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나를 쌩 루이 섬에 사는 백모 한 분께 소개해 주었는데, 나는 매주 목요일과 일요일, 르피트르 씨나 그의 부인과 동반하여 그 집에서 저녁을 먹어야 했다. 이날은 르파트르 씨 부처의 외출일로, 밤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를 데리러 왔었다. 야릇한 레크리에션이었다. 백모 리스토메르 후작 부인은 엄숙한 귀부인으로, 나에게 돈 한푼 줄 생각을 안했다. 큰 성당처럼 늙었고, 세미화처럼 화장하고 사치스러운 옷차림을 한 그녀는, 루이 14세가 아직 살아있는 듯한 모습으로 저택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녀가 상대하는 사람은 늙은 부인과 귀족들뿐으로, 화석체 같은 그 사회가 나아게는 꼭 공동묘지에 들어가 있는 듯 느껴졌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고, 나도 먼저 말을 꺼낼 용기가 없었다. 그들의 적의에 찬, 또는 냉담한 시선에 접할 때면, 그들 모두에게 방해물처럼 보일 나의 젊음이 부끄러웠다.  
   

    

 발자크 같이 술술 책장이 넘어가는 작가는,  

일부러라도 천천히, 느긋하게, 책을 다 읽는 게 독서의 목적이 아닌 듯이, 지연시켜가며 읽을 필요가 있다.  

학부 때 수업에서 읽을 때는 그렇게도 싫어했던 작가를(소설 강독 수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가는 뒤라스와 셀린느였다) 뒤늦게 번역본으로 한 권 한 권 찾아 읽으며 다시 (그것도 매우) 좋아하게 된 것은, 발자크를 읽는 나만의 그 리듬을 내가 즐기면서부터였다.  지하철이나 고속철, 혹은 비행기를 오래 탈 일이 있을 때 핸드백에 넣을 책으로 선택되는 책은 십중팔구, 페이퍼백 체홉이나 똘스또이, 혹은 문고본의 발자크인데, 그건 독서의 목적이 책(작품)을 다 읽는 게 아니라, 독서 그 자체, 독서를 하는 그 시간 자체를 오롯이 즐기는 데 있을 때 안성맞춤인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미지근하게 깨어 있는 흐릿한 심신 속을 가는 실 같이 무정형으로 끊어질 듯 이어지며 부유하던 스토리가, 어느 순간 어떤 장면 어떤 그림으로 환하게 불이 켜진듯 선명하게 떠오른다. 나는 그 패러그라프의 한 문장 한 문장을 천천히 더듬어가며, 마치 암전에서 조금씩 빛을 찾아가듯, 작은 연장으로 세계를 조립해가듯, 최대한 뜸을 들이며 공들여서 장면  하나하나를 내 것으로 만들어간다. 나를 둘러싼 세상과 완전히 동떨어져 상상 속에서 무언가가 생산되어가는 그 순간의 열기와 리듬을 오롯이 느끼는 그 찰나, 그 쾌감이란.   

 그렇게 한 패러그라프가 완전한 그림으로 내 것이 되고, 단어 사이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 숨겨져 있던 작가의 눈찡긋거림을 발견하고 나면 더없이 만족하고 행복한 기분으로 잠시 책을 내려놓고는 눈을 감는다. 이 순간 이 세상 그 누구도 보고 있지 않은, 알아채지 못한 어떤 깜찍한 비밀을 혼자서 엿본 사람처럼 부풀어 그 어떤 불합리와 불운도 용서할 듯한 기분에 빠진다. 이윽고 열차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는 서둘러 내릴 채비를 한다.    

그 장면들은 스토리 상으로 특별히 중요한 장면이거나, 묘사가 특별히 아름답거나, 작품 이해의 중심축이 되는 장면들이 아니다.  그보다는 소설 속 시간, 소설 속 서술의 시간이 주인공의 심리 변화의 시간이나 상황의 시간과 거의 일치하는 순간이랄까, 이 순간의 시간은 독자인 내가 영위하는 마음의 속도, 일상적 시간의 속도와도 거의 일치한다. 책을 읽는 시간은 곧 주인공이나 상황이 살아가고 전개되는 시간이 되고, 내가(내 마음과 정신이) 존재하는 시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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