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거나 혹은 버리거나 in 부에노스아이레스
정은선 지음 / 예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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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이 책을 마주했을 때, "Ohlle!"하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지구의 정 반대편. 시간도 기후도, 생활 방식도 전혀 다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민수네 민박'에서 작가가 겪은 이야기를 풀어냈다는 소개글을 읽고 얼마나 읽고 싶어했는지 모른다. 찾거나 혹은 버리거나라니… 어쩜 이렇게 제목이 책의 내용과 맞아 떨어지는지 모르겠다. 책을 수령한지는 오늘(9)로 이틀째. 중간고사가 끝나는 날이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지은이가 겪은 이야기를 토대로 풀어놓은 『찾거나 혹은 버리거나』를 읽기로 계획을 세워 놓은 날이기도 한 오늘,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 180번을 타고 도중에 하차하여 집까지 바지런히 걸어오는 수고로움까지 감수했다.

 

나의 이런 수고로움에도 불구하고 프롤로그로 들어가는 책장을 넘겼을 때 내가 받은 실망감과 배신감이란 커다란 충격이었다. 단순한 여행 에세이 중에서도 아름답고 여유로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담은 사진과 작가의 사연. 게스트하우스OJ를 찾은 다른 사람들의 꾸밈 없는 사연을 읽으며 '그들처럼 찾거나 버릴 것'을 알아보려고 했던 나의 계획이 처참하게 무너진 순간이었다. 돈 씀씀이 헤프고 자존심 더럽게 센 OK김의 이야기로 시작된 첫 장은 내 머리를 강하게 내리치며 충격과 혼란. 그리고 실망감에서 한동안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분명 여행을 떠나기 전 작가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공항을 빠져나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게 프롤로그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전에 타고다니던 포르셰가 질렸다는 이유만으로 마세라티 콰트로포르테S를 산 것도 모자라 한정판이자 특수 제작된 은색의 핸드폰을 포장해 누군가에게 퀵서비스로 배달을 보낸. 드라마에서나 자주 볼 수 있는 돈 많고 자존심 드세고 사람 유형 파악하는데 이골이 나있는 왕자 케이스의 남자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떠나간 여자의 꽁무니를 뒤쫓는 것으로 이 책은 막을 열었다.

 

 OK김, 나작가, 원포토, 박벤처.

 사랑과 사회에게 상처 받은 네 사람과 OJ여사, 아리엘의 이야기

 

그런데, 어째서? 라는 의문은 책을 읽는 내내 머리속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정말, 어째서 작가는 '소설'도, '여행 에세이'도 아닌 애매모호함을 장르로 삼았을까? 한장, 두장, 하나의 소제목이 끝나가도록 나는 좀처럼 책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책의 중간중간에 튀어나오는 사진에 정신이 팔려 멍하니 바라보고 있기도하고 원포토의 신세가 안타까워 한숨을 폭 내쉬며 찬물을 들이키기도 했다. 도무지 글이 눈으로 읽혀 들어오는지 귀로 읽히는지 모를 정도로 앞장과 뒷장을 왔다갔다하길 반복하며 느리게 책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여름 방학때, 여행 에세이가 주는 흥분과 놀라움을 내게 가르쳐준 『청춘, 남미』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지는 글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을 단박에 깨버린 것도 바로 『찾거나 혹은 버리거나』였다. 제 1막의 지루함과 고리타분함. 그리고 답답함은 어딜 갔는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발을 들여놓은 네 사람은 서로 다른 시점에서 다른 방법으로 게스트하우스OJ를 찾아오게 된다. 달칵. 달칵. 달칵. OK김의 이야기, 나작가 이야기, 원포토 이야기, 게스트하우스에 먼저 들어와있던 박벤처 이야기. 이렇게 네 사람의 이야기가 한 장면씩 바뀌어가며 흘러가는 동안 오른손이 잡고있던 두툼한 페이지들은 단숨에 얇아지고 왼손이 쥐고있던 몇 장 되지 않던 페이지들은 급격하게 부피를 증가시키기 시작했다. 사진 한 컷. 이야기 한 줄 놓치는 것조차 아까워 한 장을 두번, 세번 읽으며 천천히 아르헨티나의 매력과 4인의 성장에 매료 되어갔다. 그래, 서두를 필요는 없을테지. 내가 읽고 있는 이 책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스타일Style로 흘러가니 독자인 나 역시 부에노스아이레스 스타일Style로 즐겨줘야지 않을까?

