니 말이다.

이 소설은 여성이 남성적이려 하지 않고 여성적인 목소리를 덤덤한 태도로 내는 소설이다. 여성의 문제를 여성스럽게 보이려 말하지 않는다는 것, 여성스러움에 묻어 가며 문제를 해결하거나 문제의식을 내던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이 아닐까. 황정은은 특유의 담담한 문체로 여성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가족의 문제, 한부모 가정의 고민이나 사회적 시선 문제, 이런 형태의 가정이 이상적인 가정이라 말하는 사람들의 무의식적 폭력성에 대해 그저 덤덤하게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더듬거리며 나아가게 만드는 답답한 소라의 이야기를 견뎌내고 나면 빠르고 냉철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나나를 만날 수 있다. 나나 다음에는 속삭이며 고백하는 나기를, 그 다음에는 또다시 나나를 만날 수 있다. 나는 당신들이 이 세 사람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동안 들으려 하지 않았거나 듣고도 모른척 외면해 왔던 누군가의 이야기를 소라, 나나, 나기의 입을 빌어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모든 여성들이, 그리고 남성들이, 모든 부모들과 자식들이 읽어보면 좋을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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