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로미오와 로미오는 영원히 ㅣ 마스터피스 시리즈 (사람과책) 1
온다 리쿠 지음, 박정임 옮김 / 사람과책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20세기 서브컬처의 오마주.
내가 살아 숨쉬고 있는 지금은 21세기지만 내가 태어난 것은 20세기였다. 1901년부터 2000년까지가 20세기이고 2001년부터 2100년까지가 21세기이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20세기 인간인 샘이다. 그나저나 서브컬처의 오마주라니. 이건 무슨 소리일까? 서점에서 온다 리쿠의 소설, 로미오와 로미오는 영원히의 목차를 눈으로 확인했을 때 나는 그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쇼처럼 즐거운 인생은 없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왕과 나, 오즈의 마법사,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등등 내가 직접 눈으로 확인한 작품들은 아니었지만 익히 들어왔던 제목들이 쭉 나열되어 있어서 그 놀라움은 더욱 컸다.
서브컬처라는게 뭔지, 오마주라는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한때 유행했던. 지금의 아이들에게 제목만 말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할(어쩌면 알아 듣지도 못할) 문화들이 당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서브컬처의 오마주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른바 '문화 속의 문화'라고도 불리는 서브컬처를 영화에서 존경의 표시로 다른 작품의 주요 장면이나 대사를 인용하는 오마주 기법으로 묶어낸 이 책은 온다 리쿠의 섬세함과 20세기 작품에 대한 존경심이 그대로 묻어나있다. 대충 쓴 것 같으면서도 써야 할 곳과 쓰지 말아야 할 곳을 정확히 분간해내 끄집어 올 수 있는 용기에 새삼 감탄했다.
미주로 입력된 <20세기 서브컬처 용어 대 사전>을 먼저 읽어 내려가며 나는 조금씩 그녀가 작품에 집어넣어 인용하고 패러디한 글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프롤로그인 에덴의 동쪽을 읽었을 때의 긴장감! 드디어 노스텔지어의 마법사, 온다 리쿠의 소설에 다시 한 번 매료되는 순간이었다. 학원물이지만 SF라는 장르 때문에 학원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던 대도쿄고등학교에서의 이야기. 머나먼 미래. 아니,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정말로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치듯 지나가면서도 명확하게 그녀가 짚어내려고 하는 것이 있다면 '후손에게 되돌려줄 자원을 부디 소중히 생각하자'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녀의 소설은 지금까지 봐온 어떤 미스터리보다 더 미스터리하고 잔혹했다. 낭만과 그리움의 노스텔지어의 마법사라고 불리는 그녀가 잔혹해지는 순간은 대도쿄고등학교 학생들의 성적 테스트와 대도쿄 올림픽에서였다. 종목의 이름만들어서는 '뭐가 잔혹하다는거야?'하고 생각할 정도로 아련하고 향수마저 느껴지는 정글짐 오르기와 의자 뺏기와 수건 돌리기. 그리고 롤러스케이트 타기는 첨단 과학의 힘을 빌어 더욱 잔혹해지고 무시무시하게 변했다. 1미터 높이의 봉을 올라 추락하면 포인트가 감점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정글짐. 3분 동안의 무중력 상태에서 공중에 떠다니며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의자를 잡아야만 중력상태가 되었을 때 떨어지면 탈락되는 의자 뺏기 게임.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고무로 만들어졌지만 일정시간이 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어와 반응해 터지고 마는 수건. 아니, 문어 돌리기 게임 등 과학에 의존하면서도 잔인함으로 즐거움을 찾는 미래의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도 20세기와 21세기의 서브컬처를 바라보고 경험한 한 사람이구나, 하고 느꼈다. 내게는 당연하고 아련하게 남는 어린 시절의 게임들이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한없이 지루하고 따분한 게임에 불과한 것처럼 나도 지금의 어른들과 내 사이에 있는 기묘한 틈을 나와 후배들 사이에 생긴 틈으로 확인하고 있는 샘이다. 소비와 향락의 20세기. 경쟁과 범죄의 21세기. 어떤 곳이 내가 있던 세기고, 내가 있어야 할 세기인지 모르는 지금. 그 틈에 미묘하게 서있는 나는 그녀처럼 당당하게 노스텔지어를 꿈꿀 수 있을까?
이 리뷰를 쓰기 직전에 나는 한 리뷰어가 그녀의 소설을 읽고는 SF인데 소설적이기 보다는 애니메이션 적이다.고 써놓은 글을 읽었다. 그래. 그녀가 쓴 이번 소설은 카툰 속의 캐릭터가 연상되는 애니메이션적인 느낌이 있지만 그런 느낌 때문에 더 빨려들 수 있던게 아니었을까?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해 쓴 그녀의 소설을 읽어 내려가면서도 이것이 해피엔딩인지 세드엔딩인지. 아니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인지 수도 없이 생각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캐릭터들이 처한 상황과 대사들이 하나의 장면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그게 너무 또렷하게 보여 애니메이션적이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는 그러한 것들 때문에 그녀의 작품에 흠뻑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래에서 폭포수에 떨어져 '성불'한 아키라와 시게루가 소비와 향락의 20세기(쇼와 1960년대)로 뛰어든 것이 단순한 해피엔딩인지 세드엔딩인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다. 게다가 그녀 조차도 떠올리지 못했다는 제목의 의미(하지만 이 제목만이 어울린다고 고집하던 그녀의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도 생각해봐야겠다.
로미오와 로미오는 영원히.
하루를 전부 쓰며 읽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었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