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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ㅣ 문학동네 청소년 27
유은실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평점 :
유은실은 자신에게서 비롯된 씨앗을 놓치지 않고 손 안에서 굴리다 싹을 틔운 작가다. 당신 삶의 중심이 된, 변두리에게 이 작품을 바친 것으로 짐작해 볼 때 작가는 동화를 써오던 지난 시간 내내 마음 한켠에 변두리의 씨앗을 심고 보살펴 온 것이 틀림 없다. 유은실의 작품 『변두리』에는 중심에 나가 살고 싶지만 중심으로 나가지 못하는 열 세 살 여자아이 수원이 등장한다. 중심에서 한참 밀려난 것으로 모자라 서울 변두리에서도 가장 바깥에 살고 있는 아이다. 인간적인 삶과 인간적이지 못한 삶 사이의 경계, 가난과 가난의 경계, 테두리 안쪽과 테두리 바깥쪽의 경계 같은 것들. 그러한 경계들 사이에 위태롭게 걸쳐 사는 것 같지만 결국은 그보다 더 바깥에 밀려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책 속에 담겼다. 유은실 역시 변두리에 살았고, 살아왔을 것이라 추정된다. 절대로 타협되지 않는 이해와 폭력이 맞부딪히는 삶의 경계, 편리와 불편이 갈등하는 경계 등 작가가 글을 쓸 수 있도록 쥐고 흔드는 삶의 경계 속에서 그녀는 흔들리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경계들의 맞부딪힘을 그려내기 시작한다. 동심원의 중심으로 서서히 들어가지 않고, 동심원의 바깥에서 동일한 크기와 세기로 부딪혀 오는 또다른 동심원을 바라보며 끝없이 경계선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다.수원이 그랬던 것처럼 유은실 역시 변두리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그녀는 스물 다섯에 쓴 변두리의 씨앗을 여지껏 굴려온 게 아닐까. 손 안에서 굴리고 굴리다 심어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 때 즈음 부드럽고 양분 많은 토양에 씨앗을 심고 다독여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독이고, 보살피며 지켜보다 가다듬고, 사랑하고, 미워하다 끌어안으며 지금에 이르게 된 게 아닐까. 그런 느낌이다. 『변두리』는 결코 떠나보낼 수 없었던 씨앗을 오랜 시간 동안 손바닥 위에 놓고 굴려온 테가 나는 작품이다.
유은실의 글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만국기 소년』때도 그랬고 『멀쩡한 이유정』때도 마찬가지였다. 아픔을 성장으로 포장하려 하지도 않고, 더러움을 깨끗함으로 포장하려 애쓰지 않으며, 잔인성을 순수함으로 포장하려 들지도 않는다. 세상을 끝없이 밀려 나가며 잔인함을 입고 포악함을 입고 위악적임을 배우는 아이들의 학습력을, 부모가 세상에게 취하는 포즈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포즈를 취하며 더 나쁜 쪽으로 변주되는 아이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낼 뿐이다. 동화는 아이들에게 교훈을 줘야 한다던가, 어른들이 바라는 어린이상을 담아내야 한다는 허울뿐인 규칙에 얽매이지 않으며 오히려 솔직하고 담담하게, 때론 잔인할 정도로 사실적인 현실을 그려낸다. 하지만 그런 잔인한 사실 앞에서 우리는 위로 받는다. 세상과의 불화를 경험하며 자라온 모든 이들이, 자신만의 아픔이라 생각해 곪아 터질 때까지 속에 끌어 안고 자라왔던 어른들이 자신과 비슷한 유년의 아픔을 드러내보이는 어린 인물들을 통해 위로 받고, 자신과 같거나 비슷한 혹은 그보다 더한 상처를 끌어안기 시작한 주변의 아이들을 돌아보는 것이다. 『변두리』는 변두리에 지나지 않는다. '국도와 만나는 8차선 도로가 도시를 가로지'른 탓에 수원이 사는 황룡동이 더욱 고립되어 버린 것처럼 중심을 중심으로 있게 만들어주는 변두리는 그저 변두리로 남는다. 중심이 아닌 변두리가 아름다울 수 있을까. 아니, 당장은 아름답지 않더라도 오래 생각하고 추억하다보면 아름다워질 수는 있겠다. 하지만 유은실은 처음부터 변두리를 아름답다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게 만들어 아무도 깊게 들여다보려 하지 않은 변두리의 심해를 직시하게 만든다.