 



그저 사소한 사람 사는 이야기겠거니, 했던 이 책은 많은 질문을 던지고 그만한 대답을 얻어내고자 하고 있었다. 사연도 사는 방법도 다른 네 명의 사람들이 지구의 정 반대편에 위치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와서 찾으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고 버리려고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진정한 나'를 찾고 '내가 아닌 나'를 버리고 했던 '나'는 대체 어떤 모습의 '나'를 찾거나 버리고 싶었던 것일까?

 



"답답한 인생? 배부른 소리하지 마! 우리 젋을 때는 그런 불평할 시간도 없었어.

정신없이 달리다가 정신 차려보면 남은 게 아무것도 없어. 성공하면 뭐 해? 인생이 빈 껍데기인데."

 

OJ여사가 딸꿀질을 하며 물었다.

 

"답답하고 빈 껍질인 손님들이 여긴 왜 왔을까?"

 

박벤처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할 말을 잃었다. 나작가도 놀란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뭐 하러…… 왔느냐고?

 

박벤처는 넋이 빠진 것 같은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슴푸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왜 여기까지 왔는지…… 그걸 잊고 있었다.

 

《121p 본문 중에서》


해답이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는데도 찾지 못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의심과 상처와 불신 때문은 아닐까? 아주 가까운 곳에 해답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때때로 먼 길을 돌아서 와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네 사람처럼. 궂이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아니더라도 해답을 찾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이 몸을 담구고 있던 곳을 빠져나가 새로운 곳으로 향한다. 우리에겐 처음 겪는 장소이자 미지의 세계일지 몰라도 그 지역 사람들에겐 한없이 지루하고 일상적인 장소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그렇게 떠나는 것이다. 무언가를 찾거나 버리기 위해서.

 


USUAIA, end of the world. Beginning of everything. 

(우수아이아, 세상의 끝, 모든 것의 시작)

떠나는 순간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변함없이 어깨에 가방을 멘다.

끝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 336p 발췌



 

OK김이 그랬다. "우리는 모두 여행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찾기 위한 여행이라… 언제나 반항심과 의구심과 자아형성에 갈증을 느끼는 청소년들 역시 이런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들만의 '학생'이라는 좁은 우리 속에서의 여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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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와 로미오는 영원히 마스터피스 시리즈 (사람과책) 1
온다 리쿠 지음, 박정임 옮김 / 사람과책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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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서브컬처의 오마주.

 

내가 살아 숨쉬고 있는 지금은 21세기지만 내가 태어난 것은 20세기였다. 1901년부터 2000년까지가 20세기이고 2001년부터 2100년까지가 21세기이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20세기 인간인 샘이다. 그나저나 서브컬처의 오마주라니. 이건 무슨 소리일까? 서점에서 온다 리쿠의 소설, 로미오와 로미오는 영원히의 목차를 눈으로 확인했을 때 나는 그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쇼처럼 즐거운 인생은 없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왕과 나, 오즈의 마법사,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등등 내가 직접 눈으로 확인한 작품들은 아니었지만 익히 들어왔던 제목들이 쭉 나열되어 있어서 그 놀라움은 더욱 컸다.

 

서브컬처라는게 뭔지, 오마주라는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한때 유행했던. 지금의 아이들에게 제목만 말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할(어쩌면 알아 듣지도 못할) 문화들이 당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서브컬처의 오마주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른바 '문화 속의 문화'라고도 불리는 서브컬처를 영화에서 존경의 표시로 다른 작품의 주요 장면이나 대사를 인용하는 오마주 기법으로 묶어낸 이 책은 온다 리쿠의 섬세함과 20세기 작품에 대한 존경심이 그대로 묻어나있다. 대충 쓴 것 같으면서도 써야 할 곳과 쓰지 말아야 할 곳을 정확히 분간해내 끄집어 올 수 있는 용기에 새삼 감탄했다.

