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9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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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하게 써내려간 것 같지만 그 안에서 절박한 고민을 껴안고 있었을 작가의 모습을 쉽게 지울 수 없다. 도쿄 변두리에서 20세기 초를 살아가는 노나카 부부의 일상을 그린 『문』은 나쓰메 소세키 <전기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자 <후기 3부작>을 이어주는 매개체 같은 작품이다. 『산시로』에서 『그 후』를 거쳐 『문』으로 마무리되는 <전기 3부작>은 각기 다른 인물들을 내세우고 있지만 인물들이 경험하는 삶의 형태가 작가 본인이 경험한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산시로, 다이스케, 소스케는 나쓰메 소세키와 동일선상에 놓인다. 20대 청춘의 방황(『산시로』) 이후에 성숙해진 인물(『그 후』)의 뒷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문』은 주어진 현실에 어떻게든 만족하고 마는 소시민 노나카 소스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시정 셀러리맨으로 일하고 있지만 그는 유복한 생활을 하고 있진 않다. 일자리도 결국 친구의 알선으로 얻어낸 것에 불과하며 자신이 직접 해낸 일이라고는 게다를 신고 휘청거리며 산책을 하거나, 전철을 타고 종점으로 갔다가 다시 집으로 되돌아오는 정도에 그친다. 해가 바뀌면 봉급의 25퍼센트를 올려 준다던 회사에서 고작 5엔을 올려도 소스케는 만족한다. 5엔이나 올랐다고 기뻐하지도 않고 5엔밖에 올려주지 않았다고 분개하지도 않는다. 그저 5엔이 올랐네, 하고 마는 것인데 이런 식의 반응과 태도는 『문』의 책장을 덮을 때까지 유지된다.

소스케는 그런 사람이다. 전면에 나서려고도 하지 않고 뒤로 내빼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 겉으로는 태연자약해보이는 이런 태도는 소설의 첫 장부터 예견되어 있었던 것이기에 노나카 부부의 태도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변화하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태평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태평한 것이나, 외면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외면하는 태도 같은 것들이 소시민적인 소스케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 '소스케답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사실 소스케는 소설의 첫 장에서부터 희미한 존재처럼 그려진다. 그가 마루에 누워 오요네에게 근래(近來)의 근()자를 어떻게 쓰는지 물어보는 장면에 이어, 금일(今日)을 종이에 제대로 써넣고 금 자가 제대로 쓴 게 맞는지 알 수 없어져 헤맸다는 이야기를 털어 놓는 장면은 이들이 가까운 시대, '지금'이라 말할 수 있는 현재의 시간에서 조금 벗어나 있음을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들은 다른이들과 함께 20세기 초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지만 동시에 그 시대와는 전혀 무관한 곳에서 자신들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기도 하다. 현재를 살고 있음에도 현재를 바라보지 않는, 그렇다고 과거를 돌아보는 것도 아니며 미래를 내다보는 것도 아닌 붕 떠있는 상태로 그려지는 노나카 부부의 일상은 『문』의 분위기를 지배한다.

 









 

열리지 않는 문

소스케는 문과 문 사이에 갇혀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인간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풀어보려 했지만 풀어볼 힘도, 의지도 쉽게 생겨나지 않았던 고로쿠의 학비 문제는 불현듯 소스케의 등 뒤에 떨어진다. 걸쇠가 단단히 걸려서 문의 안쪽에서는 바깥쪽에 걸린 걸쇠를 풀어낼 수 없는 것이다. 작은집을 찾아가 자초지정을 설명해 그간 받지 못했던 제 몫의 재산을 받아 올까도 생각해봤지만 숙부의 연이은 사업으로 소스케는 마땅히 받아가도 좋았을 제 몫의 돈마저 잃어버렸다. 해결 될 여지가 충분했으나 스스로 움직이려 하지 않아 그 기회를 놓쳐버린 인간은 소스케와 같은 모습을 하고 살아가고 있을 것 같다. 주어진 기회에 충분히 응답하지 못하는 것. 기회를 붙잡지 않은 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탓하는 것. 그런 우매하고 안타까운 인간의 모습이 소스케를 통해 그려지고 있다.

