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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개 똥 쪼물이 - 제22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저학년 부문 우수상 수상작 ㅣ 신나는 책읽기 51
조규영 지음, 안경미 그림 / 창비 / 2018년 3월
평점 :
받아쓰기 시간이 끝나고 공책을 돌려 받으면 아이들은 한숨을 폭폭 내쉰다. 받아쓰기 공책에 하나, 일기장에 하나. 더 노력하라며 펑펑 우는 모양새의 '울보 도장'이 쾅! 찍힌 날이면 아이들의 숨이 턱! 하고 막힌다. 울보 도장을 받기 싫어 잘 하려 노력한 건데 선생님은 그 마음도 몰라주고 쾅쾅 울보 도장을 찍어댄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펼쳐내는 상상력에 큰 관심이 없다. 용이 불음 뿜고, 날개 달린 요정이 날아다니고, 로봇이 움직이는 유치한 그림 말고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타고 있는 확실한 그림을 독후화로 요구할 만큼 강압적이기까지 하다. 아이들은 울보 도장을 받기 싫어 "낙서 아니예요!"라고 대거리 하는 대신 "고, 고칠게요."라고 답하며 그림을 허겁지겁 지운다.
"엄마는 모범상 받으라고 난린데. 이러다가 울보상 받겠어. 선생님은 왜 자꾸 울보 도장을 찍어 주는 걸까?"
소심하고 겁 맞는 다빈이는 꽤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정말 왜 그럴까? 왜 어른들은 아이들이 잘 하길 바라면서도 칭찬에 인색할까? 잘 하고 있는 아이에게 더 잘해야 한다고 윽박 지르고, 쉴 틈 없이 빡빡한 일정을 들이대며 숨통을 옥죄고, 사사건건 간섭하며 더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안달한다. 아이들이 바라는 건 높은 성적도, 완벽한 숙제도 아닌데 그 마음을 몰라주는 어른들이 야속하기만 하다.
그런 아이들의 복잡한 마음은 하나의 염원이 되었다. 울보 도장을 받고 싶지 않은 마음, 엄마에게 혼나고 싶지 않은 마음, 선생님의 날카로운 눈빛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뭐든지 잘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자유롭고자 하는 마음, 즐겁고 싶은 마음,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이 되어 쪼물이와 친구들의 몸에 깃든다. 아이들은 그림을 지우느라 생겨난 지우개 똥을 돌돌 말아 뭉치고 쪼물쪼물 팔과 다리를 만들어 붙인 다음 숨을 훅 불어 넣어 생명을 깃들게 한다. 그렇게 태어난 쪼물이, 짱구, 딸꾹이, 헐랭이는 사물 세계에서 아이들을 대변하는 아바타이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용사가 된다.
긴장감 넘치는 의인 동화 속 어린이들
『지우개 똥 쪼물이』에 등장하는 인간 어린이들(유진, 준서, 다빈, 태우)은 사물 세계에 속한 지우개 똥 사총사(쪼물이, 짱구, 딸꾹이, 헐랭이)와 같은 존재다. 지우개 똥 사총사는 인간 어린이 사총사의 작은 아바타이며, 이들은 인간 어린이들의 염원인 '울보 동장 퇴치'를 위해 힘을 모은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지우개 똥 사총사에게 힘은 주어지지 않는다. 교실 생태계 내에서 절대적 권위를 행사하고 있는 이가 담임 선생님이라면 사물 세계에서 담임 선생님과 동일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울보 도장이다. 울보 도장은 체격 면에서도 획득한 권력 면에서도 지우개 똥 사총사와 대비된다. 지우개 똥 사총사는 아무리 힘을 합쳐도 울보 도장을 넘어뜨리지 못한다. 온 몸으로 밀어도 꼼짝하지 않는 울보 도장의 절대적 권위는 "울보 도장 찍는다"는 말로 아이들의 자유를 억압하던 담임선생님에게서 비롯된 것임이 틀림 없다.
울보 도장에게 부여된 권력이 절대적인 탓에 지우개 똥 사총사의 도전은 거듭 실패한다. 좌절한 사총사 앞에 새로운 적이 등장한다. 바퀴벌레 모습을 한 부하벌레다. 부하벌레는 수학 시험, 영어 시험, 받아쓰기 시험 등 아이들이 흥미를 느끼지 못한 과목의 글자를 지워 생겨난 지우개 가루가 뭉쳐저 만들어졌다.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것은 물론 즐겁고 긍정적인 감정에서 파생된 사총사를 갉아 먹는 등 직접적 위협을 끼치는 존재다. 울보 도장이 찍힌 일기장이며 공책이 인간 아이들을 좌절시키듯 부하벌레의 등장에 사총사는 또 한 번 좌절한다. 수적 열세, 힘의 열세를 상쇄시켜 줄 '기적'같은 힘은 이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기댈 수 있는 것은 사총사의 협력에서 나온 아이디어 뿐이다. 그들은 클립이나 고무줄, 샤프심 같은 문구용품을 이용해 부하벌레와 울보 도장에 맞서 싸운다.