 

미주로 입력된 <20세기 서브컬처 용어 대 사전>을 먼저 읽어 내려가며 나는 조금씩 그녀가 작품에 집어넣어 인용하고 패러디한 글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프롤로그인 에덴의 동쪽을 읽었을 때의 긴장감! 드디어 노스텔지어의 마법사, 온다 리쿠의 소설에 다시 한 번 매료되는 순간이었다. 학원물이지만 SF라는 장르 때문에 학원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던 대도쿄고등학교에서의 이야기. 머나먼 미래. 아니,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정말로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치듯 지나가면서도 명확하게 그녀가 짚어내려고 하는 것이 있다면 '후손에게 되돌려줄 자원을 부디 소중히 생각하자'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녀의 소설은 지금까지 봐온 어떤 미스터리보다 더 미스터리하고 잔혹했다. 낭만과 그리움의 노스텔지어의 마법사라고 불리는 그녀가 잔혹해지는 순간은 대도쿄고등학교 학생들의 성적 테스트와 대도쿄 올림픽에서였다. 종목의 이름만들어서는 '뭐가 잔혹하다는거야?'하고 생각할 정도로 아련하고 향수마저 느껴지는 정글짐 오르기와 의자 뺏기와 수건 돌리기. 그리고 롤러스케이트 타기는 첨단 과학의 힘을 빌어 더욱 잔혹해지고 무시무시하게 변했다. 1미터 높이의 봉을 올라 추락하면 포인트가 감점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정글짐. 3분 동안의 무중력 상태에서 공중에 떠다니며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의자를 잡아야만 중력상태가 되었을 때 떨어지면 탈락되는 의자 뺏기 게임.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고무로 만들어졌지만 일정시간이 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어와 반응해 터지고 마는 수건. 아니, 문어 돌리기 게임 등 과학에 의존하면서도 잔인함으로 즐거움을 찾는 미래의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도 20세기와 21세기의 서브컬처를 바라보고 경험한 한 사람이구나, 하고 느꼈다. 내게는 당연하고 아련하게 남는 어린 시절의 게임들이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한없이 지루하고 따분한 게임에 불과한 것처럼 나도 지금의 어른들과 내 사이에 있는 기묘한 틈을 나와 후배들 사이에 생긴 틈으로 확인하고 있는 샘이다. 소비와 향락의 20세기. 경쟁과 범죄의 21세기. 어떤 곳이 내가 있던 세기고, 내가 있어야 할 세기인지 모르는 지금. 그 틈에 미묘하게 서있는 나는 그녀처럼 당당하게 노스텔지어를 꿈꿀 수 있을까?

 

이 리뷰를 쓰기 직전에 나는 한 리뷰어가 그녀의 소설을 읽고는 SF인데 소설적이기 보다는 애니메이션 적이다.고 써놓은 글을 읽었다. 그래. 그녀가 쓴 이번 소설은 카툰 속의 캐릭터가 연상되는 애니메이션적인 느낌이 있지만 그런 느낌 때문에 더 빨려들 수 있던게 아니었을까?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해 쓴 그녀의 소설을 읽어 내려가면서도 이것이 해피엔딩인지 세드엔딩인지. 아니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인지 수도 없이 생각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캐릭터들이 처한 상황과 대사들이 하나의 장면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그게 너무 또렷하게 보여 애니메이션적이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는 그러한 것들 때문에 그녀의 작품에 흠뻑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래에서 폭포수에 떨어져 '성불'한 아키라와 시게루가 소비와 향락의 20세기(쇼와 1960년대)로 뛰어든 것이 단순한 해피엔딩인지 세드엔딩인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다. 게다가 그녀 조차도 떠올리지 못했다는 제목의 의미(하지만 이 제목만이 어울린다고 고집하던 그녀의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도 생각해봐야겠다.

 

로미오와 로미오는 영원히.