소스케의 앞을 가로막은 문도 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괴롭혀 왔던 어둠의 부채감으로 나서서 해결할 이유는 없지만, 해결되지 않는 이상 노나카 부부 사이에 아이를 갖는 일도, 보란 듯이 자신들에게 투자를 아끼지 않으며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것도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소스케를 찾아온다. 우연이라면 우연이고, 필연이라면 필연이라 말할 수 있는 이 인연은 사카이의 집을 매개로 하여 서서히 소스케의 숨통을 조여온다. 만날 것이냐, 피할 것이냐. 그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는 자신과 같은 어둠을 가진 오요네에게 문제상황을 고백할 수도 없는 처지에 놓인다. 어떻게든 고민을 털어놓아 마음의 짐을 덜고 싶은 마음은 불쑥불쑥 드는데 마음 편하자고 오요네에게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하는 건 옳지 않다는 생각에 그는 스스로 고민 속에 갇힌다.

문을 열기 위해 열쇠가 필요하듯 소스케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답을 찾기 시작한다. 자기 자신 안에서 해답을 찾고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제 안에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의지할 수 있는 거대한 존재를 찾아 길을 떠난다.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한 겨울, 차가운 겨울 바람 만큼이나 매서운 문제를 끌어안고 찾아간 절에서 소스케는 깨달음을 통해 해답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소스케는 이렇다 할 해답을 구하지 못한다. 구하려 했다기 보다는 알아서 구해지기를 기다리는 쪽에 가까웠다. 누군가를 통해 구해지거나, 우연히 구해진 답이 자신 앞에 주어지기를 소스케는 바랐다. 하지만 이런 식의 바람은 이루어진 적이 없었으므로 그는 또다시 빈손으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도, 문을 부숴버릴 수 있는 도구도 얻지 못한채 빈 손으로 터덜터덜 아내와 동생이 기다리는 집으로 되돌아 온다.


문제를 맞닥뜨린 소스케의 태도는 지극히 소극적이다. 야스이를 찾아가 사과를 하지도 못하고, 야스이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조차 내지 못한 채 '해답을 구해야 한다,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이유를 내걸고 절간으로 숨어 들어간다. 기도 스님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그가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이유는 바로 번뇌 때문이다. 이미 답은 구해져 있으며, 구해진 답대로 행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음을 아는데도 조금 더 편하고 부담이 덜한 답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과 누군가 대신 행해주었으면, 만나기 전에 야스이가 조용히 떠나가 주었으면 하는 번뇌가 소용돌이 쳐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소스케의 이런 방황을 욕하지 못할 것이다. 1900년대에 행해진 소스케의 번뇌는 바다 건너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먹먹하면서도 아픈 소설이다. 중요한 순간에서의 주저함이 불러 오는 비극은 잘 벼려진 칼끝과 같아서 선연한 날카로움을 간직한 채 폐부 깊숙한 곳까지 찌르고 들어온다. 이 아픔을 껴안은 채 『문』을 읽다 보면 문 사이에 갇힌 게 소스케인지 나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우매하고 황망한 기분에 사로잡히는데 바로 이런 어수선한 느낌 때문에 문 너머에 있는 문지기가 문을 열어주기만을 간절히 원하고 바랐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중요한 때에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하더라도 소스케에게 닥쳐온 비극과 후회가 영영 오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기에 그저 닥쳐야 할 일이 닥쳐 왔던 거겠거니,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의 태평한 생활이, 그리고 이 가난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답답함이 몰려 오다가도 이렇게 살아도 나쁘지 않겠다,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아마 삶을 영위하는 노나카 부부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노나카 부부의 생활 위에 뿌리 깊게 자리한 평화로움과 태평함은 때론 권태를 몰고 다가오지만, 이들의 생활이 변함없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그 권태마저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들 부부의 태도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고로쿠가 노나카 부부와 함께 신년을 맞이할 즈음에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넉넉하고 태연한 포즈(그렇게 보이기 위한 단순한 포즈였다 하더라도)를 취한 점만 미루어 봐도 애써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려는 태연자약한 태도의 전염성을 무시할 수 없다. 소스케의 앞과 뒤에 떨어져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은 문들은 책을 덮는 순간까지 닫힌 상태로 고정되어 있었지만 <후기 3부작> 중 어느 한 권에서는 이 중 하나의 문이라도 열리거나 부서지는 건 아닐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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