독자를 가라앉게 만드는 일에 유은실은 열심이다. 한결 같은 태도로 인물도 독자도 바닥으로 끌어내린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떠올리게 만드는 첫 장에서는 아주 모질고 처참한 방식으로 수원을 세상 표면으로 밀어낸다. 그토록 외면하고 싶었던, 도망치고 싶었던 밝은 세상 앞에 수원이 속해 있는 어두운 변두리의 생활을 그대로 내비치게 만들어 수원이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세기로 세상과 충돌시킨다. 횡단보도 위로 쏟아진 소와 돼지의 부산물을 손으로 주워 담고, 세상과 충돌시킨 원인의 머리채를 휘어 잡은 채 피칠갑한 손으로 뺨을 후려치는 수원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다. 하지만 유은실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도살장의 냄새와 도살장 부산물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수원을 끝없이 도살장 가까이 끌어오며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린다. 누군가는 쉽게 눈 돌리며 외면하는 깊은 어둠 속으로 어린 수원과 수길을 밀어 넣는다. 사춘기에 접어든 수원에게 도살장이 있는 황룡동에서의 삶은 '벗어나고 싶고, 벗어나야만 하는 삶'이다. 도살장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먹고 자랐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 도살장의 냄새가 자신의 몸에서도 나면 어떡하나 싶은 걱정스러움, 도살장에는 초원이 있고 그곳을 지키는 카우보이가 소 젖을 짜듯 선지를 짜낸다는 아버지의 거짓말을 찰떡같이 믿고 있는 동생이 도살꾼이 될 것 같은 두려움을 이용해 수원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린다. 이건 아닌데,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 하는 순간 독자들은 어린 수원과 함께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잔혹하다 싶을 정도로 내몰았으면서 어느새 작가는 따스하게 인물들을 끌어와 품에 안는다. 그들이 주변의 세계와 자신의 삶을 인정하고 포용할 수 있게 돕는다. 황룡동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수원을 황룡동에 붙들어 놓는 것도, 동화 속 이야기처럼 꾸며진 도살장의 살풍경을 목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변태로 각인되어 있던 아버지의 이미지를 다른 이의 부끄러움으로 뒤덮게 만들어 주는 것도 용비봉 첫꽃 따먹기 행사에서 비롯된다. 이 소설에서 가장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며 묘사되고 있는 것도 아까시 나무의 첫꽃을 따먹는 행사 부분이다. 동이 터오기 전부터 용비봉을 올라가는 아이들의 모습과 기대심리, 산 능성을 타고 떠오른 햇살을 바라보던 수원이 내지른 외침과 그에 화답하듯 각자가 아는 구호를 외쳐대는 아이들의 함성, 꽃을 따 입 안에 넣어 꿀만 빨아 들였을 때 느끼는 달큼한 맛과 혀끝에 남는 쌉싸름함에 대한 묘사 같은 것들이 꽤 농밀하게 그려진다. 왜 이 행사가 비중있게 다뤄지는 걸까. 바로 세상을 수용하는 방식 때문일 거다. 그토록 밀어내고자 했던 황룡동의 꼬리표가 수원과 수길에게 어떤 식으로 자리하게 되는지, 황룡동의 아이들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아카시아 꽃 향기처럼 도살장의 그림자가 어떤 식으로 아이들에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이 행사로 보여준다. 아카시아처럼 아이들을 강인하게 만드는 힘이 첫꽃 안에 깃들어 있다고 믿은 어른들이 만들어낸 행사에 동참함으로써 아이들은 용비봉의 아이들, 황룡동의 아이들로 자리매김한다. 수원은 용비봉을 올라 칼집이 나지 않는 아까시 나무의 꽃을 따먹고, 수길은 칼집이 난 아까시 나무의 큰 꽃을 따먹는다. 몽정을 하지 않은 사내아이와 초경을 치루지 않은 여자아이만이 첫꽃 따먹기 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 유은실이 세상과의 충돌을 이겨내는 방식은 꽤나 순박하고 다정한 구석이 있는 듯하다.