하루를 전부 쓰며 읽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었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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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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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이벤트에 당첨되어 받게된 한비야의 『그건, 사랑이었네』를 오늘에서야 다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처음 받던 날, 내 손에는 이미 양나연씨의『빠담 빠담, 파리』가 들려있어서 책을 읽고 싶다고 말하던 같은 반 N에게 이 책을 빌려줬었다. 그리고 몇 주. 드디어 내 손에 다시 돌아왔을 때, 푸른숲에서 소포가 배달왔었을 때보다 더 큰 설렘이 내 가슴을 때렸다. 어떤 이야기일까? 책장을 넘길 용기가 나지 않아서 애꿎은 표지만 쓰다듬으며 마음 속으로 이야기를 그려봤다. 오지를 여행하며 긴급구호 활동을 하던 한비야 선생님의 에세이책이니 분명 다른 작가들의 에세이처럼 한없이 여리고 부드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나의 가슴을 때리고 내 어깨를 부여잡고 내 머릿속에 속삭이겠지? 책상 서랍에 넣었다가 다시 빼내었다가. 책장을 넘겼다가 다시 덮기를 몇 번. 읽을 준비가 됐다 싶었을 즈음 책 표지를 자신있게 넘겼다.

 

팔랑.

책장 한 장을 넘겼을 때. 나는 종잇장 넘어가는 소리가 무색하도록 책 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책을 읽는 내내 '무릎팍도사 한비야편'을 재방송으로 다시 시청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프로그램에서 이야기한 그녀의 이야기 이외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어서 더 좋았다. 그녀는 서론에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오지에 대한 여행기도 아니고 긴급구호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라고. 단지 여행을 마치고 쉬면서 지내는 동안 써온 것이라고.(내가 기억하고 있는게 맞는지 모르겠다.) 그녀의 서론을 지나 본문을 읽던 나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행동을 취했다. 바로 책에 밑줄 그어가며 읽기. 이 책이 내 책이라 마음 놓고 밑줄을 그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 학교에서 빌린 책이었다면 아마 물어내야 했었을거다. 난 그녀의 글을 읽으며 마음에 드는 문장에. 핵심에 밑줄을 죽죽 긋기 시작했다. 정말 의외였다. 단 한 번도 책에 밑줄을 그으며 읽은 적이 없던 내가 무의식중에 형광펜을 들고 밑줄을 긋고 있다니! 참 신기한 힘을 지닌 책이구나, 매력있는 작가구나 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난 한비야라는 사람을 알지 못했다. 중학교 때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책을 집어 든 적은 있었지만 그냥 어떤 대학 교사나 되는 사람이 심심해서 끄적거린 논문 비슷한 나부랭이겠거니 했었다. 책장도 넘겨보지 않고 그저 심플한 책 표지를 보고 그렇게 집어넣은 책 때문에 난 고등학교에 올라오기까지 한비야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었다. 간간히 주위에서 한비야가 어쨌다더라. 그녀의 책이 어떻다더라 하는 이야기만 들어왔지 읽을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그러다 결국 알게 된 것이다. 중간쯤 흘러간 무릎팍 도사에서 한 여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어? 한비야다!"하고 외치고 말았다. 한비야? 내가 그 여자의 얼굴을 알고 있었던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옆집에 살고 있던 언니처럼 편안한 느낌이 드는 것도 이상한데 얼굴 한 번 본 적 없고, 그녀가 쓴 책 한 권 읽어보지 않은 내가 어떻게 그녀의 얼굴을 하고 이름을 외쳤을까? 아무튼 무릎팍 도사를 보며 한비야의 이야기를 되씹으며 나는 결심했다. 그녀의 책을 다 읽어봐야겠다고.

 

그녀는 밝은 사람이다. 그녀의 밝은 성격 만큼이나 문체도 깔끔하고 밝다. 그녀의 책을 다 읽은 후에 나는 내가 그은 밑줄 부분만 다시 읽어보았다. 책을 고르는 방법. 하고 싶은 일을 찾을 때 먼저 해야 할 일. 다히로 이야기에서 가장 끔찍했던 부분과 감동적이었던 부분. 100권 읽기 운동 본부에 대한 그녀의 이야기. 종교가 전혀 다른 현지직원과 부엌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종교에 대해 알아가며 포용하던 장면. 모든 장면들이 머리 속에서 영상으로 변해 내 머리와 가슴을 울렸다.