사총사의 권력 전복 시도는 딱 한 번 성공한다. 고무총 원리를 이용해 발사된 짱구가 울보 도장을 밀어 넘어뜨림으로서 어른에게 주어졌던 권력은 어린이인 사총사에게 옮겨오는 것처럼 보인다. 허나, 전복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부하벌레들이 울보 도장을 일으켜 세움으로서 이들의 기쁨은 다시 좌절되고, 권력 전복도 무산된다. 거듭된 좌절과 패배 앞에 희망은 없어 보인다.
기적과도 같은 최상위 권력자의 등장
허나 여기서 '기적'이 발생한다. 사총사를 짓이기기 위해 앞으로 돌진하던 울보 도장이 부하벌레 한 마리를 짓이김으로써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동료를 잃은 부하벌레들은 미안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 울보 도장에게 복수하기 위해 움직임을 봉쇄한다. 바로 그 순간, 기적처럼 등장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최상위 권력자인 깐깐 선생님이다. 점심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교실로 돌아온 깐깐 선생님의 눈에 바퀴벌레에 둘러 싸인 울보 도장의 모습이 목격된다. 선생님은 손에 잡히는 책으로 바퀴벌레를 잡아 죽이고 울보 도장과 함께 쓰레기통에 내다버린다. 이렇게 '울보 도장을 없애주면 좋겠다'는 유진의 소망은 교실 생태계 내 최상위 권력자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깐깐 선생님의 손에 의해 해결된다.
허무한 결말이다. 최상위 권력자의 개입은 지금껏 인간 아이들을 대신해 전투를 치뤄 온 지우개 똥 사총사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기 충분하다. 어째서 작가는 어린이들의 손으로 문제가 해결 되지 못하게 막았을까? 2학년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정작 이 나이대 아이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리라 보았나? 만약 작가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이는 열 살 아이들의 문제해결 가능성을 낮게 본 게 틀림 없다.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어른이 개입해 교통정리를 하기도 전에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정리하고 상황을 종료시킨다. 뒤늦게 참견한 어른에 의해 당시의 상황과 상처가 재개봉 되는 것일 뿐, 아이들은 나름의 문제해결 방식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지우개 똥 쪼물이』 속 아이들은 어땠나?
이 동화에서 아이들은 결코 권력을 쥐지 못한다. 선생님 몰래 그림을 그릴 때에도 들킬까 마음 졸이며 자기들끼리 눈짓을 주고 받으며 웃는다. 상상력은 억압 당하고, 자유는 빼앗겼으며, 자존감은 거듭 깎인다. 선생님을 두려워하고, 울보 도장을 무서워하며, 부모를 원망한다. 어른들이 쉽게 요구하는 '잘 해야 한다'의 '잘'이란 '어른 평균 상식적인 수준'을 갖춰야 한다는 뜻이지 어린이의 특성을 고려한 수준은 아니다. 때문에 선생님은 2학년 아이들에게 '또박또박' 글씨를 쓸 것을 요구하고, 받아쓰기 성적과 일기의 수준으로 2학년 최고의 반이 될 것을 요구하며, 합동 독후화를 그리더라도 공상의 세계가 아닌 책의 주제에 알맞는 상식적인 그림을 그릴 것을 요구한다. 가정에서 요구하는 것도 별반 다르지 않다. 부모는 아이에게 울보 도장이 찍히지 않은 알림장을 요구하고, 모범상을 요구한다. 부모와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바는 동일하다. 어른의 요구에 굴종하여 기대를 만족시키는 것, '작은-인간'이 아닌 '작은-어른'으로서 '어른의 상식'에 맞는 언행으로 기대를 충족시켜 주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와 교사와 어린이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우개 똥 쪼물이』가 '좋은 책'이라 여겨지는 이유는 지우개 똥 사총사가 보여준 연대와 호흡에 있다. 사총사는 지우개 똥을 뭉쳐 만든 아이들이지만 유진, 다빈, 준서, 태우를 각각 대변한다는 점에서 '어린이가 직접 행동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비록 시도는 좌절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최상위 권력자의 몫으로 돌아갔지만 사총사의 도전이 아이들의 웃음을 되찾는 데 일조했으므로 완전한 실패라 보기는 힘들다. 또, 지금 이 시대에 어린이들에게 요구되는 말도 안 되는 기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의 의미가 있다. 독자들은 이 어린이들이 쉬는 한숨 소리에 한 번, 뚝뚝 떨어지는 눈물방울에 또 한 번, 참기 위해 애쓰다 터져나오는 딸꾹질 소리에 다시 한 번 '어린이를 어린이로 대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