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존 버거 지음, 강수정 옮김 / 열화당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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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에서 죽은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두는 건 이전에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들에게 두어야 할 시간조차 쪼개어 성공을 위해 분투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됩니다. 따라서 필자가 글머리에 '죽은 이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이제 정치적인 행위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지금은 세상에 있지 않지만 글 쓸 당시 초로의 나이였던 필자는 유럽 곳곳 자신의 삶 속에 끼여들었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남기면서, 독자들에게 이 '정치적인 일'을 함께 즐겨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죽은 이들과 함께하기는커녕, 마주하는 이들과 함께하지도 못하는 독자들에게...


리스본

필자의 어머니는 망자가 된 이후 자신이 있을 곳을 리스본으로 정했습니다. 하지만 살아생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이라 이곳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불명확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장소가 환기하는 인물 간의 추억이 없는 것이겠지요. 어머니와 오가는 일상적인 대화. 리스본의 정서. 산업화의 물결을 제대로 타지 못하고 쇠락의 길로 접어든 리스본의 비어있는 느낌은  어머니의 부재에 대한 허전함과 겹쳐집니다. ''네가 찾아낸 것만을 쓰렴.' 어머니의 당부의 말과 같이 어머니와 대화하는 필자의 감정선은 지나치지 않습니다.


제네바

필자는 리스본에서 어머님을 추억한 뒤, 딸과 함께 제네바에서 생을 마감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무덤을 방문하여 추모합니다. 추모라기보다는 영감을 얻기 위해 방문한 느낌. 그는 제네바의 정서를 표현하는데 애를 많이 먹었던 것 같습니다. '살아 숨 쉬는 사람만큼이나 모순적이고 불가사의한 도시', 어린 남자의 고민을 알아차린 매춘부의 '거기 좀 앉아요. 가서 뭘 좀 가져올게요.'라는 말을 남기는 것과 같은 정서. 저는 생소한 비유들을 통해 인물과 장소를 엮으려는 시도에 고개를 갸우뚱했으며, 이로 인해 산만해져버린 시선은 보르헤스가 남긴 글에 공감을 얻으면서 제자리를 잡았습니다.


아침의 기억

버질과 프로스트의 시.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의 음성

많은 사람들의 사랑, 또는 대화.

그것이 부적임엔 틀림없지만, 부질없나니

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둠에는

내가 이름 붙여서는 안 되는 어둠에는


삶의 은유를 만끽하고 싶은 시인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그리고 필자가 삶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함께 그려보게 됩니다.


크라쿠프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의 상흔이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크라쿠프. 크라쿠프의 소박한 거리 풍경 속에서 그는 친구로, 멘토와 멘티 관계로 많은 것을 나누었던 한 인물을 추억합니다. '환상이 결여된 그의 시각도 사랑했었다. 그는 환상을 품지 않았기 때문에 환멸도 겪지 않았다.' 전쟁이 할퀴어간 대지에서 평상심을 유지하며 살기 위해선 이런 냉정한 시각이 도움이 되리라. 어머님은 아련함을 남기는 것과 달리 그를 추억함은 비통한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아일링턴

런던의 외곽 아일링턴에서 대학교의 열정을 공유했던 오랜 벗과 이야기. 친구의 죽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학창시절 함께 젊음의 꽃을 나누었던 추억이 오버랩 됩니다. 나이가 들어도 친구와 만났을 때는 역시나 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가 싶네요. 다만 다른 점은 흘러간 것을 추억한다는 것. 저는 나이가 들어 젊음의 완전함을 나누었던 추억을 꼽씹어 볼 수 있을지... 젊음이 가기 전에 몸의 온전함을 완성해보고 싶습니다.


퐁다르크 다리

프랑스의 아르데슈 강이 흐르는 골짜기. 이 강물이 만들어낸 동굴 안 크레마뇽인들이 남긴 벽화를 바라보면서 그는 남편이 고고학자였고, 죽음을 앞둔 친구의 어머님을 떠올립니다. 그가 너무 이른 시기의 사람들에게 감정이입을 했던 탓일까요? 마치 화석을 건네주는 느낌을 받으면서, 책에 집중하기가 힘들어집니다.


마드리드

마드리드의 한 호텔 라운지에서 필자는 친구를 기다리며 출입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화려한 사람들의 모습에 현혹되지 않고 나와 이어질 수 있는 부분부터 천천히 찾아가는 잔잔한 시선. 전형적인 작가, 혹은 화가의 시선입니다. 시선의 중간에 돌아가신 은사님의 모습이 엿보입니다. 그에게 배운 것을 기반으로 먹고살아갔기 때문인지, 그의 시시콜콜한 부분을 넘어가면서 글을 마무리 짓습니다.



"우리네 삶 속으로 스며드는 생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혼자만의 공간, 혼자만이 가질 시간이 필요하다고들 말합니다. 이는 삶의 궤적이 커져갈수록, 앞으로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들이 늘어갈수록, 함께 숨 쉬고 있지 않은, 죽은 이들이 내  삶속에 많아질수록, 그때로 돌아가 그들과 대화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Erik H.Erickson이라는 분석가가 인생의 궤적을 그려본 'Eight Stage of the life Cycle'의  마지막 구간인 'Stage 8 : Intergrity vs Despair'이 떠올랐습니다. 60대에서 죽음을 마주하는 사람들이 통합하고자 하는 것은 소설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에서 다루는 '내 삶 속으로 스며드는 생들'이 아니겠는지요?

"우리네 삶 속으로 스며드는 생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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