 

"가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어라."라는 하느님 아버지의 전언을 그녀가 들었을 때, 마치 내가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은 것 처럼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흘렀다. 다히로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미 죽어버린 아이를 등에 들춰 매고 월드비전 의료팀에게 온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문턱을 넘었을 때 숨을 거둔 아이 앞에 몸을 떨며 울던 어머니의 손을 말없이 잡아주며 함께 울던 장면에서도 나는 그녀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물을 정화하는 알약을 구하지 못 해 살을 뚫고 나오는 기생중을 바라봐야만 하는 남부 수단 이야기도 모두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굳건한 그녀의 신앙에 대한 나의 부러움과 열악한 환경에서 열악하게 생활하며 불평불만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이 날 슬프게 만들었다.

 

그녀의 책을 읽고 나는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고작 전반 18분을 뛰기 시작한 학생이니 남은 시간동안 더 많이 배우고, 도전하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울고, 때쓰고 깨달으며 많이 사랑하고 많이 알아가고 싶다. 나는 그렇게 더 많이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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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 - 길고양이와 함께한 1년 반의 기록 안녕 고양이 시리즈 1
이용한 지음 / 북폴리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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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살고있는 집의 옆집은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이자 길고양이들의 놀이터였고 보금자리였다. 이 동네가 워낙 옛날 동네라 젊은 사람들 보다는 어르신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작은 규모의 마을인지라 비어있는 집도 여럿 있고, 고양이들이 뛰어놀기 좋은 수풀도 있어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심심찮게 고양이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특히 내가 중2때는 옆집 옥상에 갓태어난 새끼 고양이가 있어서 "야옹" 거리며 우는 미약한 소리를 따라 구경간 적도 있었다. 제 몸도 가누지 못한채 뒤뚱 거리며 자신의 어미를 찾아 "야옹" 거리며 울던 새끼 고양이들이 차갑고 더러운 시멘트 바닥에 놓여있는게 가여워 작아져서 입을 수 없는 옷을 가만히 놓아두거나, 엄마 몰래 생선살을 발라 접시에 받쳐 가져다 주기도 했다. 몇 개월 뒤. 고양이들을 보기 위해 담을 기어 올라가 옥상에 고개를 빼꼼히 들이밀었을 때, 그곳에 고양이는 없었다. 내가 자주 고개를 비추며 먹이를 챙겨줘서인지 아니면 다 자라버서 독립을 한건진 몰라도 아무렇게 헤쳐진 나의 옷만 남겨두고 떠나가버렸다. 그때의 허탈한 마음이란.

 

그 뒤로 한참 동안 고양이를 만나보지 못했고, 그 집은 더이상 고양이의 보금자리가 아닌 사람이 사는 주택이 되어버렸다. 요즘엔 집 앞도 예전같지 않아서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특히 음식물 쓰레기 수거함이 집집마다 보급되면서 고양이를 만나는 횟수는 급격히 줄어들고 말았다. 음식물 쓰레기 수거함이 보급되기 전에는 모두 쓰레기 봉투에 담아 버렸기 때문에 유기견이나 유기묘들이 주린배를 채우기 위해 쓰레기 봉지를 헤쳐 배를 채우곤 했지만 요즘엔 그런 음식도 구하기 힘들 정도다. 게다가 한국이란 나라는 고양이를 저주의 상징이자 집안에 화를 불러오는 동물이라고 생각할 정도니 대부분은 로드킬을 당하거나 굶어 죽거나, 누군가에 의해 잡혀가거나 학대를 당하다 죽어가기가 일쑤다. 그래도 요즘엔 젊은층 사이에서 고양이를 반려동물로 생각하고 함께 동거하는 집사들이 늘어가고 있는 추세지만 그래도 한국인의 고정관념을 깨트리긴 힘들다.