그리고보면 『변두리』 빙 돌아가는 구석 없이 순조롭게 흘러간다. 절대로 맞물려 돌아갈 것 같지 않았던 주민들 개개인의 삶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맞춤하게 맞물리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가장 노릇을 해준 적이 없었던 아버지는 도살장 청소부로 취직해 가계에 보탬이 되기 시작했고, 내장 허드렛일을 도맡던 어머니는 빵 공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수길은 병원 옥상에서 도살장의 모습을 목격한 뒤 충격에 빠져 한동안 부산물은 입에도 대지 않았지만, 소설의 마지막 즈음에는 조금씩 부산물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피 먹는 사람들이 많아 교회 들어올 곳이 못 된다는 황룡동에 교회를 세운 전도사는 부산물을 먹기 위해 노력한 끝에 선지국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허풍을 치며 자존심을 지켜오던 밤벌레 할머니는 자신이 떠벌린 허풍 때문에 설레발을 치는 정수네를 달래기 위해 수원의 어머니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한다. 외따로 떨어져 살아가는 것 같아도 결국 이들은 소와 돼지의 부산물을 먹고 살아온 변두리 주민들인 것이다. 한 때는 자신들의 생활방식과 가난, 식자재를 부끄러워하며 안타까워했지만 그것들이 자신의 억척스러움과 진득함, 강함을 이룩하게 해주었음을 인정하고 관계를 결속하고 유대하며 새로이 힘을 다진다. 국도와 만나는 8차선 도로 저편의 주택가 주민들의 삶을 동경했을지라도 언제까지나 동경만 하고 살아갈 수 없음을, 지독할 정도로 부끄러웠던 도살장 냄새에 질식하듯 사라진 아카시아 냄새를 기억하며 발돋움 한다. 힘의 원천이 되어준 아카시아 꽃이 자라던 용비봉을 향해, 무너지지 않은 상숙의 집을 향해 걸어가며 수원은 비로소 구심점을 지닌 강수원이 된다.
거짓말 같은 힘이 있는 작품이다. 첫 번째 장편소설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유은실은 자신의 원형을 깊이 파고든다. 속된 말로 떡밥이라 일러지는 복선을 말끔하게 처리해내며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작품을 완성해 냈다. 유은실은 어린 화자를 내세워 아픈 상처를 말끔하게 도려낸 뒤 새살이 돋아날 수 있도록 돕는다. 흉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돋아난 새살을 독자가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돕는다. 독자를 몰입시키고 아프게 만드는 작가의 괴물같은 힘은 그대로 변두리의 힘이 되어 1985년의 서울 변두리, 황룡동으로 인물과 독자 모두를 끌고 들어간다. 수원은 결국 수원으로 가지 않는다. 그토록 가고 싶었던 대한민국의 중심, '수원'이 아닌 '황룡동'에 남아 모든 관계, 모든 사태, 모든 감정의 중심에 오롯하게 자리한다. 작가가 떠밀었던 심연에서 제 스스로 발광하며 성숙해진 것이다. 수원의 성숙이 작가의 떠밀림에서 비롯된 것인지, 용비봉 위로 해가 솟아올랐을 때 따먹은 아카시아 첫꽃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소설의 첫 장에 등장하는 수원보다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수원이 훨씬 성숙해진 개체라는 점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