 

며칠 전엔 이런 일이 있었다. 야자를 마치고 다른 애들보다 15분 일찍 나오는데 반대편 가로등 아래로 노란 아기 고양이가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아래쪽에서 올라오던 한 아이가 "어? 고양이다!"하고 외치니 그 옆에 서있던 어머니가 아이의 어깨를 자신 쪽으로 확 잡아당기면서 "저건 재수없는 동물이야. 큰일나요!"라고 말하는게 아닌가. 이제 막 유치원에 들어갔을법한 아이에게 동물을 사랑해라, 동물을 미워하지 마라 하는 말은 해주지 못할 망정 재수없는 동물이라니! 마음 같아서는 뒤를 좇아가 뒷통수를 가방으로 내려치고 싶을 정도였다. 사람보다 훨씬 깨끗하고 정직하며 믿을 수 있는 동물인 고양이보고 재수없는 동물이라니. 대체 그런 사고방식은 어디에서 나오는걸까?

 

작가가 풀어놓은 '길고양이 보고서'를 읽으며 웃음 짓기도 했지만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집고양이는 많게는 15년을 살지만 길고양이는 많아야 3년을 산다는 문장에 얼마나 놀랐는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인간과 자동차와 천적을 피해 살아남아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그들의 수명을 갉아먹고 있는게 틀림 없다. 그런 길고양이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미는 사람들을 미친 사람 취급 하는 것도 모자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있겠지만 "고양이만 보면 재수가 없어서 그냥 타이어로 깔아 뭉개버려요."라든지 "고양이는 다 죽여버려야되!"하고 말하던 사람들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어째서 그들은 자신의 인권은 보호받길 바라면서 동물들의 인권이란건 생각하지 않는걸까? 가장 사람하고 친근한 동물인 견종은 좋아하면서 왜 묘종만 기피하고 싫어하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아파트에서 동물을 키우려면 성대수술을 시켜 소리를 못 내게 만드는 수술까지 당연시 되고 있는 상황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에게 부모가 그 수술을 시켰다면 인권 침해이자 아동 학대라며 들고 일어설거면서 왜 동물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그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인간은 야생동물의 영역인 자연을 빌려 사용하고 있으면서 그들에게 감사할 줄을 모른다. 오히려 그들을 등한시하고 학대하고 경멸하며 하찮게 여기며 자신들의 생명은 우선시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죽임 당하는걸 꺼려한다. 어째서? 우리가 그들과 다른 것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뿐이다. 우리도 그들과 같은 동물인데 왜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거지? 우리 나라도 일본이나 다른 나라들처럼 길고양이를 만지고 먹이를 건네줄 수 있는 나라였으면 좋겠다. 귀한것, 좋은것만 따지고 보호하려들기 보다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들을 사랑할 줄 알면 좋겠다. 그들도 인간과 다름 없는 생명체고 생각을 한다는걸 알았으면 좋겠다. 그들도 인간 같이 심장이 뛰고, 인간처럼 뜨거운 피가 흐른다는걸 알았으면 좋겠다.

 

내가 사는 이 사회가. 이 나라가 인간 중심이 아닌 공동의 사회였으면 좋겠다.

동물과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꿈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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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16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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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릴때에도 그랬지만 고등학생인 지금에도 나는 가끔 '내가 마법을 부릴 줄 알면 좋겠다.'라든지 '마법사가 내 앞에 나타나 내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면 좋겠다.' 따위의 생각을 하곤 한다. 그만큼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되돌리고 싶은 일이 산더미와 같아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마법사가 존재한다면…'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내가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하고 생각하며 자신의 행동을 탓하고 있다보면 어느덧 나는 자연스럽게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만약, 시간이 되돌려진다면 어땠을까?'에 대해 상상하곤 한다. 이는 내가 할 일이 없어서도 아니고, 다른 아이들보다 공상적이어서도 결코 아니다. 단지, 후회하는 일이 많을 뿐.

 

오늘만 해도 창업계획서 작성을 미루는 바람에 불려가고 싶지 않은 선생님께 불려가 쓴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결코 유쾌하지는 않는 일. 하지만 불려가는 그 순간에 머리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수십가지의 생각 중에서 나는 또 한번, 의식 중이든 무의식 중이든 간에 '~일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바라고 소망해도 과학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는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내가 후회하고 있는 일에 대해 위로를 얻고 싶기 때문은 아닐까? 얼마 전에 구입한 『위저드 베이커리』에서는 내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하던 '마법사'라는 존재가 튀어나온다. 약간 심하게 똘끼 가득한 설정이었지만 그래도 '마법사'라는 것 자체 하나에 위안을 받았다. 직접적은 아니더라도 간접적으로나마 미지의 존재를 만났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과 감동이 내 마음을 지배한 것이다.

 

책임감이 과연 무엇이기에. 『위저드 베이커리』의 제빵사이자 마법사는 사람들이 원하는 소원을 이루어 줄만한 빵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었다. 글을 읽고 있는 나조차도 돈을 지불하고 구입하고 싶을 정도로 유혹적인 능력을 가진 빵들을.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 빵을 사용했을때 오는 부작용과 결과는 오직 구매자가 책임져야 한다는 안내 문구. 그 문구 하나에 내 어께가 얼마나 무거워졌는지. 내 가슴이 얼마나 싸늘하게 식어버렸는지 이 글을 쓴 작가는 알고 있을까? 내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바로, 책임. 무시하고 싶어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단어다.

 

책임이 뭐길래. 대체 이게 뭐길래 나를 이렇게도 옥죄는 것일까? 나는 책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지라고? 과연 내게 그럴 능력이 있는 것일까? 내가 한 일에 책임을 질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 내게 있는 걸까? 그렇다면 그 책임은 어떻게 지는 거지? 올해 중반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그간 잘 활동하던 방송부를 빠져나오며 선배들에게 쓴소리를 얻어 들었던 적이. 애들 사이의 트러블도 있는데다가 단장이라는 지위가 주는 압박감도 심심치 않았고, 무슨 일을 시켜도 하려고 하지 않는 후배들이나 동급생의 태도에 지독한 스트레스를 받아 충동적으로 뛰쳐나온 방송부였다. 사람에 대한 정이란 정은 바닥을 치고 있어서 선배들에겐 한 마디의 말도 없이 선생님께 말씀 드려 방송부에서 문예부로 부서를 옮기게 된 것이다.

 

그런데 비릿한 웃음을 띄운 채 지금껏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선배들을 보며 코웃음을 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한 일이 없다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지금껏 내가 쓰러져가는 방송부 입지 굳혀보려고 얼마나 머리 쥐어싸면서 선생님들에게 아이디어 상의하고 최소한의 지원과 신뢰를 얻었는지도 모르면서 그런 소리나 찍찍 내뱉고 있는거다. 게다가 내가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지라는 말에 또 한번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영상제 참여에 대해 일을 벌여놨으니 수습하라는 거였는데, 영상제 참여할건지 이야기만 나오고 콘티나 스토리는 나 혼자 작성한게 전부였고 다른 선생님들한테는 전혀 말도 없이 우리들 사이에서 가타부타 말만 많았던 일이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책임지라고.

 

아무튼 꽤나 말이 많았던 6개월 속에서 나는 책임 아닌 책임을 져야했고, 그 사이에 받은 스트레스와 상처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나마 방송부에 가지고 있던 정까지 뚝 떨어지게 만드는 그 태도들에 사람 자체를 증오하게 만드는 놀라운 능력. 그저 박수를 쳐주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마음 같아선 『위저드 베이커리』에서 나온 빵을 그네들에게 돌려 내가 받은 상처 이상의 고통을 체험하게 해주고 싶었지만 책임이라는걸 져야하니, 그저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작가는 우리에게 '책임을 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언제나 자신이 하려는 일에 대해 앞서 생각하고, 그 일이 가져오는 결말과 변수를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지 판단한 후에 결정하고 행동하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나였더라면 분명 책임의 압박에 짓눌려 도망쳐버렸을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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